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니로 오던 버스에서 추위로 고생을 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침낭까지 챙겨 단단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풍기 바람 때문에 덥고 건조해서 또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입을 벌리고 잤는지 입술은 말할 것도 없고 혀뿌리까지 말라붙어 잠에서 깼다. 잠결에 물통이 두 개라는 사실에 생각이 이르지도 못하고 손에 잡히는 빈 물통을 탁탁 털어 몇 방울의 물로 겨우 입을 적시고 다시 잠을 청했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고 껴입었던 옷을 하나씩 벗어가며 잠을 설쳤다. 남편은 그 지경에도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고 자려는 노력을 할 수 있는 내가 놀랍다며 장난스럽게 엄지를 세웠다.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어 라파즈에 도착한 후에야 건조하고 답답한 버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쿠스코로 가는 8시 반 버스표를 샀다. 라파즈-우유니를 다녀보니 인터넷 예매가 수수료 때문에 더 비싼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성수기가 아닌 이상에야 당일 버스표를 사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도 않아서 인터넷으로 버스 시간과 회사명만 알아두면 어렵지 않게 표를 살 수 있었다. 우유니에서도 거리의 여행사마다 버스표 구매 대행을 해주고 있어서 라파즈로 오는 것 역시 무척 쉬웠다. 단, 버스표의 가격은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했다. 나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나는 쿠스코에서 사용할 페소로 환전할 달러를 출금하고 버스회사 '엔컨티넨탈 인터내셔널 Ncontinental international'의 창구를 찾았다. 버스표 두 장을 주문하고는 '160 one hundred and sixty'이라고 말한 아저씨 면전에서 호기롭게 20달러짜리를 한 장 한 장 세어 총 8장을 내밀었다. 그런데 돈을 받아 든 아저씨와 그 옆의 또 다른 아저씨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다. 아저씨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 사람 당 '160 볼'이라고 다시 정확히 말해주었다. '160 달러'가 아니라 '160 볼'이었는데 숫자만 말하니 내가 오해를 한 것이었다. 둘이 합해야 45달러, 5만 원쯤밖에 안 되는 가격이었다. 처음부터 단위를 정확히 말해주시던가... 인터넷에서 가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데다가 라파즈에서 우유니 가는 버스를 7만 원쯤에 예매했으니 국경을 넘는 쿠스코까지는 당연히 그 정도 금액이려니 생각했다. 게다가 두 번의 버스표 구매를 모두 달러로 했으니 착각할 만도 했다. 아저씨들이 잠시 웃으며 수군거린 것은 아마도 '얘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척 받을까?'에 대해 의논을 한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저씨는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었고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머지 돈을 돌려주었다. 아저씨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진실이었다. 우리가 다른 승객들을 만나 버스 가격에 대해 이야기할 일도 없고 지나간 일정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냥 지나갔으면 몰랐을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면... 하고 생각하니 관자놀이에 힘이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린 지 한 시간만에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열세 시간을 가야 하는 페루 쿠스코 Cusco로 출발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오래도록 차 안에 있는 것은 충분히 단련이 되었고 이것저것 할 일도 많아서 장거리 이동은 나쁘지 않았다. NC버스는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나름대로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식사까지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밤 이동과 달리 낮의 이동은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사실 비행기보다 더 값지다는 생각이었다.
볼리비아는 내내 힘들고 척박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페루로 가까워지면서 산에 풀들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리같이 보이는 작물을 경작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고 그럴듯한 집도 나타났다.
세 시간쯤 지난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라는 티티카카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것이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넓고 푸른 모습에 넋을 놓았다. 남편도 티티카카만 보러 다시 오고 싶다고 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했다.
우리는 그곳에 내렸다.
버스가 친절하게 관광할 시간을 주는 것이라면 참 좋겠지만 출입국 신고를 하기 위한 정차였다.
그런데 페루도... 참 추웠다...
