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끝. 묵시아

by 신지명

페데리카가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짐을 꾸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 우리도 덩달아 일찍 길을 나섰다. 묵시아의 공립 알베르게가 아주 훌륭하다는 말을 들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축배를 들 멋진 공간이 필요했다.

그다지 사용할 일이 없었던 헤드랜턴을 처음으로 꺼내 머리에 썼다. 마을을 나온 길은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올랐을 즈음 어둠 속에서 길 아래 계곡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모습만으로도 멋있는 풍경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날이 더워진 언젠가부터 몇 번이고 새벽에 나서자며 다짐을 했다가 실패하곤 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풍경 없이 걷는 것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며 조금씩 풍경이 선명해지고 나서야 발걸음이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날씨가 나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열 시간 남짓 걸었을 즈음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이었다. 정말로 '끝'에 이르렀다는 느낌이었다. 프랑스를 떠나 피레네 산맥을 넘고 수많은 마을들을 두 발로 걷고 온 몸으로 느끼며 결국 이 끝까지 왔구나! 이 길의 끝,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땅의 끝이 가까웠다는 생각에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2015-05-20-21-25-46-3157.JPG


남편과 손을 잡고 바다 냄새가 가까워질 때까지 걸어 들어갔다. 둘이 함께 이곳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존재가 완성되기 위해 타인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시간이 완전히 기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이어야만 했다. 오래도록 지금을 추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2015-05-20-23-02-44-3190.JPG


마을의 언덕 위에 자리한 매우 크고 청결한 알베르게에 무사히 자리를 얻고 '까미노의 0km' 바닷가로 나갔다. 미콜과 페데리카, '놀랍게도' 다시 만난 겐지 아저씨와 길에서 한두 번 인사했던 히데꼬 아주머니, 또 페데리카의 친구들 몇몇과 함께 거세게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 끝까지 걸어갔다.
그곳엔 성당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성당에 앉아 그동안 걸어온 길 위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조용히 그 시간에 머물렀다.

페데리카는 모두가 함께 였던 그때가 그리웠는지 오늘 저녁식사 시간에 떼제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굳이 저녁일 필요는 없었다. 화려한 장식 없이 정갈하기만 한, 돌로 지은 이 성당이 더 좋았다. 나는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남편이 화음을 얹었다. 썩 훌륭하지도 않은 노랫소리였지만 친구들이 함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우리만치 조용하던 성당 안에 온기가 퍼지면서 우리는 서로서로 눈을 마주치고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우리의 걸음은 그곳에서 끝났다.

IMG_8691.JPG
2015-05-21-00-55-26-3243.JPG


성당을 나와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희원 씨를 만났다. 부르고스에서 헤어지고 난 뒤 우리보다 며칠은 앞서갔기 때문에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독을 풀고 오늘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었는데 타야 할 버스를 놓쳐 하루 더 묵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인생사...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섣불리 원망을 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느라 길에 한참을 서서 떠들어댔다. 그때 어디선가 묵직한 목소리가 우리를 불렀다.

"훌리오 Julio! 안젤라 Angela!"

- 남편의 천주교 세례명은 '율리오'인데 줄리어스 Julius, 루리우스 lulius, 훌리오 Julio... 나라별로 친구들은 제각각 불렀다. -
니콜라이였다!


IMG_8696.JPG 웃음이 너무 매력적인 니꼴라이.


너무나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기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전했다.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짜릿함은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던 그 날의 세찬 바람처럼 강렬했다.

니콜라이는 우리에게 꼭 불가리아에 와서 자기의 특별한 손님이 되어달라며 힘주어 말했다. 그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감사한 마음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그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봐야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알베르게에서 노리를 만난 것이었다. 주현 씨, 헤라르도와 벌써 며칠 전 길을 마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묵시아에 있을 줄은 몰랐다. 피스테라 Fisterra로 걸어가 그들과 헤어지고 다시 묵시아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그의 얼굴은 라라소냐에서 처음 봤던 그때의 절반쯤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우리가 이 길 위에서 참으로 긴 시간을 보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부엌은 축제 준비로 시끌벅적했다. 남편은 새우를 한 가득 삶고 등갈비찜을 했다. 미콜은 많은 양의 파스타를 만드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샴페인이 터지고 우리들의 마지막 식사가 시작되었다.
약속되지 않았던 사람들, 길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의 삶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남편은 니콜라이가 사리아에서 남겨준 라키아 Rakia를 꺼내 잔에 따르고 그도 함께 추억했다.
까미노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향기로운 꽃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직박구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되어 있었다.


2015-05-21-04-16-53-3253.JPG 재영 씨, 페데리카, 미콜, 중혁 씨, 히데꼬 아주머니, 노리, 그리고 희원 씨
IMG_8689.JPG


매거진의 이전글올베이로아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