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 중 같은 종족이면서도 각 개체의 차이가 가장 많은 존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인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인간은 어쩌면 모두가 다른 종족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내 자신이 괴짜의 축에 낀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자신에게 몇 가지 철칙을 정해놓는다.
그리고 그 철칙을 웬만하면 어기지 않으려 한다. 이 규칙들은 같은 날에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날 때, 하나씩 정해왔다. 그 중에는 정말 자질구레한 것도 많다.
오늘 식사는 몇 시에 한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쓴다,
전철을 탈 때는 몇 번째 칸에서 탄다 등등.
여담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시고 있다.
이런 시답지 않은 철칙 말고도, 나름 의미 있는 철칙도 있는 편이다.
내가 싫어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도 절대 하지 않는다. 내 의견보다는 상대의 의견에 맞추어준다.
말을 뱉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한다,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시하는 철칙이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내 대부분의 철칙들은 이 하나에서 파생되었다.
이해. 이해하려 할수록 더 힘든 것이 어쩌면 이해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여도, 무연 중에는 자신이 밑바탕으로 깔리기 마련이다.
애초에 객관이라는 단어에 모순이 있다. 객관적이란 것 또한 어떠한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도 어차피 다른 누군가가 만든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러기에 세상은 주관적인 의견뿐이다.
억측에 불가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이 철칙을 세우게 된 이유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흐릿하다.
그래도 어느 시기부터 해왔는지는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막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상대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학창 시절에 수업을 들을 때 생각했다. 내 앞의 선생님은 과연 무슨 생각으로 학생들을 대하고 있을까. 단순히 자신의 직업이 학생을 상대하는 것이니깐? 아니면, 자신이 정말 학생을 대하는 것에 행복을 느껴서?
종종 만원 버스를 타면 생각했다. 만원 버스를 탄 사람들은 자신을 밀고 있는 옆의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 짜증이 날까. 화가 날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상관하지 않을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은 남들 앞에서 웃음을 보여주는 게 과연 행복할까. 저들이 보여주는 웃음은 진실 된 웃음일까.
이 모든 질문들에는 답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정답임과 동시에,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한 답은 누군가에게는 그른 답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른 답이 내게는 옳은 답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단지 내 자신에 대한 철칙이기에 그랬다.
그 행동이 반복되다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을 보면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지.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이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면, 그 사람은 왜 그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사람이 비난을 했다면, 왜 비난을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몇 년 동안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를 반복했지만, 당연히 지금도 정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이해하려는 행동자체가 부질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애초에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보였다. 그럼에도 계속 반복해왔다.
내가 현재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차 이해가 결여될수록 성공에 가까워진다고 하니깐.
사람들에게 이기적이게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이해는 방해가 될 뿐이다.
이해의 정의도 바뀌었다.
이해는 '기다림'이다.
이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을 이해해줄 시간. 남이 본인을 이해해줄 시간이.
지금은 이해가 '강요'가 되었다. 본인을 이해해주길 강요하고, 지금 당장 이해해주길 강요한다.
그런 '강요'를 버티다 못한 사람들은, '무시'를 선택한다.
누군가의 강요를 무시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기를 '무시'한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은 다시 본인의 이해를 '강요'한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굴레가 만들어졌다.
세상이 변하며 변질되어가는 수순에 맞추어, '이해'도 변질되었을 뿐이다.
사람은 진화하고,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 없는 것은 단칼에 도려낸다.
그것이 '이해'였을 뿐.
그렇다면 나도 이해하려는 것을 그만두고,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해하려는 행동을 이후에도 계속할 예정이다.
날 이해해줄 사람을 찾을 때까지. 내 고독을 채워줄 사람을 찾을 때까지.
세상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