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델 수르 cruze del sur는 가장 좋은 버스 회사답게 버스터미널도 따로 쓰고 버스에 승무원이 함께 탑승해서 챙겨주기까지 했다. 각자의 자리마다 모니터가 있고 영화도 제법 담겨있기는 했지만 피곤한 몸은 저녁부터 잠들어 아침이 될 때까지 몇 번 뒤척거려 깨고는 내내 잠에 취했다.
어제저녁 6시에 출발해서 밤새 달린 버스는 페루의 수도 리마를 향하고 있었다. 사실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지나치게 긴 편인데 버스의 이 층 전면에 속력이 표시되는 것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평균 시속이 40~50km 정도였다... 잘 닦인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굽이굽이 산 길을 돌아 달리고 먼지 날리는 좁은 마을을 통과하고 하려니 속도가 안 나는 것이 당연했다. 어느 때는 좁은 굽이길에서 마주 오던 큰 트럭과 엉켜서는 십여 분을 앞뒤로 움직여 피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멋진 풍경을 오래도록 찬찬히 감상할 수는 있었다.
리마에 가까워지면서는 해안가를 따라 달려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여느 선진국 같았으면 진작에 호텔이며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을 넓은 백사장은 양계장으로 가득 차 있거나 양계장이었던 폐건물들이 남아있었다. 운영 중인 듯한 양계장에는 닭들이 촘촘하게 채워져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페루에 왜 닭고기가 많은지를 완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비단 이곳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열악한 환경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길러지는 동물들이 얼마나 많을지... 사실 우리가 먹게 되는 수많은 동물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을 것 같다. 그들의 삶을 상상하면 당장에라도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로 돌아서고 동물보호단체에 가입해 변화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마땅하겠지만 그런 삶을 선택할 자신은 또 없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그저 그린피스든 동물보호단체든 나를 대신해서 좋은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보내는 최소한의 의무라도 해서 죄책감을 더는 수밖에.
세 시가 조금 넘어 리마에 도착했다. 리마는 수도답게 높은 빌딩도 많았고 그럴듯한 상점들도 많았다. 일반적인 도시처럼 도로도 복잡하게 얽혀있고 차의 종류도 현대적인 편이었다.
쿠르즈 델 수르 버스터미널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노선을 보니 리마에서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콜롬비아까지 남미의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것 같았다.
40 솔이 좀 비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공식 가격이 그렇다고 하니 군소리하지 않고 공항으로 들어가는 택시에 올랐다. 여행 초반이었다면 어떻게든 버스를 알아봐서 움직였겠지만 남미에서의 장거리 이동에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이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일정에 여비에 대한 걱정도 좀 덜게 되어 마음 편히 택시를 이용했다. 마음이 나태해져서 배낭여행객의 본분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찜찜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매우 편하게, 빨리 공항에 도착하니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다.
세계적인 공항으로 순위권 안에 든다는 리마 공항은 아마 이용객 수로만 평가했을 때의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공항 밖의 주차장부터 북적거리기 시작해서 공항 건물 주변으로도 사람들이 몹시 붐볐다. 공항 내부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인지 아니면 이런저런 행상들이 많아서인지 공항 입구에서 비행기 티켓이나 예약 관련 서류를 보여줘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공항 안에도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의자가 턱없이 부족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들른 식당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공항은 처음 보았다.
우리는 핸드폰 충전도 좀 해야 했고 미국에 도착해서 숙소로 갈 버스도 예약해야 했는데 콘센트를 찾기도 어려웠고 인터넷은 고작 30분이 무료였다. 그마저도 너무 느려서 화면이 넘어가길 기다리다가 끝나버렸다. 주머니에 남은 마지막 5 솔을 들고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겨우 시켜놓고 앉을 수 있었는데 그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작업 중인 빈 화면만 쳐다보다가 들어갈 시간이 되어버렸다. 결국은 무려 7,000원이나 되는 돈을 지불하고 두 시간 이용 가능한 인터넷에 연결을 하고야 말았다. 그동안 일정이 빠듯하다는 핑계로 다음 행선지 준비를 게을리 한 대가였다. 비행기 시간이 늦어 시간도 넉넉하겠다, 손에 꼽히는 공항이라고 하겠다... 공항에서 모두 해결하면 되겠다는 계획은 몹시 안일하고 나태한 생각이었다.
결제 단계에서 멈춰버려 구매하지 못했던 플로리다주 멜버른 Melbourne 직행버스는 그 사이 매진이 되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웨스트팜비치 West Palmbeach라는 곳에서 멜버른으로 가는 버스를 일단 예매했다. 마이애미 공항에서 웨스트팜비치까지 가는 기차가 있으니 좀 번거로워도 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기차 시간표도 잘 저장해두었다.
돈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인터넷은 매우 빨랐다... 결제는 한순간에 끝이 났다...
'진작'이라는 단어는 '현재'에 이르러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나 쓸 수 있는, 과거와 현재가, 그리고 미래가 만날 수 없다면 영원히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단어일 것이다.
밤 열한 시가 거의 다 된 시간, 드디어 남미를 벗어나 또 하나의 거대한 대륙, 미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