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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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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해 Dec 27. 2022

내 삶의 주체성 찾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포스터부터 내 스타일이다. 마치 화려한 색채의 티벳 불교의 만다라가 생각난다


B급 감성 멀티 버스 영화. 이름도 어려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지금도 영화 제목 다시 말하라고 하면 못 말하겠다).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챙겨보는 타입은 아니지만 입소문으로 좋다는 이야기를 두 명 이상에게 들으면 관심이 간다. 이 영화도 그런 경우였다.

스포를 좋아하지 않기에 자세한 내용이나 컨셉도 모른 채로 상영관에 갔다.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도 모른 채로 가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를 보고 후회한 적도 많다(이제 장르 정도는 확인하고 가자…) 조금이라도 아는 내용에 기반해 상상하면서 남들보다 많은 기대를 하는 건지. 그래서 일말의 스포도 거부한다.

이 영화는 대강 드라마적 요소가 있을 거란 기대 하에 갔다. 친구가 평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도 했고, 모녀 관계에 대한 부분도 좋았다는 이야기에서였다. 그런데 웬걸 SF, 코미디, 액션, 드라마를 넘나드는 이 복합 장르였다. 눈요기 할 것들도 잔뜩. 영화를 정신 없이 따라가다보니 끝났다. ​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의 하나인 만다라(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점은 참신하다는 것이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영화의 스토리와 형식이라는 사실.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은 혼방한 자유로움. 이것저것 얼기설기 섞어놓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하나의 멋진 작품을 본 것 같은 기분이랄까.

복잡해보이지만 그 안에 분명한 질서가 있는 만다라처럼, 영화 안에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질서를 부여하고, 메세지와 감동을 자연스레 녹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졌다. 우선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홍콩 배우 양자경이 역할을 맡은, 에블린은 미국에 남편과 함께 이민 와 세탁소를 차려 하루 하루 힙겹게 살아간다. 그녀의 남편 웨이먼드는 자주 엉뚱한 소리와 행동을 하는 등 세탁소 운영에는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블린은 젊은 시절,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을 따라간 것에 약간의 후회도 있다.

하나밖에 없는 딸, 조이는 동성애자다. 에블린은 딸의 정체성에 대놓고 거부하지 않지만 반감은 있다. 서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긋나고 상처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혼 서류를 받는 에블린. 자신이 줘도 모자를 판에 자신이 왜 그 서류를 받아야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능력한 남편과 툭툭거리는 딸, 힘겨운 세탁소 운영. 세무당국의 조사로 가족들과 함께 담당자를 만나러 왔는데, 갑자기 남편이 이상하다. 자신은 남편이 아니라 알파 웨이먼드라고 주장하며 이상한 이어폰을 건네는데. 에블린에게 당신은 세상을 구할 사람이라며 그들을 공격해오는 이들과 엄청난 싸움을 시작한다. ​​​



여기서 영화의 첫 번째 매력이 시작된다.








첫 번째 매력, 멀티버스를 통한 주체성 찾기

(다른 나를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멀티버스란 다중 우주라는 뜻으로, 영화에서는 같은 에블린이지만 다른 삶을 사는 에블린들이 나온다. 톱스타 영화배우 에블린, 요리사 에블린, 동성애자 에블린, 무협고수 에블린 등.

우리는 다른 모습의 나를 상상해본 적이 있을 거다. 그런 나를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일지도 모른다. 우린 현재 나보다 나은 나를 늘 욕망하며 꿈꾼다. 멀티버스라는 툴을 빌려 나타난 다른 에블린의 모습은 다른 삶을 꿈꾸는(이때 이랬으면 달랐을까-와 같은) 욕망의 반영 같았다.

주인공 에블린은 멀티버스에 접속해 다른 에블린의 삶을 경험한다. 개중엔 자신이 원했던, 혹여나 남편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이루었을지도 모르는 톱스타 에블린도 있었다. 엄마가 아닌, 딸이 아닌, 아내가 아닌 그냥 나 자신을 경험한 에블린은 그곳에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영화 배우에서 세탁소 주인의 현실로 돌아온 에블린. 그동안 이 힘겨운 타지에서 가정을, 세탁소를 어떻게 유지하고 꾸려왔는데 너무나 억울했다. 하지만 이제 남편 웨이먼드에게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는 에블린은 없다. 웨이먼드의 눈을 똑바로 보며 좋다! 이혼하자!고 당당하게 고함치듯 말한다.

앞으로 나는 나로 살 거라고 선언하는, 통쾌감을 선사한 부분이었다.








