자연을 닮은 사람들

크로아티아 스플릿

by 신지명

널찍하고 편안한 숙소에서 모든 짐을 오므리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계속되는 '떠남'의 생활이 아직은 문제 되지 않지만 어디쯤에선가는 힘겨운 나와의 싸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옆 방의 부부는 아직 잠을 깨지 않은 것 같아서 '저희 가요'하고 문 밖에서 나직이 말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부부가 창가에 몸을 기대어 크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서로 무사히 여정을 마치기를 빌어주었다.
우리가 처음 내렸던 쓸쓸한 오두막 정류장에는 두 팀이 더 나와있어 버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좀 이른 아침인 탓에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몸에 한기가 배이기 시작할 때쯤 버스가 왔다. 200km가 넘는 거리를 가야 하는지라 버스표도 157쿠나나 되었다. 역시 여기서도 가방 하나 당 7쿠나 씩을 더 내야 해서 우리는 가방을 두 개만 맡기고 나머지는 어떻게든 자리 위, 아래로 쑤셔 넣었다. 보아하니 직통버스가 아니고 동네마다 모두 들르는 버스라서 큰 짐 없이 타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러면 우리 같은 여행객에게 기름값 명목으로 차등을 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싶긴 했다.
플리트비체에서 스플릿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었다.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릉이 나타나기도 했고 회색빛 거대한 돌산이 산맥을 이루어 끝없이 이어져있기도 했다. 고속도로는 전혀 아닌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기도 했고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을 향해 달리기도 했다. 창밖의 날씨도 너무나 선명하게 빛났다.
그 풍경들을 보니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이곳의 풍경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러시아나 오스트리아도 사람들이 그곳 풍경이나 날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경직되어있고 냉랭하지만 예술적이고 여성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자유롭고 온화한 모습들이 있었다. 친절하지만 쾌활하거나 시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 크로아티아는 사람들이 흥이 많고 매우 쾌활해 보였는데 남자고 여자고 단단한 느낌도 있었다. 마치 이곳에 펼쳐진 돌산처럼 말이다. 인간이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직접 그 모습들을 비교해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창세기에 나온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씀이 맴돌았다.

스플릿의 버스터미널은 해안가에 바로 인접해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박해있는 유람선과 요트들이 눈에 띄어 휴양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에 감탄할 새도 없이 서둘러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크로파라다이스 그린 호스텔 Croparadise Green Hostel'은 터미널에서 십오 분쯤 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고 스플릿의 중심이 되는 디오클레시안 성곽 바로 앞에 있었다. 방이 넓지는 않았는데 작은 공간을 아늑하게 꾸며놓은 데다가 새로 칠을 하고 단장을 했는지 매우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문을 열면 바로 골목길이 나오는 방의 입구가 정스러웠다. 우리는 작은 부엌에 나란히 앉아 빗소리와 음악 소리,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녹였다. 마치 이제 막 신혼살림을 시작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비는 금세 그쳤고 거짓말처럼 새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우린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로마시대의 황제들이 휴양을 즐기며 머물렀다는 디오클레시안 성곽 안은 그 시대의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그 안에 상점이나 커피숍들이 들어서 있었다. 낡고 오래된 것을 버리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을 불편하다거나 번거롭다고 느끼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이들을 멋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의 삶이 분명 더 쾌적하고 편리하기는 한데 '마음을 두고 싶은 곳'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늘 물음표였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더러운 인형이나 부서진 장난감이 진열대에 놓인 반짝거리는 새 인형보다 더 애틋한 것처럼 삶의 공간도 시간이 걸어놓은 마법으로 마음속에 묶여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그럴 여유도 없이 시시각각 바뀌어가고만 있는 것이 안타깝다. 영혼도 철학도 담기지 않은 조각품에 자꾸 손을 대어 덕지덕지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끝없는 변태만 거듭하다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는지..
세월이 묻어있는 이곳의 거리에서 풍겨지는 여유로움 때문에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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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 리바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예사롭지 않은 석양이 질 것 같아 우리는 서둘러 '마르얀 Marjan'이라는 동산 위 전망대로 향했다. 계단이 굽이굽이 이어져 욱신거리는 다리를 끌며 힘겹게 올라야 했으나 점점 더 짙어지는 하늘빛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드디어 언덕을 다 올라 탁 트인 전망대에 섰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스플릿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리의 피로쯤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막상 햇빛이 반사될 구름이 많지 않아 새빨갛게 물드는 하늘을 보지는 못했지만 석양을 닮은 스플릿 건물들의 지붕색이 더욱 붉어지는 모습과 저 멀리 거대한 돌산이 붉게 물드는 풍경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를 둘러싼 거대한 공간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지켜보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었다.
그저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타려는 목적으로 들른 스플릿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루만 잡은 일정이 아쉽기만 했다. 그나마 배가 내일 저녁에나 출발하니 그 전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진하게 머물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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