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비고로 가는 길

by 신지명

오랜만에 개인 파란 하늘을 보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했다. 두 번째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남편도 나도 몸 상태가 매우 좋았고 가방도 몹시 가볍게 느껴지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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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기쁘게도 레온 성당 앞에서 알치나와 크리스티안을 만났다. 남편과 싸운 날 내가 무시하고 지나친 바로 그 '새 아가씨들' 말이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몇 번을 마주칠 때마다 너무 친절히 웃으며 인사를 해주는 것이 고마워 며칠 전 캐리온에서 다시 만났을 때 용기를 내고 사과를 했었다. 그날 나를 불렀을 때 내가 몹시 화가 나 있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노라고 말하니 예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었다. 그 뒤로 사하군 Sahagun의 어느 마트에서 만났을 때 크리스티안이 다리가 아파 버스를 탄다고 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그들은 휴가가 끝나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번에 레온부터 다시 걸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우리를 다시 만나 너무 기쁘다며 꼭 안아주었다.
어제는 프랑스 아가씨 알비나를 만나고 까미노의 막내 스카이를 만나더니만... 오늘 아침까지 기분 좋은 만남이 이어진 것을 보니 레온 성당에 무언가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온을 벗어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예쁜 풍경을 사진에 담느라 발 길이 느려져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기가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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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이 어디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겠는가. 어느 인생이 그리 쉽게 간다는 말인가.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선 마을 입구에 세워진 간판을 살펴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안 그래도 내 지도에 나온 마을이 영 나오지 않고 이상한 곳으로 길이 이어져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갈림길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 간판에는 레온 바로 다음 마을부터 길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는 지도며 알베르게 목록에 나와있지 않은 우회길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아마 고속도로를 걷는 짧은 길이 아닌 마을들을 거치는 시골길로 들어선 것 같았다. 그 길로도 화살표며 표지석은 있었으니 전혀 의심하지 않고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3일쯤 뒤에 피레네 산맥보다도 2-30여 미터 더 높은 최고지를 올라야 하는 부담감이 있어서 오늘 35.2Km 정도 떨어진 오르비고 Orbigo까지 가고 그다음을 조금씩 나눠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점심을 먹으며 만난 사람들에게 현재 위치와 남은 거리 등을 물어보니 오르비고까지 30km 정도가 남아있다고 했다. 레온에서 5km밖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 얼마나 돌아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 오르비고까지 가는 길도 우회길에서 연결이 되는 것이니 더 길게 계산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전까지만 간다고 했다. 우리도 그러기로 했다. 이미 잘못 들어선 길이니 갈 수 있는 만큼만 가고 내일 조금 더 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얼만큼을 가야 하는지 무엇으로도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부담감이 가방에 얹혔는지 갑자기 발 길이 더뎌지고 가방도 한없이 무거워만 졌다. 게다가 길도 찻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스팔트 길은 평평해서 걷기에는 좋으나 딱딱한 성질 때문에 오래 걷기에는 매우 힘이 들었다.
둘 다 머릿속이 복잡해서였는지 땅만 보고 몇 시간을 걸었다. 땅을 보고 걷다 보니 달팽이가 너무 많이 보여 그것들을 피해 걷느라 몸이 더 고되어졌다. 그렇다고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그곳에 있는 것을 안 이상 눈 질끈 감고 죽든지 말든지 그 위를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큰 놈이야 집어서 풀숲으로 넣어주지만 크기도 다양해서 일일이 살려주자니 끝도 없었다.
