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의 의미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by 신지명

플리트비체의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에 뒤척거리기만 하고 정작 일어나지는 못 했다. 날씨는 어제보다 화창했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빛났다. 하지만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몰라 서둘러 아침을 먹고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햇살이 쏟아지는 숲은 어제의 음산함이 모두 사라지고 새벽녘 내려앉은 이슬로 촉촉해져서 상쾌한 공기로 우리를 또 잡아세웠다. 작은 들꽃은 아침이슬이 무거워 아직 고개를 떨군 채였고 부지런한 몇몇 녀석들만 돌돌 말린 꽃잎을 조심스럽게 열고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보느라 또 한참을 흙냄새에 코를 박고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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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비수기 마지막 날(3월 31일)이라 반값인 55 쿠나의 티켓으로 당당히 입장했다. 보트가 없었으면 빙 둘러 가는 길로 시작을 했어야 했는데 마음 편히 보트에 올라 호수 건너편부터 길을 시작했다. 선착장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작은 폭포들이 시작됐는데 비가 온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 많은 물이 어디서 쏟아져 내릴까 싶도록 시원하게 쏟아졌다. 게다가 제법 센 물살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줄기를 뻗어 올린 채 꽃을 피운 식물들이 물살을 여러 줄기로 갈라내고 있어 그 모양새가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호수 전체에는 풍경을 전혀 해치지 않고 오히려 운치를 더하는 판자길이 죽 이어져있어서 그 길을 따라 끝도 없이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났다. 때로는 나무판자 사이사이로 물이 넘쳐 올라오기도 하고 길의 옆 면을 찰싹거리며 작은 파도가 치기도 했다. 그 물살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유혹에 못 이기고는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다. 뭉글뭉글한 느낌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면서도 심장까지 찌르르하게 하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자세를 낮추고 보니 햇빛이 물에 닿아 부서지는 풍경이 또 장관이었다.
플리트비체는 상부 호수와 하부 호수로 나뉘는데 상부 호수가 TV나 사진에서 보던 그 풍경이었다. 아직 나무들이 앙상해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양한 높이의 폭포들이 계속해서 나타난 덕에 우리는 우와~놀랬다가 잠시 뒤에 더 크게 우~~~~ 와하고 계속해서 놀래야 했다. 크기나 높이로 규모를 따지자면야 훨씬 어마어마한 폭포들이 많겠지만 아름답기로 순서를 매기자면 이곳을 따라오기가 쉽지는 않을 듯했다.
폭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물살을 이겨내고 솟아있는 꽃대나 사철 내내 이곳을 초록빛으로 지켜냈을 것 같은 이끼들이었다. 거센 물살이 이 녀석들에게만은 관대하게 흐르는지 어느 것 하나 꺾여 쓰러진 것이 없어 볼수록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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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호수와 식물들을 오랜 시간 둘러보다 보니 내 발만 종종종 움직이고 있고 그 위로 난 내 몸뚱이는 그 풍경 속에 녹아들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잡스러운 생각도 들지 않았고 풍경의 어느 것 하나도 내 몸에 불편하게 닿는 것이 없었다. 가끔 무섭게 휘몰아친 바람만 빼고.
마치 세상에 태어나 내게 주어진 임무라곤 이것들을 둘러보고 눈에 담고 기억하며 감탄하는 일이 전부인 것 같았다.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가 창조된 모든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다스리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세상에 내어진 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잘 있나 둘러보고 바라봐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의 전부였다는 이야기 말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웠고 완전한 것이었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일 뿐이다. 세상이 우울하고 끔찍하다고, 불완전하고 어지럽다고 불평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인 것이 몹시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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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감탄하느라, 길을 잘못 들어 같은 폭포 앞을 서너 번 씩 지나다니느라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네다섯 시간 만에 선착장에 겨우 내려왔는데 아직 하부 호수는 가지도 못 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해서 아침에 봤던 찬란한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여행지의 매력을 결정하는 데에 날씨가 적어도 칠 할은 차지하는 것 같다.
날씨가 우중충해진 탓일까, 오랜 탐험에 좀 지친 탓일까. 하부 호수는 절벽 아래로 평온하게 흐르고만 있어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집주인이 하부 호수 끝에 있는 큰 폭포를 꼭 봐야 한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 한참을 걸어갔다. 물의 흐름 상 큰 폭포가 절대로 나타날 것 같지 않은 의심이 들어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었는데 묻는 족족 답을 해주는 것을 보니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삼십여 분쯤 걷자 가까운 곳에서 '콰콰콰콰'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따라온 물줄기의 폭포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였다. 소리를 따라 찾아간 폭포는 절벽 아래로 물안개를 피워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규모가 제법 컸고 우리가 따라온 물줄기로 합류하며 거센 물살을 만들어내 흘러가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멋진 폭포를 드디어 보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입구 2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려면 절벽 건너편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우리가 오던 길로는 건너가는 곳을 보지 못 했다. 큰 폭포에 이르기 직전에 나무로 막아놓은 계단이 있었을 뿐이었다. 흠... 버스를 타려면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가서 반대편 길을 다시 그만큼 올라가야 하는데... 막아놓은 계단으로 내려가면 분명 호수를 건너는 아래쪽 길이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문에 걸쳐진 나무를 넘어 내려가 보기로 했다. 큰 폭포의 부서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가파른 계단을 한없이 내려가야 했다. 그곳에 길이 없다면 다시 올라와야 해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머뭇거려졌으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폭포를 보는 것만으로도 멋있겠다 싶어서 일단 끝까지 내려가 보았다.
폭포의 바로 아래에 이르자 돌계단이 끝나고 절벽 뒤로 판자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먼저 커다란 절벽을 끼고 돌아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보았는데 절벽 저쪽에서 외국인 여자가 나처럼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나와 얼굴이 마주쳤다. 둘 다 흠칫 놀람과 동시에 길이 이어졌음을 확인한 반가움에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나는 냉큼 절벽을 돌아나가 좀 더 앞으로 걸어갔는데 안타깝게도 2~3m쯤 되는 길 위로 물살에 거세게 지나가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그 여자의 일행들이 서너 명 서서 그 길을 건널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 몇 발자국만 건너면 갈 수 있을 텐데... 통나무도 하나 놓여 있어서 더욱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는 물살이 제법 거세게 흐르고 있어 위험해 보이긴 했다. 웬만하면 선뜻 나서서 머뭇거리는 나를 데려갔을 남편도 저런 물살은 우습게 보면 안 된다며 발길을 돌렸다. 건너편 사람들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미 몸의 절반을 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아쉬워하며 인사를 하고는 각자 왔던 길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를 뒤따르던 외국인 노부부도 덩달아 그 높은 계단을 다시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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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로 들어선 탓에 우리는 높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야 했고 결국은 왔던 길을 다시 걸어야 했다. 문득 우리의 이 여행길도 잘못된 길이라면, 힘겹게 돌아가야 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길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길이 없는 곳의 끝까지 가서 보았고 결코 그 길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며 지금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풀 수 없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노력과 시간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길에 들어서 보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다행히도 마지막 셔틀버스 시간에 맞춰서 원래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버스를 타지 못하면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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