두 번째 매력, 이상한 행동이 우리를 구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멀티버스 세계에 접속해 ‘다른 정체성의 나’(예를 들어 무협 고수 에블린)가 가진 기술로 악당들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때 다른 내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엉뚱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엉뚱하고 이상할수록 더 강한 내가 된다.​


이러한 설정은 심각한 상황과 영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관객들로 하여금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하지만 단지 감독이 웃음 포인트로만 이러한 설정을 의도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동시에 여기에 감독이 주는 메세지가 있다고 느꼈다. ​


그건 바로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이상한 행동이 더 나은 삶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아래 생산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효율을 추구해야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나아진다고 믿는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이 세상에서 시간 낭비라고 생각이 드는 일, 비효율적인 일, 나의 이익과 연결되지 않는 일은 좀처럼 시도하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엉뚱한 행동’에는 단순히 시간 낭비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건 무수한 가능성 있는 존재의 내가 되기 위해 ‘찔러보는 과정’이다. 어디에서 잭팟이 터질지 모르는 것처럼.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사람 중에서 목표를 세워 착실한 행동으로, 해냈다는 성공담도 있지만, 어떤 목표를 위해 이것을 하다가 우연히 저것을 해버렸는데 저것 때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자주 회자된다.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는 다양한 나를 찾을 수 있고, 그 다양함 속에서 진짜 나에게 적합한 나와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 영화 속 에블린처럼 이상한 행동이 우리를 구한다.








세 번째 매력, 가족의 해체와 통합

​​

영화의 세 번째 매력은 내가 이 영화에 반하게 된 결정적 포인트이다. 바로 전통적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통합을 보여준 것. 기존의 전통적인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가족 내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딸 조이는 시대의 악당 조부 투바키가 되고, 엄마는 악당을 무찔러야 하는 영웅이, 아빠는 영웅의 조력자가 된다.

악당과 영웅으로 설정된 이 세계 안에서 그들은 대립한다.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를 딸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짜 딸 조이의 몸에 들어가 조종하는 나쁜 인물로 물리쳐야 한다. 여기서 영화는 전통적인 모녀 관계, 엄마는 딸에게 무한한 사랑과 헌신을 내어주고 딸은 이에 감복하여 따르는 룰을 깨버린다.​

이렇게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로 피 터지게 싸우는데 그들의 이전 모습과 겹쳐 보인다. 엄마와 딸이었을 때도 그들은 살벌하게 싸웠다. 서로를 상처입히는 행동과 말들로. 과거에는 ‘애증’이었는데 이제는 ‘증’만 남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이 어이없는 설정에 뭐지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설정 안에도 서사가 있다. 조부 투바키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또 다른 우주의 에블린의 욕심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모든 유니버스를 하나의 몸 안에 투과시킨 덕에 어마무시한 힘을 갖지만,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고통스럽다.

고통의 이유는 허무다. 강력한 힘으로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부 투바키는 세상이 흥미롭지 않다.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부 투바키는 멋대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 세상을 파괴하고 에블린을 죽이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에블린과 조부 투바키의 싸움은 혹여나 어느 한 쪽이 치명적인 상해를 입거나 죽지 않을까, 아슬아슬했지만 분명히 통괘하기도 했다. 에블린에 대한 조부 투바키의 강력한 원한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자행하는 억압과 요구와 맞물려 있는 감정이었고, 조부 투바키의 결투 신청은 부모의 억압에 대한 도전이자 해방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싸움은 부모-자식의 문제를 다른 시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해소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네 번째 매력. 쓸모 없음의 재확인

(feat.웨이먼드의 재발견)


찾아보니 이 영화는 오마주를 많이 했는데, 이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콩 배우인 양조위의 출연작, 화양연화의 오마주였다. 어쩐지 장면의 분위기가 너무 좋더라니.

영화의 다섯 번째 매력은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엉뚱한 행동만 일삼는 무능력한 남편 캐릭터가 갑자기 신비한 능력이 있는 알파 웨이먼드와 부유하고 점잖은 웨이먼드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에블린은 다시 현실 세계의 세탁소 주인으로 평범한 남편의 아내로 돌아온다.


​다중 우주의 에블린을 경험한 지금의 에블린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아등바등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세탁소 운영도 그녀에게 다 필요 없다. 조부 투바키처럼 현실을 냉소한다. 세무 조사원에게 쩔쩔매던 에블린은 없다.

에블린이 세무 조사원에게 대항해 세탁소가 망하기 직전이 된 상황. 남편 웨이먼드는 어렵게 일군 일상을 파괴하려는 에블린을 진정시킨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의자에 앉힌다. 그리고 그는 세무 조사원에게 다가가 차분히 대화를 시도한다. 그런 모습을 쓸때 없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바라보는 에블린.


​그런데 세무 조사원이 다시 그녀의 가족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을 하고 떠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에블린은 납득할 수 없다. 어떻게 했냐는 에블린의 물음에, 웨드먼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또 다시 에블린은 머리를 띵하게 얻어 맞는다. 다정함. 그녀는 그것을 생계에 지쳐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 사실 남편 웨이먼드가 이혼 서류를 건넨 건, 자신을 보고 이야기하지 않는 에블린에게 준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다. 영화는 관계의 화해를 이루는 조건으로 ‘다정함’이라는 메세지를 건넨다.

