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어느 시대에 누가 돈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지적할 수 있었을까. 문제의식이라도 가진 자가 있었을까? 여전히 요즘도 예술은 예술, 돈은 돈으로 이분법이 만연하다. 그녀의 거침없는 주장과 발언은 당시에 얼마나 큰 화제를 일으켰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는 걸까.
자기만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이 픽션이 섞인 에세이에는 흔히 모두 알다시피, 자신만의 방과 고정된 수입이 한 인간을, 한 예술가를 어떻게 해방시키는지 서술한다.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 그녀는 가난한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 도보 여행이나 짧은 프랑스 여행, 누추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족의 압제와 권리 주장으로부터 보호해 줄 독립된 숙소 등 그녀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위의 책, p. 83)
불과 2세기 전까지 여성은 혼자 여행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전 세계를 누비면서 유튜브를 찍는 여성 여행자들을 본다면 울프는 어떤 감정이 들까. 나는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두고 여태껏 어떤 실체 있는 물리적 공간을 상상해 왔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이란, 독립된 숙소는 언감생심, 여성이 홀로 있는 시간마저 허락지 않았던 시대에 그것이 가능한 시공간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기에 나에게 독립된 숙소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이렇게 혼자 카페에 나와 나의 생각에 몰두하고 흐름이 끊기지 않게 이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프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고, 현대 사회인 지금 더 욕심 내자면 그녀의 말마따나 ‘가족의 압제과 권리 주장으로부터 보호해 줄’ 독립된 숙소는 완전한 ‘자기만의 방’의 표상일 것이다.
19세기 초까지 여성은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여성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자 셰익스피어,라고도 일컬어지는 제인 오스틴은 응접실에서 볼만한 일들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
울프는 말하길 여성 소설가들은 가끔 탄생했지만 여성 시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소설보다 시가 더 생각의 응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던 여성은 생각의 흐름이 끊어져도 바로 이어 붙여나가기 쉬운 소설이 더 쓰기 쉬웠을 것.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고 활용한 사람이 제인 오스틴이었다.
다시 현대, 나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개중엔 나는 독립만 하면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의 공간에서 내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독립을 한 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잠을 더 열심히 잘 뿐(이것도 중요하긴 하다) 집에서 글을 쓰는 날은 손에 꼽았다. 오히려 집에 있다가 카페에 나가야만 글을 쓰는 몸이 된다.
굳이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보자면, 집이 생활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더 많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집의 기능을 총 세 가지로 나누면 이렇다. 잠과 휴식을 취하는 쉼의 공간, 끼니를 때우는 식사의 공간,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창의적 혹은 생산적 활동을 하는 작업의 공간이다. 그런데 크면 6평 정도 되는 원룸에서 그 모든 기능을 수행하기란 약간 버겁다. 변명이라고 하면 공간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한 공간에서 나눠하기에 정신적 에너지가 더 든다. 그렇기에 자기만의 방을 놔두고 돈을 내고 카페에 가서 일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원룸을 얻으니 투룸에 가고 싶다. 투룸이면 그곳에서 글이 더 잘 써질까? 충분히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원룸에서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투룸을 얻기 전까지 가능한 나의 원룸에서 최대한 공간 분리를 적용해보려고 한다. 다음 원룸을 얻으면 일단 밥상과 책상 각각 한 개씩 두려고 한다. 각 상의 기능을 분리해 몸을 그곳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눕고 싶은 침대를 없애려고 한다. 대신 잘 때는 두꺼운 이불을 깔아 두고 지낼 생각이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으로 이부자리를 개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사실 이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생활의 공간을 작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의도적 행위,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효능감을 높이려는 시도다.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일로 ‘이불 정리’가 있다. 나도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사소한 습관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이불 정리가 무슨 효용성이 있단 말인지. 알고 보니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더 가볍고 사소한 일을 수행하면 자기 효능감이 올라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과연 내가 귀찮음을 이기고 매일 그 일을 할지 의문이지만 3개월 간은 습관이 베도록 행해보고 싶다. 어렵게 마련하고 얻은 나만의 방. 과거의 여성은 물론 현대의 여성도 소유하기 쉽지는 않은 물질이다. 돈이라는 재화를 지불하고 얻은 나만의 자유로운 시공간.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지내는 동안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싶다.
더불어 나는 자취만 하면 저절로 내가 밥을 손수 잘 지어먹는 인간이 되는 줄 알았다. 크나큰 오산이었다. 배달 음식과 매식으로 연명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래도 부모와 같이 살았던 때보다는 내 손으로 해 먹는 시간과 요리가 늘어났다.
장점은 본가에 가서도 반찬 불평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됐다는 것. 시장과 마트에서 다 사온 반찬이라도 그 앞에 차리기까지 수고를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이 차려주는 밥이 제일 맛있는 걸 혼자 살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먹고 나서 치울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부모와 살 때는 내가 먹은 밥그릇 외에 다른 걸 잘 치우지 않았는데 자취방에서 그러니 집안이 난리가 났다. 아무도 치워주지 않기에 비닐 쓰레기며 음식물의 잔해며 모두 내 몫이다. 이제는 먹고 나면 뒷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걸 할 줄 아는 인간이 됐다는 것. 누군가의 희생에 덜 의지하고 독립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 조금 더 성장하고 나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생활의 근육을 늘리고 싶다. 혼자서 잘해 먹고 잘 치우는 사람이 될 때야 남과도 그런 함께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요리하고 청소하는 나에게 더욱더 관심을 가져 주려고 한다. 미미하지만 작은 변화들이 쌓여 또 다른 나를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변화된 나를 상상하는 건 기분이 좋기에 앞으로 자취 생활을 계속 이어나간다. 내 몸 먹이고 누일 힘이 내게는 있다는 걸 스스로 실험하고 증명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