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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Jul 10. 2024

남편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는 일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0권 28.

모든 일어나는 일들에 복종하는 것은 만물에게 내려진 절대적인 명령이다. 다만 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도록 허락되어 있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0권 28 중에서



팔, 다리가 무겁게 느껴질 만큼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여름이 되면 더욱 심해지는 체력 고갈 신호가 아침부터 찾아왔다.

오늘까지 할 일을 떠올리며 얼른 집을 치운 뒤 책상 앞에 앉았다.

은서는 책을 읽어 달라 가져오기도 하고, 퍼즐을 맞추기도 하고, 오빠 방에서 혼자 문 닫고 조용히 놀기도 한다.

그 사이 남편도 퇴근하고 돌아왔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백지와 마주한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은서가 보는 paw patrol도 한 번씩 호응하며 보고, 쉬고 있는 남편에게 가서 괜히 말 붙였다 나오기도 하고, 부엌에 들어갔다가 내가 쓰지 않은 그릇을 뒷정리하고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백지상태다.


침대에서 오징어 다리를 먹고 있는 남편에게 다시 찾아가서 말했다.

“침대에서 안 먹겠다고 해놓고 또 먹고 있네요!”

남편은 전혀 타격감 없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자꾸 손이 간다고, 이젠 그만 먹어야지 말하며 누워있다.

다시 거실로 나와 한두 줄 썼다 지웠다 하다가 일어섰다.


남편에게 이북 리더기가 안 된다고, 좀 봐달라고 했다.

급한 건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다운 받은 게 이북 리더기엔 안 보인다고 말하며 켰는데 다시 하니 된다.

이틀 전 읽고 싶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퀸의 대각선》도 실행이 잘 된다.

“어?! 되네! 신경 안 썼겠지만 잘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이번에도 심드렁하게 알겠다고, 자긴 잘 될 줄 알았다고 말한다.

유튜브를 보며 누워 있는 남편 옆에서 잠깐 이북 리더기를 보다가 껐다.

“이럴 때가 아닌데… 뭐라도 써야 해!”

침대 머리맡에 책 두 권을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으응? 뭐라구?” 나른하게 말하는 남편 곁을 떠나 거실로 나왔다.  


말 붙이고 장난치고 싶은 어른이 집에 있을 때, 오늘 할 일이 늘어지기 십상이다.

그런 나를 알기에 얼른 정신 차리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나는 이성을 지닌 존재이니까,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니까!

같이 늘어져 있고 싶은 유혹을 꾹 참고 어떻게든 오늘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

오늘 글은 홀로 유혹에 맞서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어떤 여자의 독백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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