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다른 존재가 되어 살아간다면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8권 58.

by 안현진

네가 죽어서 네게서 의식이 없어진다면, 사후에 네게 그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너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8권 58 중에서



어젯밤, 헐크로 변신했다.

잘 놀고, 잘 먹고, 잘 쉬다가 이제 잘 자기만 하면 되었다.

자러 들어가기 전 윤우 가방을 봤다.

안전 덮개가 없다.

1학년 때 받은 것은 찢어져서 버렸다.

맨 가방으로 메고 다녔는데 알림장에 계속 안전 덮개 하고 다니기를 써왔다.

선우 때처럼 2학년이 되면 새로 나눠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근처 문구점에도 팔지 않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사는 김에 선우 것도 새것으로 함께 구매했다.

윤우는 하고 간 첫날부터 잃어버리고 와서 놀이터에서 찾아왔었다.

새 안전덮개를 하고 간지 3일 만에 또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서 벗겨진 건지, 똑같은 걸 써도 왜 윤우만 자꾸 잃어버리는지.

옷도 벗어두고 두 번 잃어버리고 온 적이 있다.

자려고 누운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화낼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버럭 해버렸다.


알람만 계속 끄다가 아침 할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아이들이 등교한 후에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설거지하고 집 치우는 중간중간 은서 책 읽어주고, 색칠도 했다.

머리는 계속 아프고, 빨래는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늦게 일어난 탓에 해야 할 일은 밀려 있고, 아이는 계속 엄마를 찾았다.

같이 스티커 붙이자는 걸 미루고 거실을 정리했다.

사인펜 뚜껑을 안 닫고 열어놔서 버리게 됐다고, 왜 뚜껑을 자꾸 안 닫냐고 말했다.

자긴 스티커 붙일 건데 엄마가 뭐라 해서 안 붙일 거라 한다.

스티커 붙이는 게 엄마랑 무슨 상관이냐고 엄마는 안 붙일 거라고, 은서 혼자 하라고 딱딱하게 말했다.

삐죽삐죽거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린다.

나도 참... 또 내 감정이 은서에게로 흘러갔다.

다 내려놓고 은서가 하자고 하는 한글 놀이를 옆에 딱 붙어서 했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 히읗까지 쓰고, 동그라미 하고, 선 긋고, 스티커 붙이며 놀았다.

힘들 법도 한데 놀이로 받아들여서인지 앉은자리에서 한 권을 뚝딱 풀어 버렸다.

간식도 먹고, 재밌게 놀다가 은서는 아까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 사이 나도 두통이 사라졌다.


은서가 제법 한글을 따라 쓰고 관심도 보인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선우, 윤우와 함께 하는 글쓰기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만의 독서 문화를 정착시키면 된다.

요즘 계속 육아와 글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로서의 내가 무너지면 글 쓰는 나로도 정착할 수 없다.

오늘 문장에서 말한다.

죽으면 의식이 없어지거나 다른 의식으로 바뀐다,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 살아갈 테니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는 모를 거라고.

그렇다면 이승에서 잘 살다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이승에서 잘 살았다면 사후 평판은 신경 쓸 게 없다.

어제 윤우와 오늘 아침 은서에게 한 행동을 반성하며 생각했다.

타인보다는 가족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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