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 안토스로 가는 길

by 신지명

길에 들어선 지 꼭 열흘이 되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220km쯤 되었다. 생장피에트포르에서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길의 전체가 800km 정도 되는데 이 길을 한 평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우린 이제 스물두 살이 된 셈이었다.
같은 날 태어나 이 길 위에 오른 사람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걸음을 시작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나갔다. 내 몸의 움직임을 느껴보고 편안한 자세와 효율적인 움직임을 시험해보았다. 어떤 문명의 이기에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내 육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을 것이다. 걷기가 익숙해지면서부터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존재에 대한 궁금증만 있으면 되는 관계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만 물으면 나머지 삶의 배경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평행 놀이를 하듯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유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함께 걸은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편안한 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더욱 즐겁게 만들어줄 사건을 도모하고 계획을 세우고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은 이곳의 작은 세상에 대해 충분히 익숙해졌고 다른 사람들을 따를 필요가 없을 만큼 모두가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사정과 취향에 따라 걸음을 천천히 하거나 정해진 길에서 잠시 벗어나 보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우리처럼 정도를 따라 정방향으로, 정속으로만 움직이기도 했다. 이 길 위에 '내 삶의 가치'를 반영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디와 제임스는 순간순간에 더 머물기를 원해 걸음의 속도를 늦췄고 헤라르도네 무리는 더 즐겁고 특별한 경험을 위해 잠시 일탈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어제 저녁이었다면 가 보았을 성당을 마음에서 접고 오늘 가기로 한 길을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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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조용히 걸은 길은 작은 마을들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의 마을들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것처럼 대문이 판자로 막혀있거나 판매 중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심지어 골목으로 나 있는 앞쪽 벽면만 살아있고 그 뒤는 헐어놓은 경우도 허다했다. 어떤 때는 순례객을 위해 조성해놓은 세트장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느 나라나 시골 마을의 삶은 영 팍팍한 모양이었다.
평탄한 길 덕분에 두 시가 좀 넘어 토스안토스 Tosantos 숙소에 도착했다. 매일 네다섯 시는 되어서야 들어가던 숙소에 일찍 도착하니 무척 한가로웠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도 해가 중천이라 마당에 앉아 햇볕을 쬘 시간이 충분했다. 사람들과 함께인 것도 즐겁긴 하지만 이렇게 여유 있게 완전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피로를 푸는데 훨씬 효과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작은 슈퍼마켓 하나 없는 마을에서는 다른 무엇을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약간 허기진 배를 채우러 작은 바에 들러 맥주 한 잔, 타파즈 한 접시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뒷동산 중턱에 바위 속으로 파 들어간 작은 성당이 무척 특별해 보여 잠긴 문 밖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 성당을 지나 언덕 위까지 올라서서 들판 한 번 내려다보며 둘만의 한가로운 오후를 마음껏 즐겼다.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 할머니께서 바위 속 성당을 안내해주신다며 언덕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우리를 다시 올라가도록 등을 떠밀었어도 괜찮을 만큼 피로는 충분히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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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도 그라뇽처럼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이고 저녁식사와 아침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다소 엄숙했던 그라뇽에 비해 친절하고 감성 풍부한 젤소미나 할머니가 만들어내는 이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할머니는 내가 쓰고 난 화장실의 물기를 닦으려고 꺼내 든 대걸레마저 낚아채시고는 '당신은 순례자예요'라고 고개를 저으며 일을 못하게 하셨다. 저녁 준비는 할머니 혼자 하셨다. 이름을 미처 묻지 못한 할아버지 역시 감성이 남다르셨는데 예상치 못하게 떼제 노래를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었다.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두 분의 넘치는 정성 덕분에 우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8시가 넘도록 식사를 기다려야 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도 할아버지의 긴 기도와 떼제 노래를 다 들을 때까지- 남편과 내가 함께 불러드려 몇 곡을 더 하신 것 같다.- 기다려야 했지만 불만스러운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긴 기다림 끝에 맛본 음식들은 모두 최고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질색을 했을, 올리브유에 버무린 익힌 당근과 가지 샐러드 그리고 두툼한 스페인식 오믈렛 tortilla de patatas이 전부였는데 그 식탁 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두들 행복한 맛에 흠뻑 빠진 표정이었다. 떼제 마을에서 익힌 완두콩과 당근에 완전히 적응한 덕분에 나도 야채샐러드를 몇 번이고 덜어먹었다. 음식 접시들이 수시로 눈앞을 가로질러 교환되었고 맛에 감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 옆에서 유난히 맛있게 먹던 스위스 청년 조지의 '냠냠'소리를 듣던 젤시 할머니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셨다. 할머니의 붉어진 눈시울은 당신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 음식들을 준비하셨는지를 말해주기에 충분했고 그 음식들이 왜 그리 맛있었는지도 분명히 설명이 되었다. 우리는 디저트로 내주신 티라미슈까지 그릇의 바닥을 박박 긁어 동을 내었다. 힘들고 지친 하루를 보냈을 순례객들을 돌봐주는 일을 너무나 소중하게 행하고 계신 두 분의 순수한 마음은 정말이지 큰 감동이었고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특별한 무엇으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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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한국 노래를 하나 부를 수 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아리랑을 더듬더듬 불러주셨다. 스페인의 작고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리랑은 너무나 뜻밖이었고 그 노래를 기억해준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할아버지에게 크게 호응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나는 여행 중 두 번째로 대금을 꺼냈다. 아리랑을 꼭 들려드리고 싶었다. 음만 겨우 틀리지 않고 소리 내는 정도의 미천한 실력이 못내 아쉬웠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하신 것으로 만족하였다.
식사 후 이어진 특별한 기도모임에도 꼭 참석하고 싶었지만 헤라르도가 근처 공원에 부모님의 캠핑카를 세워두고 파티를 할 테니 언제든 오라고 초대를 해주어서 안타깝게도 기도모임은 함께 할 수 없었다.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에는 헤라르도와 부모님, 주현 씨, 노리, 페데리카, 앨런, 안젤리카와 이르카가 이미 와인에 살짝 흥이 돋은 채로 저녁식사를 거의 마쳐가고 있었다. 우리도 이미 배는 가득 찼지만 우리를 주려고 남겨둔 어머님의 빠에야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빠에야는 맛 때문에라도 남길 수가 없어 순식간에 모두 먹어버렸다.


IMG_6729.JPG 주현 씨가 찍어서 보내 준 '친구들' 사진.


캠핑카 안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모두가 몸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는 정말 신나게 놀았다. 우리는 별일 아닌 것에도 박장대소했는데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흥 많은 어머님 테레사가 음주가무를 이끄신 덕분에 우리는 끊임없이 손뼉 치며 노래했다. 어머님은 각 나라의 대표적인 노래를 불러보라며 사람들을 부추기셨는데 '남행열차'만큼 흥 나는 노래는 또 없었다. 주현 씨와 우리 부부의 열창에 캠핑카는 미친 듯이 들썩거렸고 흥은 오를 대로 올랐다. 하지만 다른 누구의 노래도 그 흥을 이어주지 못해 '한국이 1등이다!'하고는 어머님이 바통을 이어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스페인 북부의 작고 작은 마을. 우리는 한국,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체코 그리고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친구'였다. 이 길이 만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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