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날씨가 영 심상치가 않았다. 바람도 제법 부는데다가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문 밖을 나서기도 전부터 한기가 들어 나가기 싫은 마음에 괜히 가방만 만지작거리고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결국은 나서야 하는 길이었다.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부슬비였는데 본격적으로 길에 들어서고부터는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날씨가 이렇게 험악하니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렵고 몸을 똑바로 가누기도 쉽지 않았다. 우비를 입긴 했지만 바람을 거슬러 걷느라 몸에서 열이 나 우비 안쪽으로는 결로가 생겨 젖기는 마찬가지였다. 덩치가 큰 남편은 열이 많이 나서 안팎이 거의 비슷하게 젖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축축한 느낌에 불안하여 가슴에 품고 가던 카메라를 꺼냈는데 어디선가 물이 조르륵 흘러나왔다.
그나마 우비 안쪽이 많이 젖지 않은 내 품으로 카메라를 옮긴 후 남편은 그것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처럼 감정 표현을 호들갑스럽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담담한 표정을 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관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그것이 격한 감정을 느꼈다는 뜻이다.
남편의 마음속까지 비바람이 들이치고 만 것이 분명했다.
다음 마을이 나오기까지는 17km를 곧장 걸어야 했다. 세 시간쯤 쉬지 않고 비바람에 맞서 걷고 나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으로 앉아서 쉴 만한 곳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벽 하나에 기대어 의자가 조금 있고 머리 위부터 저 앞에까지 이어지는 나무 기둥이 시야를 가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가려주지 못한 채 쓸모없이 놓여있었다. 그래도 가방을 잠깐 내려놓고 '사망'을 차마 확인하기 두려운 카메라를 가방 깊숙이 넣어 수습할 수는 있었다. 그것을 남편 마음속 깊숙이 넣을 수 있기까지는 더 먼 길을 걸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칼자딜라 Calzadilla라는 마을이 나오자마자 우리는 곧장 바를 찾아 들어갔다.
열이 나는 족족 바람에 날려 몸이 완전히 식었다. 식은 몸을 덥히기엔 걷기도 해야 하고, 가방도 짊어지고 있어야 하고 너무 바쁜 나머지 내 몸 스스로 순환이 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손이 땡땡 붓고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가방을 잡고 있던 손은 레고 블록의 손처럼 동그랗게 말려 고정되어버린 상태였다. 그 손을 좀 녹여보려고 바에 들어간 것인데 주문한 커피와 코코아가 모두 미지근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라도 손을 좀 녹여보려고 했으나 찬물만 나왔다... 그나마 아침에 보온병에 챙겨 온 뜨거운 물이 조금 남아있어서 컵에 따르고는 둘이 번갈아가며 손을 녹였다.
일단 뭐라도 먹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점심 도시락을 꺼내 샌드위치를 몇 개 먹고 좀 기다리니 조금씩 몸이 회복되었다. 그래도 비바람은 피했고 사람들이 가득 찬 바에 온기가 좀 있어서 한참을 앉아있다 보니 다시 걸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다행히 빗줄기도 거의 잦아들었다.
바를 나서는 길에 미콜을 만났다. 어제 우리보다 한 마을 앞서갔는데 우리가 오늘 정신없이 빨리 걷긴 한 모양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미콜과 한참 얘기하며 걷다 보니 걸음이 또 빨라져서 처음 계획한 목적지 레디고스 Ledigos에 어느새 도착해버렸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3km 떨어진 다음 마을로 더 가기로 했다. 다시 길로 들어서려는 그때, 저 멀리에서 제임스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나타났다. 오늘 레디고스에서 묵는다고 해서 진작 어느 숙소에 들어가 쉬고 있겠거니 했더니만 갑자기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헤라르도 무리도 떠나고 에디도 떠나고 우리 넷이 이렇게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마저도 미콜은 제임스와 뭐라고 얘기를 잠깐 하더니 먼저 떠나버렸다.
우리는 제임스와도 잘 어울렸고 미콜과도 잘 어울렸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불편한 기운이 맴도는 편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이야기를 하는 쪽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게다가 뭐든지 꼼꼼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미콜과 흘러가는 대로 내어 맡기는 제임스가 발을 맞춰 걷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은 아마 적당한 인사를 하고 헤어진 것 같았다.
다음 마을 템플라리오스 Templarios에 힘겹게 도착했는데 알베르게가 다 차고 겨우 두 자리만 남아있었다. 제임스는 우리에게 남으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제임스를 남기고 3km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가려고 했으나 제임스도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다며 우리를 따라나섰다.
비는 거의 그쳤지만 여전히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길을 제임스와 우리는 두 손을 치켜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람에 맞서 걸었다. 제임스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살아있다! I'm alive!"
우리의 양옆으로 보리와 밀이 바람에 누었다 일어나며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결국 계획보다 6km나 더 가서 모라티노스 Moratinos에 들어섰다. 산 부르노 San Bruno라는 사립 알베르게는 매우 한산하고 조용한데다 난로가 따뜻하게 켜져 있었다. 멀리까지 오긴 했지만 제임스와의 마지막을 보내기에 모든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었다. 제임스는 뒤늦게 합류하는 독일 친구를 만나러 가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 저녁식사가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알베르게 마당에 앉아 우리는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해 침낭을 다리에 두르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피레네 산의 끝자락에서 남편과 제임스가 나와 에디를 뒤쫓느라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팜플로나에서 먹었던 모스꼬비타와 슐레따가 얼마나 훌륭했었는지, 우리가 길을 잃고 산 위를 헤매다 에디와 제임스를 만났을 때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리고 브루고스에서의 파티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우리는 어느새 함께 나눌 것이 참 많은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마당에 장식된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우리의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날이 저물고 난 후, 이탈리아인 부부와 프랑스에서 온 두 여성분과 함께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작별의 시간을 애써 미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