그렇게 지쳐갈 때쯤 저 멀리 먹구름이 모여 마을에 비를 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를 앞서가던 사람들이 가방을 내리고 레인커버를 씌우고 우비를 입는 등 단단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니 비가 심상치 않게 오는 모양이었다. 그 빗속에 막 들기 시작한 마을까지만 가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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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잠깐 고민을 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거센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남편은 밭으로 난 길을 가로지르면 비를 맞는 시간을 좀 줄이고 마을로 들어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화살표가 없는 길을 가는 위험성은 익히 경험한 바가 있어서 섣불리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서서 고민을 해보았지만 이미 둘 다 지친 상태인 데다가 벌써부터 바람에 비가 날려오며 몸이 식기 시작해서 일단은 비구름이 없는 밭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이 일하는 밭이니 어디로든 길이야 나있겠지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혹시나 길을 잃어도 함께 결정한 일이니 타박받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사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잘못된 결정에 내가 화를 참지 못하게 될 것이 걱정돼서 나에게 다짐을 한 것이기도 했다.
밭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는데 처음에 보이던 마을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길이 꺾였으면 좋겠는 곳에서 꺾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직선으로 가고 있었는데 가다 보면 풍경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안 그래도 방향감각이 별로 없는 나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밭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니 찻길과 다시 만났다. 그 찻길을 따라 올라가면 처음 보였던 그 마을의 옆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처럼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버렸다. 우리를 둘러싸고 비슷한 석탑을 가진 몇 개의 마을이 여기저기 나타나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이미 여섯 시를 넘기고 있었는데 아직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도 못하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몇 개의 마을 표지판이 놓여있는 갈림길에 서서 그 앞 마을로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바 Bar라도 있으면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 구글 지도라도 살펴봐야 했다. 그런데 마을로 들어가려고 건널목에 서 있던 와중에 남편 손에 들려있던 카메라에서 렌즈가 분리되어 바닥에 퍽 하고 떨어지더니 나뒹굴어버렸다. 작은 분리 버튼이 무심결에 눌려버린 모양이었다. 렌즈 앞 유리가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머리 위로는 우리가 처음 보았던 비구름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가 깨짐과 동시에 우리 둘도 넋이 나가서는 갈림길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힘도 결정할 힘도 없었다.
그때,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려 우리를 부르더니 어느 한 방향을 힘차게 가리키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어 우리는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의 갈림길을 벗어날 단서를 얻었으니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보기로 했다.
급기야 비는 우리의 머리 위에서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길로 가다 보니 레온에서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만나게 되었다. 길을 잃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그 길에 드디어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질러오겠다며 헤맨 밭 위로 낮게 무지개가 떠 있었다. 빗속에서 보는 무지개라... 살면서 그렇게 야속한 무지개는 처음 보았다. 그러면서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찬 마음이 떠오르는 것은 무지개의 이미지에 대한 몹쓸 교육의 결과일 뿐이라고 애써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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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다시 노란색 화살표를 만났을 땐 비구름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난 다음이었다. 반가워할 힘도 없었다.
다시 화살표의 보호 아래 몸을 맡겨 조금 걷다 보니 오르비고라고 적힌 표지판이 나타났다. 아... 오르비고라니... 오르비고까지 와버렸다니...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우리 앞에 나타난 마을은 분명 오르비고였다. 우리는 오늘 40km도 넘게 걸었다는 뜻이었다.
오늘의 비는 우리가 반드시 맞았어야 할 비였고 오르비고는 반드시 다다랐어야 할 마을이었던게다.
인생에는 피하려고 애를 써도 절대 피해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까미노를 시작한 이래 가장 힘겨운 하루를 보낸 우리에게 준비된 것은 알베르게 산 미구엘 San Miguel이었다. 그곳에는 너무나도 상냥한 주인아저씨의 나긋나긋한 환대와 따뜻한 난로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로비에서 벽에 걸린 그림이나 책상에 가득 쌓인 책을 보던 순례객들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미소로 맞아주는 모습까지, 그곳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차가운 샤워 물은 이곳의 따뜻함이 극적이긴 하지만 현실임을 잊지 않게 해주었다...
잠을 자려고 누우니 오늘 하루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아득하기만 했다.
피할 수 없는 일, 반드시 가야 하는 곳...
길을 헤매지 않았더라면 산 미구엘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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