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자그레브에서 플리트비체로 가는 버스는 예약을 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표를 사는 것이 순조롭지 않은 탓이었다. 다행히 호스텔의 쾌활한 그 직원이 크로아티아어로 된 버스터미널 홈페이지에서 버스 시간을 알아봐 주고 트램 타는 곳과 정류장 이름을 모두 적어준 덕에 일단 숙소를 나섰다. 버스 시간은 알고 있고 표 사는 것이 뭐 어렵겠나 싶어 이삼십 분의 여유만 두고 움직였는데 버스터미널에 들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플리트비체행 표를 파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스플릿행 버스표를 파는 창구의 남자에게 물으니 플랫폼으로 내려가래서 내려갔는데 그냥 버스들만 있었다. 올라와 다시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사이 창구 앞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 바람에 마음 졸이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앞 쪽에 어떤 아주머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직원이 사무실 안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줄에 서 있는 우리 곁으로 플리트비체에 가는 것이 분명한 한국 여자 세 명이 바람처럼 뛰어 사라졌다. 뒤따라 뛰기엔 표의 존재가 불확실했다. 열 시 반을 3분여 남겨놓고서야 우리 차례가 되었고 창구 직원은 '플리트비체'라고 외마디를 뱉어낸 내게 '열 시 반? 플랫폼 10번이나 4번!', '티켓은? ticket?!', '버스에서 사! on the bus! 얼른 가! go!'라고 간단히 외쳐주었다. 무거운 가방을 멘 우리는 뒤뚱거리며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10번이나 4번이랬는데 4번이 좀 더 가까워 거기 서 있는 아무나에게 '플리트비체!'를 외쳤다. 마침 그 '아무나'는 플리트비체행 버스 기사였다. 그는 자리가 없는 것 같다고 했으나 버스에 올라 한 번 더 훑어보더니 타라고 했다. 티켓을 요구하는 기사에게 다급해서 완전히 꼬인 말로 '여자, 여기, 버스, 티켓'을 어버버 거리니 186 쿠나 씩 내란다. 현금으로 값을 치른 우리를 마지막 승객으로 버스는 문을 닫았다. 몹시 숨이 찼다.
나른한 표정의 창구 남자를 믿었어야 했다. 플랫폼에 내려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봤더라면 여유 있게 버스를 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여행이고 인생이고 간에 '했더라면', '했을 텐데'만큼 부질없는 말은 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극적으로 버스에 오른 행운에 감사하며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 반쯤 걸려 내린 곳은 '무키냐 Mukinja'라는 마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한 정거장 앞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입구에 모두 내렸으나 우리는 조금 떨어진 마을에 숙소를 잡은 터라 작은 오두막으로 된 버스정류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늘은 무척 파란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몸이 흔들렸고 길어진 나의 앞머리는 헝클어져 앞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마을은 사람이 살긴 하는지 싶게 조용했고 숙소 표시가 된 몇몇 집들 외엔 특별한 건물이 없었다. 바람의 힘을 밀어내며 앞으로 십여 분쯤 걸어가다 보니 허술한 숙소 위치 안내 지도와 비슷한 길, 비슷한 건물이 보였다. 멀리서 한 여자가 손을 흔들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목청을 높여 화답하고는 건물 입구로 돌아 들어갔다.
'산냐의 아파트 apartment sanja'는 무척 깔끔하고 넓었다. 연립주택 같은 형태인데 집주인이 아래층에 살고 위층의 집 하나를 대여하는 모양이었다. 하나 남은 3인실을 저렴한 가격에 예약한 덕에 방도 매우 넓었고 부엌이며 화장실, 샤워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매일 밤 부지런히 검색을 해준 덕분에 지친 몸을 쉬기에 매우 편안한 숙소들을 만나고 있었다.
마을의 뒤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가면 공원 제2입구에 이른다고 해서 일단 길을 나섰는데 이 산책로가 무척 묘했다. 하늘로 높게 뻗은 회색빛 나무들이 초록빛 이끼들에 발목을 휘감긴 채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처음 듣는 새소리도 가득했다. 아직 잎사귀가 돋지 않은 커다란 나무들과 그 사이사이를 휘몰아치는 바람소리 때문에 뭔가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숲의 기운에 눌려 숨죽인 채 산책로를 따라 내려갔는데 나의 긴장을 풀어준 것은 큰 나무 곁에 애교스럽게 피어난 들꽃들이었다. 처음 보는 모양새가 너무 앙증맞고 빛깔이 고와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채로 한참을 구경했다. 발 길을 떼지 못하는 나를 남편이 겨우 재촉하여 일어나면 어느새 남편이 주저앉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금세 다다를 공원에 한 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도착한 우리는 비수기엔 열지 않는다는 제2입구가 열려있어 의아했다. 네 시면 닫는다던 공원 입구가 뻥 뚫려있어 한 번 더 의아했고 표 없이 그냥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고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뚫린 길을 못 갈게 뭐냐 싶어 계단을 내려가니 잔잔한 호수와 그 건너에 앙증맞게 쏟아지는 폭포가 나타났다. 플리트비체에 들어와버렸다. 비수기에는 운행하지 않는다던 보트가 사람들을 가득 싣고 네 시가 넘은 시간에 운행을 하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배를 타기 전까지는 좀 자유로운 것 같아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체크인을 하러 온 숙소의 바깥양반에게 물으니 비수기라 해도 보트나 셔틀버스는 날씨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행되고 있다고 했다. 하루 종일 걸어서 공원을 둘러볼 각오를 단단히 한 우리에겐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숙소와 예기치 않은 행운에 감사하며 저렴하게 사온 크로아티아 맥주로 플리트비체 무사 입성을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