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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과 반대된 하루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1권 19.

by 안현진


네가 너의 이성을 책망해서 나아가지 못하게 해야 할 네 번째 잘못된 길은, 너의 신적인 부분이 너의 열등한 부분이자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부분인 육신과 그 조잡한 움직임에 져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1권 19 중에서



아직 막내가 일어나지 않은 아침.

두 아들이 학교에 가고,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은서가 자는 틈에 퇴고를 해야겠다 싶어 볼펜을 들었다.

‘좋은 책을 읽기보다 안 써지는 글을 쓰자’라는 조언을 떠올리며 퇴고부터 하려고 했다.

두 페이지를 읽고 책을 집어 들고 말았다.

어제 서점에서 사 온 책이었다.


은서가 자는 안방이 아닌 아이들 방으로 갔다.

선풍기를 고정해 놓고, 선우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책을 보다 살짝 잠이 들었다.

배에 엎어둔 책을 다시 읽어 나갔다.

오전인데도 어둡고, 종알거리는 은서 소리도 없이 책 읽는 이 시간이 평소와 달랐다.


삼 남매가 모두 모인 오후.

오전과 마찬가지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셋이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장난치고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또 풀리지 않는 글 대신 책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

베개 두 개를 등 뒤에 겹쳐서 앉았다.

안방에 들어오기 전 ‘조금 조용히 해서 놀아라, 쿵쿵거리면 안 된다’ 말하고 왔는데 어느 순간 조용하다.

내가 스르륵 누운 게 먼저인지, 조용해진 게 먼저인지 모르겠다.

안방을 오가며 내게 독서록과 일기장을 검사받던 아이들에게 비몽사몽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부탁도 했는데 일어나지 못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이상한 상태로 두 어시간 흐른 것 같았다.


거실에선 엄마의 허락으로 세 아이가 졸졸이 tv를 보고 있었다.

전날 축구 보고 자느라 늦게 자기는 했지만 이렇게 여러 번 잠들기 있나.

체력 앞에 쉽게 무릎 꿇은 스스로가 어이없다.

오랫동안 글을 쓰기 위해선 루틴과 인내, 절제가 필요하다고 어느 작가가 말했다.

내 생활을 보면 이 세 가지가 많이 허물어져 있다.

이사 준비, 육아, 개인 사정 등을 핑계 삼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잃었던 루틴도, 자신 있던 인내도, 좀 더 노력이 필요한 절제도 다시 되찾아가는 중이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읽기와 쓰기, 일상의 균형을 잡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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