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길 기도했다. 그대가 달아날까.

by 아니아즈




비가 오면, 나는 비가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비가 그치면, 내 옆의 그대가 달려갈 테니깐.




그것이 잔혹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간절히 원했다.





내 기억의 필름 속에서 '그대'의 모습이 담긴 순간들을 빛에 비춰본다.

필름 속에는 '나'라는 카메라와, '그대'라는 배우가 있다.

그 순간의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나'라는 카메라는, 대부분 '그대'의 뒷모습만을 담고 있다.






뒷모습.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대'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하늘이 맑은 날이면 햇살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산책의 시작도 과정도 같았지만, 어느새 보면 내 옆의 그대는 항상 한달음 달려가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는 잡히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그대는 매번 그렇게 멀어진 후,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듯이 아차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뒤에서 걸어오는 내게 손을 흔들며,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 손짓에는 내게 자기를 향해 어서 달려오길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손짓에 담긴 의미는 명백히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상대가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느릿하게 걸어갔다.

내가 상대의 옆에 도착하면, 그 사람은 내 팔을 꽉 끌어안고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세게 보여주었다.



상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항상 어딘가로 한달음 달려갔다.

모든 일, 모든 순간. 그 사람은 달려가고 있었다.

미래를 향해, 꿈을 향해, 목표를 향해. 매 순간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내게는 미래도, 꿈도, 목표도.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졌기에.

그것은 내게, 신화 속 이야기와 같다고 느껴졌다.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내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였지만, 우리가 같아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의 필름을 찾기 위해, 기억의 책장을 뒤적인다.




내 기억의 필름을 다시 비춰보면,

그대의 옆모습을 바라본 순간들이 부분 부분 각인되어 있다.

그 순간의 배경엔 항상 '비'가 있었다.





비가 오는 순간만큼은, 우리는 같이 걸었다.

하나의 우산 아래에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하나의 발걸음이 되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만큼은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비'라는 불행 속에서만큼은 우리는 붙어 있었다. 우리는 같았다.


그런 비가 오는 순간을 상대는 원하지 않았다. 앞으로 맘껏 달려가지 못하기에.

그런 비가 오는 순간을 나는 원했다. 그대가 앞으로 맘껏 달려가지 못하기에.


그러기에 햇살이 살갑게 다가오는 날이면, 웃으며 달려가는 그대의 모습에 햇살이 미웠다.

햇살만 없다면, 그대는 항상 내 옆에 있을 텐데. 빗 속이라면, 우리는 같은 것을 나눌 수 있을 텐데.


나는 항상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이 비가 그치지 않기를.

비가 오는 순간이라는 점이, 영원히 이어져 선이 되길 바라였다.

이 비가 그대의 발목을 붙잡기를.


나는 잔인하고, 잔혹한 사람이다.

그것이 그대를 위하는 일이 아님에도, 나는 항상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이 나를 위한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맞춰서 함께 달려갈 순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때의 나에게 그 일은,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포기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순간에 적응하고 있었다.

포기에 익숙해지면, 적응에도 익숙해진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고,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기에 나는 선택했다.

맑은 하늘 아래서 내가 달려가기보다는,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그대가 내 옆에 있어주길 택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지만,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그 헛된 믿음이 불러올 해일은 망각한 채로.




하늘이 흐릿하고 우중충한 날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옆에서 카멜레온처럼 우중충한 하늘을 따라 했다.

상대는 탁해진 얼굴로 구멍이 뚫린 듯이 빗물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빨리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그 말은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나를 스쳐갔다.

그 말속에 그런 의미가 한 방울도 담기지 않았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하였다.

유리 조각에 베여 날카로워진 나의 신경은, 말투로 표출된 후였다.


나는 상대에게 "왜."라고 짤막하게 물었다.


서리가 내려앉을 정도로 차갑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상대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내 옆에 있던 그 사람은 고개를 살짝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상대의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관통했다. 상대의 눈동자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동그란 눈동자에 담긴 나의 태도에 대한 의문. 말투에 담긴 진위에 대한 의문.

그 눈동자에 담긴 의미는 내게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척 흘려버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비가 바닥을 때리며 추적이는 소리를 냈다.

비의 추적이는 소리가 우리 사이를 감돌았다.

