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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ibooks May 22. 2018

[케이크메이커]

국가와 이념과 편견을 넘어, 달고 따뜻한 것을 빚어내는 사람들

영화를 보기 전에,

예쁜 유럽 카페를 배경으로 그 달콤함을 상상하게 하는 케이크 한 조각과 치유를 내세운 홍보문구만으로 [케이크메이커]를 판단했다면, 이 영화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소재에 놀랄지도 모른다. 물론 위에 열거한 달콤하고 예쁘고 힐링되는 것들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 [케이크메이커]에서,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다룬다.

규율
음식
문화
종교
사회
성적 지향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코셔 *
샤밧 **
성소수자
불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
죽음, 사별, 상실, 부재, 고통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들의 국적 및 이동경로(독일-이스라엘)를 통해, 관객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
학살
전쟁
불화   
분단


감독은 이러한 무거운 주제와 소재를 다룸과 동시에, 사랑, 달콤한 케이크, 가족을 영화에 배치하고 마치 케이크를 만들듯, 재료를 섞고 반죽하여 감각적인 하나의 비유를 완성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관객들을 숨죽이게 만들고 주인공들의 삶과 사랑을 관음 하듯 비추어낸다.



*코셔(코셰르)  :  kāshēr _히브리어로 '맞는' 또는'적절한'이라는 뜻. 유대교에서 의식적인 목적에 적합한 사물의 상태를 가리킴. (출처: 다음 백과사전)

**샤밧(샤바트)  : sabbath _안식일을 뜻하며 금요일 저녁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에 끝난다. (참고: 다음 신약성경 용어 사전)



먼 길을 마다않고 다녀가는 사람들


현시대를 살고 있는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베를린은 분명 분단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독일은 전쟁과 학살의 이미지를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이스라엘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전쟁의 역사와 그것을 초래한 이념들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과거 전쟁과 분단을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는, 이념과 규율에 사로잡힌 국가들인 이스라엘과 독일을 오가며 사랑하는 커플이 여기 있다. 그들의 사랑은 마치 관객을 대상으로 폭로되듯, 갑작스럽게 드러난다.

정보 없이 영화 [케이크메이커]를 보게 된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조금 놀랐을 수도 있는데, 일단 영화의 초반에 토마스(팀 칼코프)와 오렌(로이 밀러),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시점 직후 갑자기 연인으로로서의 시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감독이 의도한 바였겠지만, 관객들에게 그들의 관계에 대해 짐작할 만한 힌트를 전에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어쩌면 커플 중 한쪽은 이미 기혼자이고 두 사람의 성별이 모두 남성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쩌면 이러한 소재와 설정만으로도, 먼 거리를 마다않고 서로를 보기 위해 도시와 도시를 오가는 커플들, 그리고 사회적, 종교적, 이념적,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커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영화는 전쟁에 비견될만한 상실의 고통을 알고 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방법을 실행하고 배우는 방법을 보여준다. 종전국의 토마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현재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로,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 사는 나라, 그 사람을 잃어서 자신과 같이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에게 간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연인의 아내와 아이를 위해 케이크를 만든다.

묵묵히 반죽하는 토마스


사실 토마스가 이스라엘에 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오렌의 가족을 만났을 때, 그 불안함을 가중시켰던 것은 그 행동이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나트에 대한 토마스의 접근이 호의인지, 사랑인지, 질투인지, 맑고 짙고 푸른 눈동자가 빛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토마스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토마스의 눈빛

토마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했던 옛날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연인이 함께 하던 가족들을 직접 찾아보고 만나 케이크를 만들어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을 허망하게 잃고도, 아무에게도 그 슬픔을 말하거나 위로받지 못하는 토마스가, 연인의 가족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애도하려던 어설픈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입던 옷을 입은 채, 마치 진저브레드의 현신 같은 둥그렇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울먹이며 홀로 이스라엘 거리를 떠도는 토마스를 보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울먹이며 떠도는 토마스



매혹, 케이크, 가족

하얗고 따뜻하고 말랑한 도우는 토마스가 사람을 매혹하는 방법, 그 자체이다.

