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태양의 도시, 페루 마추픽추

by 신지명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났다. 호스텔의 조식도 이곳 특성상 5시부터 제공된다고는 했지만 버스정류장 미팅이 5시여서 먹을 수는 없었다. 어제 가이드가 챙겨준 간단한 아침 도시락에 든 주스만 한 팩 마시고 어두운 마을길로 나섰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고요한 새벽 산 중에 거세게 울렸지만 마을에 들어온 후로 내내 어두워서 정작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다섯 시에 맞춰서 나왔음에도 정류장에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첫 차는 다섯 시 반에 출발이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물소리가 힘차게 울리는 가운데 서 있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평범한 것이 없었다.
몇 대의 버스가 줄지어 서더니 사람들이 타기 시작했다. 우리의 차례가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안내원이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2명 dos? 3명 tres?'를 외치고 있었다. 앞 쪽의 버스를 모두 채워서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얼른 손을 들고 줄에서 나와 첫 차에 올랐다. 그래봐야 몇 분 차이도 안 날 테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추픽추에 오르고 싶었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을 보니 걸어서 오르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도 이십 여 분을 올라가야 하는데 동도 트지 않은 어두운 산 길을 힘겹게 올랐다면 마추픽추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기진맥진할 뻔했다.

마추픽추 입구에도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고 가이드를 따르는 사람들, 손님을 구하는 가이드들이 뒤엉켜 북적북적했다. 사람들의 틈틈이 태평하게 자고 있는 개들이 많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로 차기 십상이었다. 페루의 개들은 유난히 평화로웠다.



우리는 영어로 안내해주는 가이드를 따라 마추픽추에 들어섰다. 정보야 인터넷에 가득하니 굳이 가이드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그래도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뒤를 따랐다.
입구를 지나고 나서도 숨이 약간 찰 만큼 계단을 올라서야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마추픽추가 눈에 들어왔다. 앞서 간 사람들의 탄성 소리에 마음이 다급해져 계단 몇 칸을 단숨에 올랐다.
오!


사실 나의 탄성은 마추픽추 유적지보다는 그 주변을 둘러싼 산의 풍경에 대한 것이었다. 마추픽추야 워낙 온갖 미디어에서 많이 봐서 놀랍지 않았지만 사진의, TV의 바깥에 있는 것들, 그곳을 둘러싼 풍경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겹겹이 둘러쳐진 산의 모양새는 높고 뾰족하고 가파르게 치솟아 '공중도시'의 호위무사들 같았다. 아직은 새벽의 어스름이 남아있어서 그 풍경은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경치에 흠뻑 빠져들어 있어서 조금 지루한 가이드의 말은 공중에서 웅웅거리다가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전 세계인들이 이 어마어마한 유적을 발견한 사람을 미국의 고고학자라고 알고 있지만, 마추픽추 입구에서 받은 안내서에도 그렇게 나와있지만 사실 그에게 이곳을 알려준, 진정한 최초의 발견자는 페루의 한 소년이었다는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웠다. 또, 여러 가지 작물을 경작하던 계단식 밭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된 어마어마한 양의 모래가 어디서 났는지에 대한 질문도 궁금증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는 가이드의 목소리에서는 잉카인의 후예로서의 자부심과 이곳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한 자리에서 너무 오랜 시간 이야기를 전했다. 슬슬 한기가 들고 집중력도 떨어져 몸이 빌빌 꼬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동을 하지 않는 것인지, 다른 볼 곳이 많을 텐데 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인지 원망의 마음이 들 때쯤, 가이드가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아침해가 봉우리 바로 뒤까지 올라왔는지 산이 황금의 왕관을 쓰고 그 빛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봉우리에서 쏘아진 빛줄기는 잉카인의 얼굴을 닮았다는 '와이나픽추'를 서서히 밝히더니 마추픽추에까지 아침을 밝혔다.

와이나픽추 Huayna Picchu. '젊은 봉우리'라는 뜻의 이곳은 잉카인의 옆모습을 닮았다. 마추픽추 Machu Picchu는 '늙은 봉우리'


문득 페루의 소년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아무도 살지 않았던 이 공중도시에 얼마나 많은 아침이 들었던 것일까, 그 시간이 얼마나 고요하고 신비로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또 이곳에서 내가 본 것과 같은 아침을 맞았을 그 옛날 잉카의 사람들도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며 이곳에 살았던 것일까... 지금이야 마치 인간이 지구를, 자연을 지배하고 사는 듯한 착각에 빠져 살지만 그때의 이곳 사람들은 저 거대한 산봉우리가, 저 찬란한 아침의 해가 얼마나 신비롭고 위대해 보였을까... 분명 그들은 씨앗의 싹을 틔워 곡식을 자라게 하는 땅과 하늘을 경배하였을 것이고 추위와 어둠을 밀어내는 태양을 흠숭하였을 것이다. 평생을 바쳐 그것들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자연의 신비에 압도당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니 말이다.

