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온으로 가는 길

by 신지명

사람들이 방의 불이 켜지기도 전에 우르르 나가고 없었다. 우리는 빵과 과일로 아침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나섰다.
오늘 걸은 길은 20km로 거리는 매우 짧았지만 방향을 단 한 번 틀었을 뿐, 줄곧 직진이었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곧게 뻗은 길 위로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것이 매우 잘 보였다. 길이 고불고불하거나 언덕이 좀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 위에 있는 것인지 언뜻 눈에 띄지 않는데 오늘은 모든 사람이 한눈에 들어와 마치 아침 출근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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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보면 사람마다 걷는 속도도 다르고 쉬는 시점도 달라 수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걸음 속도에 영향을 받게 된다. 뒤에서 누군가 바싹 붙어오면 걸음이 빨라지게 마련이고 인사를 건넨 사람이 앞으로 쑥 가고 사라지면 내가 너무 늦게 걷나 싶어서 마음이 급해지기도 한다. 며칠 전부터는 익숙한 사람들이 모두 앞서 나가고 없어서 그나마 덜하지만 초반에만 해도 내 페이스를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발걸음을 지나치게 서두르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왜 그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일쑤였다. 어차피 한 곳을 향해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고 각자의 몸 상태나 일정에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마침'이 정해져 있는 길이고 언제고 가야 하는 길이다. 심지어 너무 걷고 싶어서 온 길인데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 나이가 된 시점에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죄책감도 덩달아 좀 줄어들었다. 물론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마침'이 정해져 있는 것이 인생이고 그 시점까지는 결국 살아갈 테고 어차피 살 시간들을 굳이 서두르고 바쁘게 앞만 보고 갈 필요야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남들 사는 속도를 쫓는다고 서두르거나 뒤에서 쫓아온다고 마음 졸일 일이 아니었다. 나의 속도에 맞춰서 내가 가능한 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 않을까 싶었다.
일전에 페데리카가 '믿거나 말거나'같은 책에서 본 이야기처럼 몹시 궁금해하며 한국 사람들은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한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나에게 물었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고 대답하니 나한테 '너도 정말 그렇게 일했어?'라고 물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때로는 밤 11시, 12시까지 일할 때도 있었다고 하니 미친 일이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었다. 왜 변화를 위해 싸우지 않냐고도 물었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이 남들 사는 것보다 더 빠르게,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겪고도 지금처럼 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그 혜택을 누린 세대이므로 그 시간들을 가타부타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인생이 이 길을 걷는 것과 같아서 바쁘게 걸으며 놓치게 된 것들, 깨닫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걸음을 늦추고 발견해서 인생의 빈 공간들을 채워놓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일이 우리 세대의 몫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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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직진을 하고 나니 케리온 드 로스 콘데스 Carrion de los condes가 나왔다. 그런데 우리는 장이 서서 왁자지껄한 광장의 사람들과 맛깔스럽게 꼬치에 꿰어져 돌아가고 있는 전기구이 통닭에 잠시 정신이 팔려서 알베르게로 가는 길을 놓치고 말았다. 사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챈 뒤에도 두 눈은 북적거리는 광장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입으로만 '어디로 가야 하나... 어느 쪽이지?'하는 의지 없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다행히 진작에 마을에 도착한 후 장을 보러 나온 다른 순례객을 붙잡고 그 뒤를 쫓아간 덕분에 더 헤매지 않고 알베르게를 찾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베르게가 아직 열리지도 않을 만큼 일찍 도착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문 앞에 가방을 줄지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도 긴 줄의 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남편과 나는 길가에 앉아 편하게 기다리려고 신발부터 갈아 신으려는데 창피하게도 내 양말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있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옆에 앉아있던 프랑스 아가씨 알비나에게 오늘 하루가 너무 고되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 역시 기다란 나무 막대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온 모습을 재현하며 나의 하소연을 거들었다. 그녀와 나는 우리가 얼마나 고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꼴이 얼마나 처참한지에 대해 한참을 자조적인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사실 우리 둘 모두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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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온의 알베르게는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다른 알베르게는 그렇다고 해도 수녀님이 아닌 평신도들이 일을 하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눈코입은 물론이고 온몸이 동글동글한 귀여운 수녀님이 춤을 추듯 손짓, 몸짓을 해가며 숙소 이용에 대한 설명을 여러 사람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주고 계셨다. 그분의 해맑은 표정만 봐도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따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옷을 빨아 널어놓는 반복적인 일을 서둘러 마친 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과, 장을 보러 다시 광장으로 나갔다. 다른 마트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물건이 다양한 할인마트 DIA가 있는 마을이 많지는 않은데 마침 이곳에 DIA가 있어서 우리는 수제비 재료를 좀 샀다. 거기에 더해 내일 아침과 점심을 위한 식재료까지 함께 사들고 마트를 나왔는데 나오는 길에 슬쩍 훑어본 영수증에 3유로가 넘는 품목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사는 것들은 대부분이 1유로 안팎인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두 사람은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영수증과 품목들을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로 된 물건의 이름을 잘 몰라 포장지에 적힌 글자와 영수증의 글자들을 그림 맞추듯이 맞춰봐야 했는데 죽 훑어보니 와인의 가격이 다른 것이 확인되었다. 진열장에 붙은 가격표의 위치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길바닥에 펼쳐놓은 음식들을 다시 오므리고는 와인을 교환하러 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다. 그런데 문득, 우리가 고작 4천 원도 되지 않는 와인을 1,200원에 사지 못했다고 발을 동동거리며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확인 작업을 하고 그것을 바꾸네 마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가고 싶은 곳은 많고, 갈 수 있는 시간도 넉넉한데 제약이 있는 오직 한 가지, 여행경비가 넉넉하지 않았던 탓에 하루하루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예산으로 살다 보니 '비싸다'의 기준이 턱없이 낮아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가에 대한 감을 완전히 잃게 만든 그간의 우리의 생활을 한탄하며 오늘은 값비싼 와인 한 잔 마시자고 호기를 부렸다.

