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육체와의 균형 맞추기
중고서점에 다닌 지 벌써 9개월. 항상 고객으로만 이용했던 공간에 직원으로 일하는 경험은 새로웠다.
처음으로 서비스 직군에 몸 담아 몰랐던 감정을 느꼈다. 이전보다 복잡해진 결제 시스템(삼성 애플페이, 페이코, 카카오 네이버페이, 문화상품권, 입학지원금 등)에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고객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에 기쁨과 보람이 있는 걸 알았다. 이래서 서비스직을 하는구나…! 그전까지는 서비스 직군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단하다고 보거나(보통 진상을 대하거나 무조건적인 봉사 정신을 생각했다) 단순 업무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일을 가볍게 생각했다. 단순 육체노동에서 오는 정갈함도 좋고, 또 고객을 대할 땐 정서적 교류가 필요하니 마냥 육체적인 일이라고만 할 순 없기도 하다.
잡지사에서 일할 때 너무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 나머지,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진짜 박스 포장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에 만난 회사 다니는 두 명의 지인도 내게 똑같은 소릴 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 중에는 진짜 박스 포장이 있다. 온라인 주문을 한 고객에게 책을 박스에 포장하는 일이다. 하루에 적으면 50권 많으면 150권 내외로 함께 포장을 한다. 그 시간이 꽤나 재밌고 스태프들도 과거 온라인 서비스가 없었을 때는 무료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주문한 책을 뽑아와(집책 리스트가 따로 있다) 분류해 포장하는 일. 박스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지도 몰랐다. 나는 같이 박스 포장하는 스태프들에게 ‘이건 박스 명상이야’라고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 반복적인 행위는 뇌를 맑게 한다(!)
하루에 12시간씩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나는 어느 순간 육체노동 반, 정신노동 반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중고서점에서는 집책 리스트를 들고 책을 뽑아오기도 하고, 또 매입된 책들을 카트에 잔뜩 담아서 서가에 다시 꽂아놓기도(입책) 해야 한다. 서점에서 이 두 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 외에 굿즈나 앨범과 같은 물류에서 충전이 들어오면 가져오고 그 물건을 다시 라벨링 해서 굿즈장과 서가에 진열한다. 저녁 타임에 일한 시절에는 오후 12시부터 5시까지 정신노동을 하고, 5시에 저녁을 먹고, 6시부터 10시까지 서점에서 일했다. 집책 리스트를 뽑아서 서점의 매대를 돌아다니는데 소화되는 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은 오 좋은데?
지금은 오전조로 바뀌어 소화가 되기보다는 배고픔을 느끼고 있지만, 게으른 나를 강제로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아주 최상의 조건이다. 일어날 때는 피곤함에 찌뿌둥하지만(요즘은 상쾌한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신경 쓰고 있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할 때면 여기가 시골은 아니지만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가 되는 기분이다. 교통비를 아껴서도 좋고, 특히 퇴근할 때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나는 굉장히 사치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다.
처음에는 동네 책방을 가기 위한 스텝으로, ‘길면 6개월 정도 일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장점이 많아서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로 임금. 하루 4시간 근무인데 알바가 아니라 정규직 고용이라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시급보다 훨씬 높다. 같은 동네 책방과 비교하면(영세한 동네 책방은 거의 파트타임으로 구하거나 정규직이어도 이보다 더 낮은 걸로 알고 있다 ㅠㅠ) 게다가 4대 보험까지 적용되니 나에겐 일거양득인 셈이다. 동네 책방 자리가 나도 쉽게 옮기지 못하는 이유다(그만큼 마음에 드는 서점이 안 나타나기도 했다)
두 번째로 단시간 근무자라는 점. 4시간 근무자의 경우 오전조는 9-13시, 저녁조는 18시-22시다. 나의 생체리듬 상으로는 저녁조가 훨씬 더 잘 맞았지만 규칙적인 생활이 어려운 나는 삶의 루틴이라는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오전조를 희망했다. 다행히 오전 4시간 근무자가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내가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들 오전 4시간 근무자를 가장 부러워한다) 오전 4시간 근무자의 장점은 오후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4시간 근무자인 나는 9시 근무를 시작해 오후 1시에 퇴근한다. 오후 1시에 모든 공적인 일이 끝나는 기분은 매일 짜릿하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말했듯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이루는 일 중 육체를 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노동만 이어오던 내가 최근 1년 육체노동을 경험하면서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물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중에 어떤 게 힘든 것 같아? 둘 다 경험해 본 유일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정신노동이 더 힘든 것 같아. 육체노동은 깔끔해. 나는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당차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그녀가 멋있었다.
시골 살이에서 가지농장 체험을 하면서 육체노동의 고통을 알았던 나는 정보화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농업 사회나 산업이 중심이었던 사회에 태어났으면 과연 내 몫은 했을까? 그래서 어떤 육체노동이냐 어떤 정신노동이냐에 따라 더 힘든지는 다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그 두 개가 조화를 이루길 바라고 있다.
아무튼 내가 이 일을 1년 하고 그만둘지, 아니면 2년을 하고 그만둘지는 모르겠다. 매번 생각이 수시로 바뀐다. 어쨌든 하나를 놓아야 또 다른 새로운 것이 들어오니까. 그 타이밍을 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