무능력해보이는 웨이먼드는 사실 이면에 다정함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사람을 한 가지의 잣대로만 보지 않으려는 시도가 좋았다. 사실 현실 세계의 에블린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구하는 사람으로 낙점된 이유가 현재의 에블린이 가장 보잘 것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모르겠어? 당신이 실패의 길을 택했기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한 거야. 다른 인생으로 가는 길은 보통 몇 개 안 돼. 그런데 당신은… 무엇인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에블린이라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겠는 대목. 관객인 나도 어이 없어 웃음이 나오는 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이야기인 건 분명하다.

세상이 너를 별로라고 말해도 그건 너가 진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 너는 수많은 잠재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이며, 너만이 가지고 있는 진짜 능력이 있으니 그걸 발견하고, 타인을 향해서도 그걸 알아주면 돼. 사회적 신분, 경제적 가치와 같은 일률적인 잣대로가 아니라.








다섯 번째 매력, 현대적 모녀 관계의 조명

(feat.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을 차치하고 인상적인 부분을 뽑으라면 단연 이 장면이 되겠다. 우주의 한 낯선 행성에서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버린 둘, 에블린과 조이. 그들은 그저 가만히 하나의 정물로 존재하며 세상을 관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거칠고 복잡했던 세상은 단숨에 조용해진다.

시끄럽고 화려했던 영화의 장면은 소음이 없는 정적의 공간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세상과의 관계가 단순해진다. 무엇 때문에 싸웠고 어떤 것 때문에 서운했는지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다. ‘세상의 끝’ 같은 무의 공간에서 무슨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마냥, 조부와 에블린은 뜨문뜨문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응, 여기 앉아 있으면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져.”

“조이. 내가 다 망쳐서 미안해.”

“쉿. 여기서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그저 돌이 되는 거야.”


​​


어쩌면 이곳은 허무주의를 주창하던 조부 투바키의 미래적인 모습 같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영화는 정신이랄 게 없는데, 개인적으로 차분한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등장하는 결이 다른 다큐멘터리. 장르의 구분이 없는 점. 형식을 파괴하면서 형식을 새로 만들어나간다는 점, 그게 또 하나의 위트가 되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

사실 조부는 에블린을 죽이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만이라도 만들고 싶었던 것. 세상의 회의를 느끼는 조부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파괴하는 베이글 속 세상으로 없어지려 한다. 그런 조부를, 아니 조이를 에블린은 포기하지 못한다. 붙잡고 또 붙잡는다.

이때 다시 현대의 모녀 관계로 영화는 장면을 넘나든다. 엄마에게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받아 떠나려는 조이. 그런 딸을 붙잡는 에블린. 사랑하는데 자꾸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의 지리멸렬한 관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 아무리 너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파멸이라면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어!

결국 조부는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고, 돌이 된 조부는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다. 그런 조부를 바라보던 에블린. 딸을 따라 자신도 함께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다. 그 말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함께하고 싶어. 너가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응원하고 지지할 거야”라는 말로 들린다.

함께한다는 것. 좋지만 쉽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의 모양을 가지고 태어났다. 서로를 소유하고 싶어하고 내 마음처럼 되기를 원한다. 각자가 가진 뾰족한 모양에 부딪혀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계속 함께하고 싶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두면서 함께할 수 있을 거다.






​​​

이 영화의 결론.

허무주의 속 시간은 유한하고, 순간은 소중하다

경제적으로 가정을 이끌 능력이 없는 남편 웨이먼드.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에블린은 복장이 터진다. 하지만 톱스타 에블린이 되어 만난 웨이먼드는 멋진 신사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돈도 많은…. 그녀는 차라리 과거에 그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서로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꿈을 이룬 뒤 만난 그들은 다시 과거처럼 설렌다. 하지만 마음처럼 웨이먼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에블린. 둘은 재회에 실패한다. 톱스타 에블린은 절망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삶도 완벽한 삶은 아니구나. 그런데 그때 신사 웨이먼드는 일격의 한 방을 날리고 그녀를 떠난다.



“만약 세탁소 운영을 하며 궁상 맞게 산다고 해도, 평생 당신과 함께하는 삶을 간절히 원했다고”



이때 에블린은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이를 경험한 에블린. 삶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조부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허무하지만, 허무하더라도 나에겐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순간이라 무엇보다 소중하다. 조이는 에블린의 진정한 사랑을 절감하며 모녀 관계의 회복, 흩어졌던 가족의 통합이 비로소 시작된다.




​​​

우리 시대의 과제는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뻔하지 않게 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나와 있고 이야기되어 왔다. 이미 세상에 익숙한 메세지를 어떻게 전달하여 울림을 줄 것인가, 느끼게 할 것인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성공한 영화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관객들을 몰다가 뒷통수 빡데리는 감동과 메세지를 주어 더 오래 기억과 여운이 남는다.


화해와 통합의 도구들도 따듯했고, 이민자 가족과 동성애자를 극의 전면에 내세운 시도도 의미 있었고, B급 멀티버스 영화라는 소재도 참신했다. 오랜만에 새로운 영화를 본 기분. 이동진 평론가도 이 영화를 5점 만점에 5점을 주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대중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잘 보여준 영화인 듯 싶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모든 것은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일어난다. 멀티 유니버스 영화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난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디에나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의 소중한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기 위해 오늘도 분투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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