흘러가는 빗소리와 함께 시간이 흐르고, 상대가 입을 뗐다.


"그러면. 너는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내게 돌아온 물음에, 나는 한참을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눈동자를 크게 뜬 채로, 내 눈을 관통해서 바라보았다. 내게 답을 원하고 있었다.

답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상대의 물음에 답을 내렸다.


"어쩌려나."


그것이 내가 고심 끝에 뱉어낸 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상대의 눈동자는 말라비틀어지듯이 쪼그라들었다.


"그렇구나."


상대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짤막하게 답을 하고, 고개를 다시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 이후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구멍 뚫린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나는 도피를 택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아가기가 두려웠던 사람. 변화가 두려운 사람. 지금 이대로가 이어지길 바라는 사람.

그런 내가 못 미더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나를 기다려줬다. 내가 먼저 달려오기를.

더 멀리 달려갈 수 있음에도 멀어지지 않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내 주위를 맴돌며 공전했다.


상대는 항상 뒤를 돌아보며, 내게 손짓했다. 그런 손짓을 나는 빗줄기 속에 흘려보냈다.

상대는 항상 뒤를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상대가 부르는 소리를 빗소리 속에 묻어버렸다.


그 순간의 빗방울이 모여, 빗줄기가 되고, 그 빗줄기들이 모여,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넘쳐버린 물웅덩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 물속에서 모든 것은 잠겨 없어져버렸다.

진심도. 진위도. 모든 것은 물속으로 사라져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날 그녀와 내가 나눴던 짧은 대화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순간은 찰나이고, 찰나는 점과 같다.

그런 찰나의 점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선이 된다.

그렇게 이어진 선이 영원이 된다.

나는 우리의 찰나가 점이 아닌, 영원이라는 선이 될 줄 알았다.





내가 이어가고 싶었던 우리의 순간이라는 점은, 마침표가 되었다.




그대는 기다렸고, 나는 자리에 남길 원했다.

그 균열로부터 시작된 차이는, 우리를 단절시켰다.

자리에 남은 나로 인해, 이어져가던 점은 끊겼다.



여느 날처럼 그대는 달려갔다.

하지만, 여느 날과는 다른 속도로 그대는 달렸다.

한달음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그대는 그렇게 한달음보다 빠르게 달려갔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그날은,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이 펼쳐졌다.

나는 그런 하늘을 노려보았다. 분명 하늘에는 잘못이 없었다.

하늘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하늘이 죽도록 미웠다. 하늘을 탓하며, 하늘을 욕했다.

한참을 또 한참을 하늘을 미워했지만, 내 마음은 티 없이 맑은 하늘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마음에, 이내 나는 잘못된 대상을 미워했음을 깨달았다.

미워해야 할 대상은 나였음을.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죽도록 미웠다.






물방울이 물줄기가 되고, 물줄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하늘이 흐릿하고 우중충하다.

지금, 하늘에서 비가 오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거리는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진다.

공기가 한층 내려앉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한층 내려앉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무언가에 붙잡힌 듯 느릿해진다.

하늘이 흩뿌리는 물줄기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우산을 쓴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피해 길을 다니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비가 오는 지금, 눈에 담고 있다.


비가 옴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비가 오는 순간에 나아가지 못했던 나를 바라본다.

하늘에서 내게로 쏟아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지금 순간 작은 기도를 한다.




어서 이 비가 그치길.

비가 그쳐, 그대가 달려갈 수 있도록.




너무 늦었을진 모르지만, 그런 부끄러운 기도를 해본다.

부끄러운 기도와 함께, 진정 원하는 마음도 함께 기도해 본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면, 어딘가에서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길.

우리의 현재를 태엽처럼 과거로 돌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슬프게도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그저,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과 함께 그대의 등을 밀어주고 싶다.

달려가는 그대를 쫓아가지는 못할지라도, 달려가는 그대를 격려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달려가보려고 한다.

모든 게 사라진 이 자리에 홀로 남아있을 순 없으니.

점이라는 마침표로 두었던 나를, 다시 이어 선으로 만들어 가려한다.

끝이란 순간이 과정으로 남을지 결과로 남을지는 나에게 달린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비가 오면, 나는 비가 그치길 바란다.

나를 위해. 그대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