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잇는 무지개가 펄럭이는 쿠스코

by 신지명

여섯 시쯤이 되어 눈이 떠졌다. 늦잠을 좀 자려고 다시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냥 누운 채로 뭉기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볼리비아에 들어선 후부터는 잠자리가 줄곧 편치 않거나 일정이 바빴기 때문에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움에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남편이 누군가 샤워한 직후에 샤워실로 들어가는 바람에 찬물로 씻었다는 말을 듣고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다시 한번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당겼다. 마음의 한기가 좀 누그러진 다음에야 나도 샤워를 하고 쿠스코 관광에 나섰다.

아타와카마 호스텔 Atawakama hostel


쿠스코에 무엇이 있는지는 사실 잘 몰랐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아르마스 Armas 광장의 이름만 알았고 그 외에는 몇 가지 전통음식에 대한 정보가 전부였다. 그래서 일단 숙소에서 가까운 산 페드로 San pedro 시장부터 들렀다. 그런데 그곳이면 충분할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넓은 건물 안에는 온갖 음식과 옷가지, 소소한 소품들을 파는 점포들이 가득했다.


산 페드로 시장 입구


현지인들은 길게 늘어선 작은 점포들 앞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먹고 있거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리도 맛있게 먹나 궁금해서 기웃거렸다.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은 커다란 닭고기가 들어간 국수였다. 정확히는 파스타를 닭 육수에 말아먹는 것이라 딱히 무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그냥 닭고기 수프, 소파 데 뽀요 sopa de pollo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여튼 아침 빈 속에 먹기 딱 좋은 음식을 발견하고는 우리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주인 코밑 자리에 앉았다. 다른 가게는 모두 스파게티를 쓰는데 그 집만 짤막한 푸실리를 쓰는 것이 뭔가 특별해 보였다. 다른 먹거리도 많을 테니 일단 한 그릇만 시켜 맛을 보기로 했다.

아하! 뜨끈한 닭국수는 아주 맛깔스러웠다. 진한 닭 육수야 익숙한 맛이지만 부들부들하게 삶아진 파스타를 떠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테이블에 놓인 스테인리스 그릇에서 뭔가를 떠서 자기 그릇에 넣길래 그것이 뭔가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닭뼈를 담는 그릇인 줄 알았는데 통고추와 다진 양파가 뭔가에 적셔져 있었다. 아저씨가 하는 대로 그것을 떠서 국물에 넣으니 알싸하고 새콤한 감칠맛이 훅 돌았다. 라파즈에서 먹은 소스처럼 이 지역 대부분이 식초에 야채를 절인 새콤한 소스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더운 날씨에 음식 저장 기술이 마땅치 않은 이 지역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리고 새콤하고 짜릿한 그 맛이 더위에 지치고 나른한 몸을 잠시나마 깨워 생기를 돋우기도 하였다.
소스의 매력에 빠져 그것을 듬뿍 넣은 국물을 후룩후룩 떠먹고는 닭고기 살을 발랐다. 넓적다리 살을 먹을지 퍽퍽한 가슴살을 먹을지는 떠주는 주인아주머니의 마음인 듯했다. 운 좋게도 우리는 튼실한 다리를 한 덩어리 배급받아 맛있게 먹었다.
푸짐한 국수 한 그릇은 5 솔, 고작 1,800원 정도였다.

소파 데 뽀요 sopa de pollo. 닭고기스프.


시장 음식이 먹을만하다는 믿음을 갖고 우리는 또 뭔가 먹을 것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온갖 색깔의 옥수수와 곡물들, 커다랗고 두꺼운 초콜릿과 피자 한 판 크기의 빵-이 빵이 신기한지 외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었다. -, 그리고 즉석에서 갈아주는 과일주스를 파는 점포들이 즐비했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니 우리가 찾던 세비체 ceviche를 파는 곳도 나타났다. 석 달이 되어가도록 가장 좋아하는 회를 먹지 못한 남편에겐 말도 못 하게 반가운 음식이었다.