토마스는 반죽을 따뜻하게 만들고 자신만의 레시피로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 뿐 아니라, 사람에게 온기를 주고 말없이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비유의 선상에서, 토마스가 능숙하게 케이크를 만들 듯 누구든 신을 사랑하게끔 매혹하는 방법을 아는 게 아닐까. 올렌도, 그의 아내 아나트(사라 애들러)도 토마스에게 매혹당했다. 그래서 올렌의 어머니가 토마스의 뺨을 어루만질 때, 나는 잠시 긴장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히 나의 기우였고, 베를린에서 왔다는 토마스가 '오렌을 모른다'고 말했음에도 죽은 아들의 연인임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토마스의 상실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자 따뜻한 위로였다. 사실 이 장면에서 보여지는 어머니가 토마스를 대하는 태도는, 아들 오렌의 성적 지향에 대한 작지만 중요할 수 있는 정보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아내 아나트도 애초에 감지하지 못한 오렌의 동성 연인 토마스를, 오렌을 어릴 때부터 키워온 어머니가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놀랍고 신비하게 느껴진다. 오렌의 어린 시절부터의 성적 지향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온기의 표현


고통과 상실감에서도 토마스와 아나트는 달콤하고 따뜻한 케이크를 만든다. 이러한 감정적 대비에 상응하듯 빛과 어두움의 대비를 세심하게 표현해낸 영화 속 조명은 장면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옷은 사람에게 온기를 주는 것이고, 피부와 몸을 감싸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고유의 무늬랄까, 타인과 구분되는 특성을 주는 것이다. 토마스가 쿠키에 그림을 그리고 케이크에 가니쉬를 얹듯, 토마스의 육체에 오렌의 옷이 입혀진다. 그것이 빨간 삼각팬티 수영복이라 해도, 웃음은 잠시. 마음이 다시 서늘해진다.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분량의 재료를 섞고 반죽을 한 뒤, 따뜻하게 만든 다음, 오븐에 넣어 시트지를 구워내고, 데코레이션을 하는 과정. 이 모든 것이 그들이 하는 사랑의 행위에 비견된다. 토마스는 죽음(오렌)과 삶(아나트)의 사이에 케이크로 나타난 달콤한 작은 신과도 같다. 

토마스가 오븐을 쓸 수 없다는 현실은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케이크메이커, 필름 메이커

사실 케이크 한 조각으로 길고 깊은 상실감을 치유하기에는 너무나 순간적인 달콤함이라고 생각도 들기도 한다.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 각자의 레시피와 사소한 비법을 서로에게 알려주고 나누어 먹는 행위들은 달콤함보다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

한 사람이 자신의 레시피를 완성하는데 들인 모든 노력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 경험을 쌓아온 시간은 어쩌면, 케이크를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연인의 달콤한 한 순간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 달콤한 몇 분, 몇 초의 시간을 대가로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 달콤함도 그것을 위한 노력도 긴 이별과 고통도 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감독들이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은 케이크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닮아있다. 여러 가지 기본적인 재료를 자신만의 비율대로 섞는 것뿐이 아니라 그 반죽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 오븐에 넣어 구워낸 뒤 사람들이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옷을 입히듯 꾸며 주는 일. 이 영화 [케이크메이커]의 속성이자 케이크의 속성, 그리고 우리 삶의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며칠이 지나서도,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의 근황이 궁금하다. 요즘도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은 샤밧을 지키며 빵을 굽고 전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잃었다면 언제쯤 그들을 만나러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은 예전에 입고 있던, 내가 아는 그 옷을 입고 있을까. 상실의 고통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리고 부재의 시간을 견뎌낼 생각이라면, 일단 달콤한 케이크라도 먹어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내일은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를 먹어야겠다.

영화 [케이크메이커]는 체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아나트 역의 배우인 사라 애들러는 프랑스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장 뤽 고다르의 [아워 뮤직]에서도 주연을 맡은 바 있다.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과 함께 한국에 방문해 2018년 전주 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제공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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