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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ibooks May 29. 2018

[스탠바이, 웬디]

Please, stand by.

Please, stand by.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원제인 Please, stand by는 웬디(다코타 패닝)가 평소와 다른 흥분 상태일 때, 스스로에게 되뇌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다. "진정해. 대기해. 기다려"와도 같은 말이다.

[주노], [레이디버드] 제작진의 영화이며, 하늘색 배경에 예쁜 빨강 니트를 입은 금발의 다코타 패닝이 서있는 포스터는 가볍고 상쾌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벤 르윈 감독은 다작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전작을 살펴보니, 90년대 후반 매우 독특한 감각으로 핫했던 '앨리 맥빌' TV시리즈의 시즌 2와 영화 [앨리의 사랑 만들기]가 있다. 그리고 다른 전작들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이나 [럭키 브레이크]등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장애라는 하나의 맥락이 보인다.

벤 르윈 감독의 출신이나 경력 자체도 다른 영화감독들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 폴란드 출생으로 호주에서 자랐으며 영국 국립영화학교에서 영화 공부를 했다. 그리고 BBC에서 다큐멘터리나 TV시리즈를 제작했다. 영화 제작을 하기 전에는 변호사로 일했으며,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다.



자폐에 대하여

영화 [스탠바이, 웬디]는 자폐증이 있어 가족과 떨어져 사는 주인공 웬디의 모험담이다. 자폐증에 관한 지식을 영화나 소설 등으로 접한  일반적 관객들은, 주로 자폐 증상을 가진 사람들의 특별하고 비범한 능력에 대해 주목하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스탠바이, 웬디]에도 427페이지의 시나리오를 외운다던지 하는 내용이 나온다. 홍보문구에도 사용되었던 내용이지만, 막상 영화 내에서는 웬디의 그런 능력이 특별하거나 비범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저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웬디의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그 여정의 필요성에 함께 절실해할 뿐이다.

자폐인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은 그들이 가진 성향 중 하나일 수 있지만, 그런 능력은 없을 수도 있고, 대개의 일상 속 상황에서는 대화중에 눈을 잘 못 마주치거나 선의를 가지고 건넨 말에도 적절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불편한 상대방으로 인식되는 사람일 수 있다. 자폐 스펙트럼과 무관한, 소위 비장애인이 자폐성 장애인의 사고력, 활동 방식, 생활습관 등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SF, 스타트렉


주인공 웬디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덕후이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를 보고 나면 스타트렉이 궁금해진다. 스타트렉의 첫 TV시리즈는 1966년에 나왔다고 전해지고, 미드 빅뱅이론의 (역시 자폐 스펙트럼 중 하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졌다는 의견이 있으며 덕후인) 주인공 쉘든 쿠퍼(짐 파슨스)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항상 정해진 일상의 계획을 따라 생활하는 웬디의 쉽지 않은 여정의 첫 발걸음을 떼도록 종용한 것은 바로 이 스타트렉이다. 이 시리즈는, 웬디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으로, 거의 웬디가 현실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하는 진짜 삶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거나 오해이기 쉽다. 이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웬디의 사고를 SF라는 현실과 다른 장르에 비견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웬디는 스타트렉의 새 시나리오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로 결심하고, 수상이라는 성공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데, 웬디가 현실에서 추구하는 것은 SF이자 스타트렉으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 그녀를 움직이고 성장하게 하는 것은 갓 태어난 조카와 함께 이모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싶은 소박한 욕구이다. 
그럼에도 영화 내에서 스타트렉이 주는 이미지가 큰 관계로 [스탠바이, 웬디]의 외국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조금 더 SF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SF적인 포스터



장애와 그 가족

장애를 가진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 가족은 인내심을 갖고 그 사람을 살피게 된다. 사실 웬디는 자신에게 나름 호의적인 동료가 있는 직장도 있고, 가족 외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기관에서 지내고 있다. 물론 그 기관에서는 많은 도움과 노력을 주고 있지만, 웬디는 새로 태어난 조카에게 좋은 이모가 되고 싶어 하고, 가족과 살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어떤 종류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직장을 갖는 것은 회사에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어떤 차별도 없이 직업을 유지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장애인에 대한 처우뿐 아니라 인식에도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

조금은 달라 보일 수 있는 예시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이 시설을 나와 언니와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을 떠올리게 된다. 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유튜브의 영상을 확인하거나, 이미 펀딩은 끝나긴 했지만 [어른이 되면]의 텀블벅 페이지에서 정보를 볼 수 있다.


성장하는 웬디


영화 [스탠바이, 웬디]에서 드러나는, 웬디의 무해함이나 다정함, 그리고 그녀의 노력과 특별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심적, 경제적인 많은 부분에서 힘든 상황이다. 가족으로서 사랑할지라도 인내심이 필요한 것은 역시 사실이며,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가족의 말 못 할 고통과 부담을 웬디 또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칠고 낯설어 보이는 장애의 영향력으로부터, 이 가족들은 어떤 방식으로 다시 화합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영화 [스탠바이, 웬디]는 가출이라는 철없는 작은 투정으로 보일 것이고, 해프닝에 불과하겠지만, 가족 간의 화합,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응원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이다. 사실 그 여정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이해받지 못하는 웬디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용기 있는 한 걸음이었다. 길을 건너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먼 길을 났고, 물론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애타게 했지만,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다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데, 당차게 밤새워 쓰고 다듬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다시 적어야 했던 소중한 작품을 "Do you know who I am?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큰 소리로 물은 뒤 제출하는 장면은 웬디의 영리함과 생각지 못했던 숨겨진 패기를 알게 하며, 통쾌함과 웃음을 선사한다.



스탠바이, 웬디 

강아지 피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어떤 영화에서는 강아지가 귀엽고 예쁘기 때문에 그냥 촬영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나름의 적정 분량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언니 오드리 역의 배우 앨리스 이브는 영화 [스타트렉 다크니스]에 나왔다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웬디가 스타트렉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가족인 언니가 나오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외에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토니 레볼로리(네모 역)가 웬디의 직장 동료로 나와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스탠바이, 웬디]에는 자폐를 가진 장애인의 능력에 대한 미화나 과도한 묘사가 별로 없다고 느꼈으며, 적당한 현실감을 가지고 접근했음에도 보기 버겁지 않은, 그리고 스타트렉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혀 SF적이지 않은 영화이다. [스탠바이, 웬디]는 가족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소중함을 알게 하는 다정하고 용기 있고 따뜻한 영화이다.  

결국 조카를 안아보는 웬디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제공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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