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존재한다.

떼제 2일

by 신지명

아름다운 장미는 날카로운 가시를 지녀 더욱 매력적이라 했던가.
프랑스의 이 동화 같은, 천국과 같은 들판은 밤이 되자 밤의 여왕처럼 돌변해서는 혹독한 한기를 날카롭게 내뿜어 우리를 찔러댔다.
어젯밤 길게 줄을 서서 받아낸 담요 두 장과 침낭만으로는 차갑게 식은 들판의 한기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무릎에 코를 박을 만큼 있는 대로 웅크려 몸을 비벼대야 했고 밤새 추위에 떨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선잠을 잤다. 한 번 깬 잠은 다시 들기 어려웠고 텐트가 밝아지는 빛이 들기까지 밤은 너무도 길었다. 겨울의 시베리아를 건너오면서도 느끼지 못한 고통이었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상태, 무기력으로 그저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이 절망적이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어금니를 물고 있다 보니 몇 년 전 겨울, 서울시장이 노숙인들에게 침낭을 나누어주고 특별대책을 마련해 준 것이 얼마나 선한 행동이었는지,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희망적인 행동이었을지, 내가 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어려움을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틀린 생각이다. 완전한 절망에 빠져있을 때는 한 가닥의 희망마저도 간절하니 말이다. 그 미약한 것만으로도 생을 유지하니 말이다.
해는 반드시! 어김없이 다시 떠오른다는 진리에 이렇게 감사한 적이 있었던가! 하늘이 밝아오고 텐트로 빛이 차오르면서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침식사는 앞니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한 바게트 빵 한 덩어리와 우유분말, 코코아, 커피 가루가 전부였지만 그 미지근한 음료 한 사발도 간밤의 추위에 시달린 우리에겐 감사한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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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생활은 매일이 동일했다. 하루 세 번의 기도와 세 번의 식사, 그 사이에는 성경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눔을 하는 모임이 두 차례 있었다. 모든 일정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들판에서 잠을 자거나 묵상을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우리도 자유롭게 온 동네를 산책했다. 강의와 모임은... 영어로 통역을 해주지만 그나마도 독일 억양이 섞인 말을 툭툭 끊어서 전달해주는 것이라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아 한 번 참여하곤 가지 않았다. 나눔도 뭐... 우리가 늘 고민하고 나누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굳이 참여할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독일인이어서 우리만 없으면 그들의 언어로 편하게 나눔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루 세 번의 기도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그 시간에 머무르는 것은 좋았다. 처음에는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하는 떼제 모임처럼 화려하거나 내가 종종 했었던 떼제 기도처럼 다양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 낯설었는데 반복될수록 그 시간이 편안해졌고 평온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오르간과 기타 반주로만 이끄는 노래는 몇 천여 명의 읊조리듯 흥얼거리는 소리로 끊임없이 성당을 채웠고 사람들은 말 그대로 노래 안에 머물러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은 사람들의 기침소리, 코 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집중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마저도 점차 익숙해져 묵상을 하기 편안한 시간이 되었다.
기도 시간은 더 없이 평화로웠고 아름다운 풍경은 그 어느 곳보다도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데 저녁기도가 끝나고 나올 무렵 문득 내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웃고 떠들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 전 케냐 대학에 '모여있던 학생들',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학살당한 그들이 떠올랐다. 그 순간 모든 기쁨과 행복이 마치 그들의 것을 빼앗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불편해졌다. 그들뿐 아니라 세상에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누리며 우리만 평화롭고 의로운 사람인마냥 기도하는 것이 영 못마땅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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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나와 1년 간 함께 지냈던 자폐증이 있는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었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자해행동도 심해지고 밤에 심하게 울기도 한다며 고민스러워 보내신 메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행을 당장 접고 돌아가 아이를 다시 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드릴 상황도 아니었다. 환경이 바뀌면서 일시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아 그럴 수 있으니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는 좀 더 지켜보고 늘 하던 대로 안정되게 대처해주십사 위로해드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답장을 보낸 뒤로도 오랫동안 내가 그들을 버려두고 나만 살자고, 나만 즐겁자고 뛰쳐나와버린 것은 아닌지 자책했다.
나도 안다. 내가 모두 짊어지려는 것은 나의 오만이다.
겨울이 시작되던 작년 어느 날, 하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 남편이 챙겨준 저녁밥에 코를 박고 운 적이 있었다. 갑자기 나의 아이들 여섯과 그 부모님들의 삶을 짊어진 어깨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었다. 위로를 해주려고 내 어깨에 얹은 남편의 손 조차도 무거워 치워달라고 해야 했다. 그 가벼운 무게에도 내 몸이 땅으로 박혀버리는 것 같았다.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덩어리를 밀어내려는 심정으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었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1년의 한정된 시간 후에도 그들의 고단한 삶은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 안타까웠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늘 제자리걸음인 것이 막막했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 내 몸을 망가뜨리고 결국은 그들과 함께 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동안 내 삶에서 저만큼 밀어놓았던 그들의 삶이 지금에 와서 떠올라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닌 수많은 슬픔들이 떠올라서, 여기 모인 사람들끼리만 즐겁고 편안한 상태인 것이 영 못마땅해서 마음이 가슬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엔 나와 교감하고 있는 어떤 존재만으로도 충만하고 영광스러웠다. 하지만 슬픔에 가득 찬 절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은 나만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신앙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직은 내 삶에 대한 욕망과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감의 괴리로 마음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무엇이라도 해야만 이 부채감을 지울 수 있을 것임을 안다.
저녁기도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버려진 상자들을 잔뜩 주워와 바닥에 깔고, 있는 옷을 모두 껴입은 채 또다시 돌변한 밤의 기운에 몸을 누였다. 내 마음도 몸도 모두 불편한 밤이었다.
아침해가 반드시 떠오른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만이 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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