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에서의 달콤한 와인 한 잔

by 신지명

어제 오후, 피스테라를 마지막으로 까미노를 완전히 끝내고 한인민박 '보스케'로 들어왔다. 사장님 부부가 우리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해 주셨는데 까닭이 있었다. 청년 두 명이 사전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와 방을 내어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의 방을 내어줄 수 있는지 몹시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대신 같은 가격에 스위트룸을 내어 주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조심스럽게 물어보신 거지? 우리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청년들은 밖으로 내몰리지 않아 좋고, 사장님은 방을 놀리지 않아 좋고, 우리는 너무 좋은 휴식처를 얻어 좋았다. 이렇게 모두에게 좋을 수 있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면 세상 살 맛 날 것 같다.


2015-05-23-17-14-01-3420.JPG 보스케의 거실


스위트룸은 이름 그대도 달콤했다. 정갈하고 널찍한 방은 들어서면서부터 몸의 고단함이 풀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천장에 난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내리는 욕실은 더욱 화사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욕조에 몸을 담그니 공기에서마저도 달콤한 향이 나는 듯했다. 스페인의 저녁 햇살이 방의 구석구석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며 두툼한 이불 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는 뜨끈뜨끈한 전기장판을 깔아놓은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에 혀를 내두르고 감탄하는 말을 우물거리다 말고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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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의 삐그덕거리는 침대 위에 깔아놓은 부직포 시트, 그 위에 펼쳐 놓은 군데군데 털이 뭉쳐 빈 공간이 느껴지는 허접한 나의 침낭.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날들이었다. 그것이 그렇지 않았던 것은 분명 아니다.

흔히들 와인 맛은 잘 구별하지 못하겠다고들 한다. 뜻을 알지 못하는 화려한 필체가 휘갈겨진 라벨만으로도 소주와는 차별되는 듯 고급 진 맛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게 하니까 말이다. 그 매혹적인 빛깔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정말로 숙성이 잘 되어 맛과 향이 깊은 와인을 한 번 맛보고 나면 훌륭한 와인과 그렇지 못한 와인을 단편적으로나마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맛있다고 잘만 홀짝거리던 와인이 더 이상 입에 맞지 않아 인상을 쓰게 되고 만다. 자칫 잘못하면 싸구려 와인은 입에 맞지 않아 마시지 못하고 고급 와인은 형편에 어울리지 않아 쉽게 마실 수 없게 되어 아예 와인을 끊어버리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삶을 끝까지 감사하고 만족하며 즐기려면 이런 호사스러운 달콤함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고단함이 몸을 짓눌렀을 때, 그때, 딱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래야 나에게 주어진 작은 모든 것들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그것들에게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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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값비싼 와인처럼 향기로운 시간은 하루면 되었다.
기차역으로 가서 알아보니 포르투갈로 가는 기차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다가 새벽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 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표를 샀다. 그리고 다시 뿔뽀를 먹으러 가는 길까지, 아침에 길을 나선 뒤 족히 3~4km는 걸은 것 같다. 버스를 탈 수도 있었는데 '그 정도면 좀 걷지 뭐'하는 생각에 걷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있었다. 한국의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며칠도 지나지 않아 차 없이는 살 수 없는 생활로 돌아갈테지만 아직은 걷는 것이 더 익숙하고 좋았다.
오래된 까미노 생활을 마무리하랴 새로운 여행을 떠나랴, 생각보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모든 것이 정해진대로, 매일매일 하던 대로 살던 생활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앞으로는 며칠을 두고 계속해서 새로운 생활을 꾸려야 하는데 꼼꼼한 계획은커녕 남은 일정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까미노를 마치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으리라던 나의 꿈은 이래저래 순진한 것이었다.
오후에 들어와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방에 콕 틀어박혀있는 우리가 신경이 쓰이셨는지 안주인께서 시원한 수박과 와인 한 병을 방으로 가져다주셨다. 그 검붉은 빛깔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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