동그랗고 귀여운 수녀님이 두 손을 깍지 끼고 꼭 참석해달라고 요청하던 5시 모임은 예상외로 매우 좋았다. 네 분의 수녀님과 함께 흥이 나는 노래로 모임을 시작했는데 동그란 수녀님의 기타 연주와 노래 솜씨는 놀랍도록 수준급이었다. 계단까지 둘러앉은 사람들은 수녀님들의 요청으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까미노를 시작한 계기를 이야기했다. 국적도 다양하고 까미노 위에 있는 이유들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종종 마주쳐 인사만 나누던 사람들의 속 이야기를 듣는 것은 타인을 '우리'로 만들어주는 놀라운 효과를 내었다. '우리'는 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손에 들린 종이 위에 적힌 글씨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고, 제대로 된 발음으로 노래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둘러앉은 사람들 모두가 같은 이름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순례자'. 그 이름으로 우리는 한 날의 시간, 하나의 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시간이 끝나고 원장 수녀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떼제 마을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내 마음을 따뜻하게 밝힌 빛이, 이곳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의 빛이 세상으로 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 모든 행복이 우리만의 것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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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부엌이 있는 알베르게를 만나서인지 사람들이 모두 음식을 만드느라 부엌은 전쟁통이었던 모양이었다. 뒷정리 담당인 나는 밖에 있어서 상황을 몰랐지만 제임스가 부엌 안의 상황을 온몸으로 재현해줘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머나먼 타지에서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칼칼한 수제비를 뚝딱 만들어낸 남편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워낙에 손이 커서 어찌나 많은 양을 끓였는지 오늘의 길이 너무 고생스러우셨었다는 한국인 부부에게 뜨끈한 수제비를 넉넉히 나눠드리고도 냄비에 한가득 남았다. 우리는 수제비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중에는 그 국물에 제임스의 야채수프를 함께 섞어 먹었는데 그 어떤 식당에서 파는 음식보다도 맛이 훌륭했다.

오늘의 저녁식사 자리에는 새로운 친구가 함께 했다. 오전에 만난 존 할아버지였다. 제임스와 같은 호주 사람이었다.
존은 매우 열정적인 이야기꾼이어서 우리의 자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는 눈을 반짝이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신은 아침마다 일어나 '내가 왜 여기 있지?'라고 물으며 길을 떠나는데 저녁이 되면 언제나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말에 동감했다. 이 길이든 인생이든 가보면, 직접 살아보면 반드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가 늘 나를 따라다니는 안개 같은 불안에 큰 위로가 되었다.
또 존은 주변의 수많은 어른들을 보며 시간이 저절로 어른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나 스스로 어른이 되려는 마음을 먹어야 어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나에게 대뜸 'Why?'하고 되물었다. 내 표현이 부족해 전달이 잘 되지 않은 줄 알고 말을 좀 더 보충해 다시 말했더니 존은 '그러니까, 왜 어른이 되려고 하느냐고?'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에게 물었다. 이미 78세나 된 존 할아버지의 질문이었다. 당신은 여전히 어른이 아니고 앞으로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존의 그런 '피터팬' 같은 마음은 어쩌면 가족들을 조금은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존의 눈빛만큼은 내가 이번 여행의 한 가지 목적으로 삼았던, '영혼의 순수성'이 가득 찬, 바로 그런 눈빛이었다. 40년이 더 지나 노인이 된 나도 과연 존과 같은 눈빛과 표정으로 살아있을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몹시 희망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저녁식사는 무려 3,600원이나 하는 고급 와인으로 그 향을 더했다.


IMG_7054.JPG 존 할아버지는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7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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