마추픽추가 사람들에게 특별한 것은 이곳이 아마도 짜릿하고 신비스러운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생명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생명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곳은 '폐허'라고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자연과 함께 잉카인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아침이 드는 마추픽추로 우리는 충분했다. 그 뒤로 제단이 어떻고 제물을 어떻게 바쳤고 하는 이야기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햇빛이 드는 돌벽의 틈틈과 창문에서 바라다보이는 건너편 산의 능선을 훑어보며 그곳에 머물렀다. 두 시간의 안내가 끝난 뒤의 자유시간에는 사진 모델로 일하는 것이 분명한 라마들을 보거나 도시의 뒤편 깊은 곳을 흐르는 우루밤바 강을 보며 곳곳을 감상했다.


워낙 일찍부터 움직인 덕에 도시 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 뒤에도 시간은 열 시가 채 되지 않았다. 내려갈 때는 버스를 타지 않기로 해서 입구의 매점에서 파는 치킨 파이로 준비를 단단히 한 뒤 하산을 시작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가려줄 만큼 울창한 숲길이었지만 워낙 가팔라서 내려가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도대체 누구의 신장에 맞춘 것인지 좁고 높은 돌계단 때문에 자세도 제대로 잡기 어려운 하산길이었다.
산 길을 내려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올라오던 어린 여자아이가 울기 직전의 눈빛을 강렬하게 보냈던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 길을 울지 않고 올랐는지가 더 신기할 정도였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걸어서 올라오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조금 더 내려온 길에는 그 높은 곳까지 엄마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올라와 라마 인형 열쇠고리며 봉지에 담긴 미지근한 싸구려 주스 따위를 팔고 있었다. 놀거리가 아무것도 없어서 멍한 눈빛으로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5 솔을 주고 열쇠고리와 사과주스를 골라 들었다. 주스라고는 하지만 과일을 문지른 체를 헹궈낸 것처럼 밍밍한 맛이었다. 그래도 무더운 아침 공기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에게는 제법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시간 반쯤,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산을 다 내려왔다. 오래된 다리로 계곡을 건너고나서부터는 높은 산 아래로 난 평지로 계곡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파란 하늘과 날카로운 산세에 땅을 보는 시간보다 하늘을 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남편은 오는 길에 보인 캠핑장을 보며 매우, 무척 아쉬워하였다. 이고 지고 다닌 텐트도 있었겠다, 미리 알았더라면 특별한 캠핑을 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내가 힘들다고 따라나서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꼭 잉카 트레일을 신청해 이곳에서 캠핑을 하고 마추픽추에 오르겠다며 몇 번을 이야기했다.

페루의 전통 개. 페로 칼라토 Perro Calato. 털 없는 개라고도 한다.


하룻밤을 묵었지만 그제야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의 밝은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밤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추픽추를 보고 나서도 하루, 이틀을 더 묵는 사람들로 마을은 북적거렸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의 테라스에도, 기차역 뒤 광장에도 어디에나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아침에 버스를 탔던 정류장 앞의 카페에서 맥주 한 잔으로 더위를 식히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라고 해봐야 얼마 가지 않아 내려야 했지만 어제저녁 어둠을 더듬으며 걸었던 길의 풍경을 보는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천장에 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일렁거림이 너무 달콤해서 풍경을 보다가 몇 분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드로 일렉트리카에서 다시 미니버스에 올라 쿠스코로 돌아가는 길을 떠났다. 올 때 보지 못했던 반대편 풍경을 보려고 남편과 함께 앉지 못하는 한 줄짜리 좌석에 다시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길은 당장이라도 흙더미가 흘러내려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려다가 그만두었다. 운이 나빠 사고가 난다면 그깟 벨트 따위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흔히 남미 여행자들의 여행기에서 목숨을 천운에 맡기는 느긋함을 엿보곤 했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불안증에 시달려 온전히 여행할 수 없을 것 같긴 했다.
굽이굽이 산을 돌아내려 평지에 내려서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해가 질 무렵 저녁식사를 하라고 내려준 간이휴게소에서는 여행을 나선 지 84일 만에 가장 멋진 노을을 만났다. 멀고 먼 곳까지 이어진 산의 장벽 너머로 지는 해는 하늘과 구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초록의 산과 찬란하게 푸르던 하늘의 빛이 모두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 황금빛으로 황홀하게 폭발하고는 어둠을 맞는 것 같았다.
분명히 마추픽추의 그곳에서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으리라...
오늘은 아침이 드는 순간부터 밤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모두 특별했다.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열 시가 거의 다 되어 다시 아타와카마 호스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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