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by 신지명

우리와 한 방을 쓴 처자 두 명이 굳이 한 침대에 부둥켜안고-연인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밤새 코를 골았다. 남편이 코를 고는 줄 알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잠을 설쳤고 자다가 추워서 침대의 담요를 들추고 파고들었더니 찌든 소변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만큼 춥지 않았고 볼리비아보다 쾌적해 그럭저럭 괜찮은 밤을 보냈다.

어젯밤 친절한 호스텔 주인 덕분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아침식사시간도 투어버스 시간을 고려해서 7시에 준비되어 여유로운 아침을 맞았다.


이른 아침 숙소 앞 골목. 하늘이 쾌청하다.


8시가 조금 넘어 호스텔로 마중 나온 가이드를 따라 미니버스에 올랐다. 다른 호스텔에서 태운 외국인들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잉카의 공중 도시를 보러 간다는 설렘 때문인지 흥이 나서 버스의 거친 움직임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며 환호했다.
마추픽추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로 가기 전 신상을 기록해두는 체크 포인트 check point, 이드로 일렉트리카까지는 6시간 정도 걸렸다. 낡고 좁은 버스로 흙먼지를 마시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여행이 쉽지는 않았다. 엉덩이가 저려서 몇 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주어야 했고 버프를 눈밑까지 끌어당겨 마스크 대용으로 써야 했다. 나는 텁텁한 먼지 냄새가 고역이었는데 역시나 외국인들은 흙먼지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하지만 흙먼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산 위로 몰려든 새하얗고 선명한 구름을 보려면, 버스의 바로 옆에서 시작되는 절벽 저 아래 협곡을 감상하려면 깨어있어야 했다. 우리가 상상하던 남미는 페루에 있었다. 남편은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언젠가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마추픽추에 이르는 정통 잉카 트레일을 하러 다시 오겠다며 다짐을 했다. 기차로 가면 훨씬 빨리 도착하겠지만 페루의 산과 협곡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달리는 것은 놓쳐서는 안 될 경험이었다.



점심식사는 '고수 덮밥'이었다. 야채수프인 줄 알고 밥 위에 가득 붓고 난 후에야 고수의 향을 맡았다. 이미 그릇에 담은 음식을 남길 수는 없고 고수 향에 길들여질 자신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코와 입의 연결통로를 차단하고 양파와 토마토 따위를 잔뜩 얹어 우적우적 씹어 넘겼다. 몇 번을 먹어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 향이다. 말벌의 애벌레 찜도 먹을 수 있고 메추리 대가리 구이까지 먹을 수 있는 남편도 고수 향은 어려워한다.
그나마 된장같이 구수한 향이 나는 수프로 입가심을 하고서야 힘든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온갖 야채로 뒤덮었지만 고수향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번의 휴식과 한 번의 점심식사를 마지막으로 버스는 목적지까지 줄곧 달렸다. 멋진 풍경도 줄곧 계속되었다. 네 시가 다 되었을 즈음 이드로 일렉트리카에 도착했는데 마을까지 가려면 아직 두어 시간의 트래킹이 남아있었다.

과일이며 음료 등을 파는 상점이 기찻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성한 과일은 거의 없었고 냉장고가 없어서 음료수나 물도 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차와 산을 배경으로 늘어선 상점들의 모습만큼은 도시의 그 어느 깨끗한 상점보다도 싱그러워 보였다.

기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가니 울창한 바나나 숲으로 들어섰다. 야생 바나나 숲을 걷고 있자니 정글 탐험대라도 된 기분이었다.

계속되는 버스 여행 후 실로 오랜만에 두 발로 걷는 길이었다. 오랜 순례로 발과 다리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통증이 좀 있기는 했지만, 기찻길의 자갈들이 발다닥을 끊임없이 찔러댔지만, 걷는 기분은 몹시 상쾌하고 좋았다. 계곡도, 울창한 산과 절벽도 절경이었다. 처음 듣는 새소리와 처음 보는 신기한 꽃들에 정신이 팔렸다. 남편이 나에게 생물을 보니 생기가 좀 도느냐며, 그동안 보인 나의 시큰둥함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이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하지만 나의 콧노래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후기에서 봤던 대로 해는 금세 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여섯 시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는 산속이 암흑이 되어 핸드폰 랜턴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몇몇 사람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지만 맞게 가고 있는 것인지, 마을이 있기나 한 것인지, 심지어 야생동물이라도 튀어나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가 아니었더라면 무서워서 다리가 굳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머리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환호했다. 빛이 전혀 없어 실루엣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노란빛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 마을이 있음이 분명했다.
첩첩산중에 비밀스러운 장소처럼 숨겨져 있는 마을이 바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Aguas Calientes, 마추픽추 마을이었다. 노란 불빛을 밝히고 터널을 통과해 들어오는 기차가 뿌-소리를 내며 지나가니 마을은 더 신비한 곳인 것만 같았다.



마을의 존재를 확인한 후에도 좀 더 걸어야 했는데 기찻길을 따라 걷는 동안 초록색의 작은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작은 불빛은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날아 움직이기도 했다. 핸드폰을 끄고 어둠에 눈이 익도록 기다리고 보니 이곳저곳에서 불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곳에서 반딧불이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후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싶었을 것이다. 철로 위, 나무 위, 수풀 속 여기저기서 반딧불이들이 빛을 내고 있는 풍경은 너무나 신비로워서 마치 미야자끼 하야오의 만화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치히로'가 처음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둠 속에 반딧불이를 보며 서 있는 것이 나를 무척 설레게 했다. 광장에서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마음이 급하기는 했지만 작고 반짝이는 초록빛에 매료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그 빛에 홀려 깊은 산중으로 걸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반딧불이의 마중을 받으며 들어선 마을은 별세계였다. 기찻길 옆으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북적거렸다. 이 깊은 산중에 여행객들만을 위한 마을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는 걷게 하고 정작 본인은 편하게 기차를 타고 올라온 것이 뻔한 가이드와 재회하고 호스텔로 안내를 받았다. 가이드는 우리를 숙소에 데려다 주고는 먼저 씻고 푹 쉬었다가 7시 45분에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나라였으면 분명히 식당 먼저 들렸을 것이다. 12시에 점심을 주고 두 시간 트래킹을 시켰는데 저녁을 주지 않는다니! 남편과 나는 허기에 한기를 더하고 싶지 않아 씻지 않고 마을부터 둘러보았다. 환전도 하고 시장 구경도 하며 주린 배를 달랬다. 최대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맛은 있었지만 내 손바닥만 한 작은 닭고기 구이와 감자가 영 부족해서 페루 맥주 쿠스퀘냐 Cusquena 큰 병을 하나 시켜 배를 좀 더 채웠다.
우리 팀 외에도 몇몇이 더 모인 식당에서 내일 일정 안내를 스페인어 한 번, 영어 한 번 듣고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배고프고 피곤한 내 몸과 상관없이 움직여야 하는 투어는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 내에 기차표를 사거나 마추픽추 입장권을 사는 등의 복잡한 일들을 해결해주었으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열한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하루 종일 시달린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날이 쌀쌀해서 침낭에서 잔다... 언제쯤 침낭 생활을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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