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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ibooks Jun 04. 2018

[디트로이트]

당신이 사는 도시의 역사

Kathryn Bigelow : Detroit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를 통해 제공된 영화 [디트로이트]를 보고 글을 즉각적으로 적지는 못했다. 처음엔 영화를 보고 조금은 고통스럽기도 했고, 생각을 곱씹으며 글감을 숙성시키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지 1주일이 되기 전에는 글을 작성해 발행해야 하므로, 이제야 책상에 앉아 글을 작성하려고 다시금 영화 [디트로이트]의 OST를 검색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영화 [디트로이트]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게임의 정보에 묻혀버렸다.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신청기간에 디트로이트로 검색했을 때만 해도 이 게임에 대한 눈에 띄는 정보가 거의 없었는데, 하필 2018년 5월 25일에 발매되었기에 영화 [디트로이트]의 정보를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둔다. 결국 지금은 Kathryn Bigelow Detroit ost로 검색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준 아름다웠던 음악들을 감상하며 이 글을 적고 있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만든 거의 유일한 조건 중의 하나였다. 이전에 나는 이 감독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도시 디트로이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검색한 결과,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을 소재로 한 이 영화의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여성 감독의 하나이며, 사람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인지 혹은 카메라의 각도나 워킹을 이야기하는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독특한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내용을 풀어간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51년 생으로 꽤 연배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중견감독이며, 아카데미 영화제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사실 폭력을 다룬 영화는 수월하게 보기 쉽지 않아 선호하지 않는 편임에도, 이 감독이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 그런 영화를 내가 선호하는지 아닌지 모른 채, 일말의 궁금증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피해자도 목격자도 모두 용의자였다
누군가 죽었고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구들이 포스터에 적혀 있었다. 이런 문장들은 마치, 미스터리나 스릴러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실 영화 자체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실제 있는 도시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매우 현실 반영도가 높고 리얼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영화지만,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는 없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누가 사람을 죽인 범인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부당함 내막을 내가 지켜보아 알고 있다'라는 사실은, 피해자들과의 깊은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배우들

영화에는 낯익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일단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경찰과 폭동을 일으키는 흑인 집단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은 배우는 바로 존 보예가(디스무케스 역)이다. 배우로서 주는 진중함과 무게감이 있기에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권력자나 상사에게 인정받는 성실함과 능숙한 중재력 때문에 누군가의 원망이나 미움을 사지 않을까 또다시 불안해지기도 한다. 게다가 디스무케스가 아무리 자신의 위치에서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 돕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와 별개로, 그가 근본적으로 흑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낮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경비를 하는 디스무케스


안소니 마키(그린 역)는 비글로우 감독의 전작인 [허트 로커]에서 함께 한 배우이다. 영화 [허트 로커]는 2008년, 아바타를 제치고 아카데미 수상의 영광을 안은 작품으로, 이라크에서의 테러와 긴장감을 현실감 있는 묘사와 연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정받았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나 [ 앤트맨]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2018년 [이오]라는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다고 한다.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참전 군인 그린 역을 맡았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흑인이 사회적 약자이기에 수모를 당해야 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린


나니아 연대기에서 유스터스를 연기하기도 했던 윌 폴터(크라우스 역)은 디트로이트의 흑인 폭동을 진압하고, 알제 모텔 부근에서 들려온 총성을 따라와, 누군가를 용의자로 지목하려는 경찰 역할을 맡았다. 어딘지 유약한 소년 같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모텔의 모든 이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추후 이러한 폭력에 대한 발언조차 협박으로 막아버린다. 언제 또 총을 쏘거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명령을 내릴지 모르는 잔인하고 비열한 모습에, 관객들은 다른 주인공들과 함께 질려버리고 두려워지고 만다. 윌 폴터는 자신이 가진 백인 남성 경찰이라는 권력을 남용하면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항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비열한 인종차별주의자 경관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알제 모텔에 용의자로 지목된 흑인가수들과 군인, 백인 여성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공포스러운 일을 왜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폭력에서 살아 돌아와 무대를 포기하고 작은 교회에서 노래하는 래리의 모습을 보니, 흑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그것이 랩이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이든 그 어떤 종류의 노래이든 그렇게 간절하고 절절하게 들리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무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 래리가 빈 관중석에서 노래하고 있다.



폭력의 도시에서

디트로이트에는 포드, GM 등의 자동차 공장이 생겨났고, 그중 하나에 디스무케스가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 과거 디트로이트는 공업도시로 성장했으나,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은 떠나기 시작하였, 경찰의 수는 부족하게 되는 현상을 겪게 된다. 결국 도시는 가난해지고 공동화되었다. 자동차 공장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거나 사정이 좋지 않아져, 현재까지도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도시 디트로이트는 연방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먼 미국의 소위 폭동이라 불리는 시위대의 진압 방식을 보는 동안,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과잉진압과 닮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영화에서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고 연출하고 있는지, 그리고 관객으로서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다시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고통이 아닌 집단의 고통이라면, 그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하나의 도시가 생성되는 시작점만이 역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들어진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 방향을 설정하고 살아나가는가, 사람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겪고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그 도시의 역사가 새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선택은 우리 모든 관객들에게도, 영화 [디트로이트]의 주인공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만약,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와 우리가 당한 부당함을 잊고 살겠다고, 타인의 고통을 부정하겠다고 맹세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그 이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며 그 이후의 삶은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비글로우 감독은 전쟁과 테러에 대한 전작을 훌륭하게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여성 감독으로서 만들어낸 영화이기에, 어쩌면 그 어떤 백인 남성 감독들보다 사회적 약자인 흑인들의 입장을 더욱 세밀하게 표현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가 할리우드에서 주목하고 있는, 상당한 지위의 백인  감독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흑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평가했을지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약 흑인 감독이 이 영화를 찍었다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까 라는 상상도 해 보게 된다.

영화 [디트로이트]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권력과 도시, 인권과 시위, 다양한 층위의 약자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수작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를 통해 제공된 영화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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