여러 대의 버스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지만 작디작은 규모의 출국 사무소는 그들을 수용하지 못해 건물 밖으로 긴 줄을 내야만 했다. 오히려 햇빛을 받으며 기다린 것이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다가오지 않는 우리의 차례를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 리노가 헤어지며 챙겨준 막대사탕이 지루함을 달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출국신고를 마치고 나와 티티카카 호수를 잠시, 정말 잠시 바라볼 수 있었다. 하늘빛을 받은 호수 위로 바람이 불자 마치 은빛 물고기들이 떼 지어 지나가는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언제고 다시 와야 할 곳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언젠가'를 위한 답사 여행쯤으로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티티카카 호수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 페루 입국신고까지 마치고 버스에 다시 올랐다.
해가 져 어두운 쿠스코였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시내의 실루엣이나 불빛만 봐도 볼리비아보다는 훨씬 번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찻길 한복판에는 잉카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파차쿠텍 Pacha Kutiq의 동상도 멋스럽게 불빛을 받고 서 있었다.
버스터미널은 아홉 시가 넘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노선을 홍보하는 사람들, 손님을 찾는 택시기사들의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우리는 환전소를 찾았는데 환전소는 보이지 않고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 듯하나 결국 자신의 택시에 태우려고 하는 기사들만 줄줄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들을 뿌리치고 터미널 밖 큰길로 나왔다. 터미널의 택시는 세 배도 넘는 금액으로 바가지를 씌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길로 나선 것이었다. 세 배라고 해봐야 오천 원 정도 되는 금액이겠지만 알면서도 굳이 돈을 더 지불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와 같은 버스에서 내린 외국인들이 진작에 터미널의 택시를 타고 하나 둘 떠나는 동안 우리만 어두운 골목을 지나고 큰길로 나와 언제 올지 모르는 택시를 기다리는 수고를 감수하기는 해야 했다.
다행히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6 솔, 2,200원쯤 되는 적정한 가격을 제시한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기사는 친절하게 우리가 지나고 있는 길과 주변의 볼만한 곳까지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내린 '아타와카마 Atawakama' 호스텔은 여행사며 유명 숙소가 모여있다는 '아르마스 Armas' 광장과는 좀 거리가 있었고 '산 페드로 San Pedro' 광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시간이 늦은 밤에 여행사가 문을 열었을 리 만무해서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이드로 일렉트리카행 미니버스라도 예약을 하려면 여행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이 호스텔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짐을 며칠 보관해줄 수 있는지, 마추픽추를 보고 돌아와 묵을 방이 있는지, 또 세탁이 가능한지 물을 것이 많아 주인이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선택의 조건이었다.
열 시가 거의 다 되어 들어간 호스텔에서 그 모든 질문을 다 던졌고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미니버스 예약과 마추픽추 입장권 구매, 가는 길의 식사와 아구아스 깔렌떼스에서의 숙소, 돌아오는 기차와 미니버스까지 모두 해결해주었다. 가격도 인당 140 달러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세탁이며 이틀 뒤의 숙박 예약까지 모두 해결하고 나니 무서운 허기가 찾아왔다. 뭔가 많은 것이 있었을 것 같은 산 페드로 광장의 시장은 이미 파장을 했고 시장 건너편에 있는 '오리온 Orion'이라는 대형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좀 샀다. 그 아래 식당에 몇 조각 남지 않은 먹음직스러운 치킨까지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쿠스코의 입성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성공적이었고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평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 잉카콜라마저도 마실만 했다. 짜릿한 박카스의 맛쯤 되는 것 같았다. 한 가지 흠이라면 실온 보관이라 미적지근했다는 것 정도...
걱정이 크고 기대가 낮았던 만큼 만족도가 높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볼리비아의 험난함이 아니라면 뭐든 다 괜찮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모두가 잠든 조용한 숙소 마당에 숨죽이고 앉아 기름진 치킨을 싹싹 먹어치운 후에야 쿠스코로의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