몇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는데 가장 앞쪽에 있는 점포의 듬직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재빨리 꼬마 손님들을 옆으로 밀어 우리 자리를 만들어주는 바람에 그곳에 자리를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장사 수완이 좋은 것인지 우리가 순진한 것인지 일단 맛부터 보라며 생선살을 하나씩 찍어 내밀기까지 하니 그것들을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주머니가 내민 것들 맛이 모두 훌륭해서 아주머니가 뭐라 말하는지도 잘 모르고 연신 고개를 끄덕여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우리 앞에는 구운 옥수수 알갱이가 동동 뜬 생선 육수 한 그릇 씩 놓였고, 전갱이(후렐 jurel) 세비체 한 그릇, 빙어와 비슷하다는 페헤레이 pejerrey와 송어(투루차 trucha)를 섞은 믹스또 Mixto 가 또 한 그릇 나왔다. 다진 채소와 생선살을 레몬이나 라임즙에 절여먹는 음식 세비체는 회를 즐기지 않는 내 입에도 아주 맛있었다. 생선살이 쫄깃하게 씹히고 새콤하고 아삭한 채소들이 곁들여져 입을 가셔주니 한 입 한 입이 끊임없이 첫 입인 것처럼 개운했다. 시큼한 맛이 좀 세다 싶으면 육수 한 숟가락이 제법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고수를 미쳐 빼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고수를 넣어주는지도 몰랐으니 미리 빼달라고 할 도리도 없었다. 고수 향이 살짝 도는 정도는 음식의 풍미를 돋우니 괜찮은데 잎사귀 조각이 어금니에 짓이겨져 진하게 향을 풍기는 것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져진 고수잎을 살살 걷어내는 밉상스러운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푸짐하게 한 입을 먹지 못하고 생선살만 조금씩 골라먹는 꼴이 되어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푸짐한 세비체를 16 솔, 5,700원쯤에 먹고 아주머니에게 몇 번이고 생선 이름을 물어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대떡이며 잔치국수 한 사발은 모름지기 장터에서 먹어야 제 맛이듯이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요상하게 변질된 전통음식을 비싼 돈 주고 먹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세비체로 더 촉촉해진 입을 쩝쩝거리며 페루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소 심장 꼬치구이, 안티쿠초 anticucho를 먹으면 딱 아침이 채워지겠다 싶어서 코를 벌름거려보았으나 시장에는 없는 듯했다. 마음을 접고 시장 밖으로 나섰다.
시장 밖에도 먹거리는 많았다. 1 솔을 주고 사 먹는 츄러스가 생각지도 않게 구수하고 달콤한 맛을 충족시켜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1 솔 짜리 생파인애플, 사탕수수 음료, 크림이 든 츄러스를 하나씩 더 사 먹고 치차론 chicharon이라고 하는 돼지껍데기 튀김도 어느새 사서 손에 들었다. 하지만 치차론은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따뜻했다면 맛있었겠지만... 약간 냄새가 나서 냄새에 좀 관대한 남편이 혼자 다 먹었다. 맥주가 있었다면 맛있게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마셔 본 사탕수수 음료도 무척 신기했다. 첫맛이 매우 달콤하게 시작되었다가 개운하고 맑은 맛으로 끝이 났다. 첫 맛대로라면 분명 들쩍지근한 맛이 혀뿌리에 엉겨있어야 했는데 맹물보다도 가볍게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직접 으깨서 담아주는 음료라 결코 시원할리가 없는데 분명 시원했다. 남편은 그 맛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치차론 chicharon. 돼지 껍데기 튀김


산 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광장에서는 음식축제를 하는지 광장을 가득 메운 천막들에서 온갖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기니피그 구이인 꾸이 cuy가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채 진열되어있는 곳도 있었고 치차모라다 chicha morada라고 하는 보라색 옥수수와 과일을 끓인 음료도 있었다.



모두 맛을 보고는 싶었지만 이미 배가 불렀고 맛있는 도넛 가게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갈 참이었다.
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던 우리는 익숙한 소리에 이끌려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이 일요일인지도 잊고 있었고, 페루에서 성당을 찾아갈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가던 길'에 '이제 막' 주일미사를 시작한 성당이 있다니... 남편과 나는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가려고 계획했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성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유럽의 미사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우리 앞에는 주인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개가 한 마리 있었고 여기저기 자유롭게 울어대는 아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수선하다기보다는 매우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경건해야 한다거나 격식을 차려야 한다거나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한 미사가 아니었다. 다들 늘 있던 그대로, 늘 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와 있는 것 같았다. 무척이나 반갑게 평화의 인사를 해주는 사람들로부터 진심으로 축복을 받은 기분도 들었다.
또 한 번 우리의 일탈을 감시하는 미지의 세력 덕분에 주일미사를 거르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은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꽃과 나무로 잘 조성된 중앙정원을 에두르고 있는 것은 멋스러운 장식의 테라스를 가진 식당과 상점 건물들, 쿠스코 성당 La catedral del Cuzco과 산타 카타리나 santa catalina 성당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장의 저 멀리 보이는 산의 면을 따라 빼곡히 지어진 집들의 모습은 몹시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분명 라파즈에서도 그런 풍경을 보기는 했지만 한껏 꾸민 공원과 어우러져 있으니 마치 그곳이 동화스러운 어떤 장소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실상은 분명 허름하고 갑갑한 삶의 현장일테지만 말이다.


아르마스 Armas 광장


쨍한 날씨에 공원에 좀 머물고 싶어 맥주 한 병을 살 상점을 찾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예스러운 돌길이 좁게 이어지고 있는 골목골목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나라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도시 전체가 비좁고 촘촘한 듯한데 넓게 트인 하늘과 낮게 퍼진 건물의 배치로 답답하거나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 넓게 트였다고 해서 하늘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신호등의 장식이나 돌벽의 정교함이 또 볼거리였으니 분위기가 묘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마스 Armas 광장


맥주를 한 병 사 들고 공원에 앉아서 보니 잉카제국의 깃발이었다는 무지개깃발이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빛을 내며 펄럭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 지하세계를 잇는다는 무지개 상징은 공간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시간도 이어주는 다리인 것이 분명했다. 아르마스 광장에 앉아 느낀 쿠스코의 오늘은 오래전 잉카와도 여전히 가깝게 맞닿아있는 것처럼 흔적들이 선명해 보였다.


내심 기대했던 피카로네스 picarones라고 하는 도넛은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얇은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푹 담가 튀긴 것이라 쫄깃하기는 했지만 너무 기름졌고 뿌려주는 꿀은 별로 달지 않아 밍밍했다. 일요일에는 치차모라다를 팔지 않는다고 해서 미뤄두었던 그것을 결국 먹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른 시장은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어 축제 분위기였다. 어린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그러모으는 놀이판도 많았고 아저씨가 손으로 돌려주는 회전차도 시장의 흥을 돋우었다.


하지만 호스텔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크루즈 델 수르 cruz del sur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은 다시 힘들고 팍팍한 남미의 모습이었다. 마치 이곳의 사람들이 아르마스 광장을 멋들어지게 꾸며놓고 관광객은 거기에만 있어, 우리의 진짜 모습은 볼 필요 없어... 하고 숨겨놓은 것 같다고 남편이 말했다.
우유니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우리 같은 관광객이 이들의 실상에 대해선 모른 척 실눈을 뜨고 최대한 즐겁고 신나게 즐기는 것이 이들을 돕는 가장 좋은 일인 것 같았다. 무언가 착잡하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 그랬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은 사람이 이들을 찾아가고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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