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三界)를 끝없이 떠돌았으나, 벗어날 수 없는 차원적 편견을 논하다.
플라톤의 <국가> 7권에는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묶인 채 동굴에 갇힌 죄수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뒤편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고, 불길과 죄수 사이에는 성벽이 있다. 죄수들은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뒤편의 담에 가져다 놓은 물건들이 불에 비친 그림자만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이 그림자와 성벽 위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죄수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 된다.
에드윈 A. 애벗(Edwin Abbott Abbott, 1838-1926)은 <플랫랜드(Flatland)>에서 이 비유의 동굴과 죄수들을 기하학적 도형들이 사는 2차원의 평면 세계로 대체했다. 애벗이 실제로 비유의 출처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은 <플랫랜드>가 플라톤의 비유와 관련된다고 확신한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 있는 죄수들처럼 플랫랜드 사람들은 그들이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세계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라는 믿음, 즉 '차원적 편견'에 구속되어 있다.
<플랫랜드>에는 플랫랜드를 중심으로 위아래의 세 가지 차원의 세상이 나온다.
라인랜드는 1차원의 선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며, 선을 구성하는 점들이 사는 곳이다. 플랫랜드는 2차원의 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며, 기하학적 도형들이 사는 곳이다. 스페이스랜드는 3차원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며, 입체 도형들이 사는 곳이다.
독자인 우리는 스페이스랜드에서 입체 도형들과 같이 살고 있지만, <플랫랜드>의 주인공은 플랫랜드에 사는 한 사각형(A square)이다. 그는 하나의 평범한 사각형일 뿐이며 이름도 없다.
애벗은 필명으로도 '사각형(A Square)'를 써서, 이 책을 한 이차원적 존재의 회고록처럼 만들었다. 사각형은 플랫랜드의 보통 사람이면서 동시에 <플랫랜드>의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이다.
<플랫랜드>의 부제는 '많은 차원의 로맨스(A Romance of Many Dimensions)'이다.
나는 이 부제목을 보는 순간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자신이 차원의 감옥에 갇혀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 속에서 열심히 먹고, 일을 벌이고, 사랑하고, 싸우고, 미래를 전망하는 존재들이 자신의 협소한 세상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플랫랜드>에 나오는 여러 세상의 존재들에게 감정 이입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특별한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페이스랜드의 주민인 우리는 3차원을 넘어서는 세상을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한 차원을 낮춰서 2차원인 플랫랜드의 주민이 되어서 그들의 시각에서 3차원을 상상하는 사고 실험은 가능하다. 이렇게 배운 유추법을 4차원 이상의 고차원 세상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랫랜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플랫랜드의 사회와 정치 제도에 대한 소개이고, 2부는 차원 이동에 관한 것이다.
화자인 사각형은 자신이 사는 나라를 이렇게 소개한다.
"커다란 종이 한 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직선,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등 여러 가지 도형들이 그 위에서 한 자리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 표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도형들은 종이 평면 위에서 혹은 안에서 이동하지만, 종이 너머로 풀쩍 뛰어오르거나 아래로 쑥 뛰어내리지는 못해요. 비록 가장자리는 딱딱하고 빛이 나긴 하지만 마치 그림자와 같죠. 이제 제가 사는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해 제법 감을 잡으셨나요?"
<플랫랜드>, P26
플랫랜드에서 사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기하학적 상상력이 조금 필요하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하면 나처럼 100% 문과도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는 정도이니 안심해도 된다.
* 저자는 수학자도 아니었고 당초에 수학 교과서를 쓸 생각도 없었지만, <플랫랜드>는 고차원 기하학의 입문서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1> 플랫랜드의 사회, 정치 구조
플랫랜드는 사회 제도와 정치적 구조를 가진 엄연한 세상이다. 1884년도에 출간된 <플랫랜드>는 수학 용어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회를 풍자한다.
이 나라의 계급은 변의 수에 따라, 즉 다각형일수록 높아지는 구조이다.
이 사회에서 여자는 변이 하나밖에 없는 직선(line)이므로 지위가 가장 낮다. 그다음은 삼각형인데, 밑변이 좁으면 좁을수록 직선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모양이 되어서 최하급 계층이 된다.
군인과 노동자는 두 변의 길이가 동일한 이등변 삼각형이다. 중산층은 정삼각형, 전문가와 신사들은 사각형과 오각형이다. 육각형부터 귀족 계급이 시작되며, 변의 수가 점점 많아지면 다각형이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얻는다. 변이 점점 짧아지고 많아지면서 마지막에 도달하는 원은 최고 계급인 성직자이다.
도형의 각도는 지능과 동일시된다. 각도가 없는 직선인 여자들은 지능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기억력도 없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풍자임을 명심하라.)
자연법칙에 의해 자식세대는 부모세대보다 0.5도씩 증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계급은 거의 고정되어 있으나 개천에서 용 나는 것처럼 이등변 삼각형 부모에게서 정삼각형이 태어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아기는 한결같이 누추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위를 비추는 한줄기 빛과 희망이 되어 가난한 농노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지만, 동시에 귀족 계급에게도 대체로 환영을 받아요. 모든 상류 계급 사람들은 잘 알기 때문이죠. 그런 희귀한 현상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거의 아니 전혀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아래로부터 들고일어나는 혁명을 막아줄 굉장히 유용한 보호막이 된다는 걸요."
<플랫랜드>, P44
어느 세상에서나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들은 분리와 분열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며 매번 일어나는 반정부 폭동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진압한다.
2> 플랫랜드 주민이 세상을 파악하는 방법
플랫랜드의 집 구조, 방향 판단법, 가정생활, 색채에 대한 풍습과 규정, 반란의 발발과 진압 과정 등은 흥미롭다.
특히 상대방이 어떤 다각형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기술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플랫랜드에서는 도형의 변의 개수가 가장 큰 정체성이 되기 때문에, 첫 만남에서 상대의 다각형을 먼저 알아야 사교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랫랜드 주민의 시선으로 보면 삼각형이든 사각형이든 모든 것은 직선으로만 보인다. 우리가 바다를 항해하면서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바라보이는 섬이나 해안을 구별할 때, 플랫랜드 주민의 시선과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된다. 수면 위에 죽 이어진 잿빛의 선만 보인다.
플랫랜드에 사는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거의 같은 직선 모양으로 나타난다. 스페이스랜드에서는 3차원 공간에서 각을 직접 볼 수 있고 동그라미의 전체 둘레를 응시할 수도 있다. 반면 플랫랜드 사람들은 동그라미를 인식할 때 언제나 원주의 절반 이하 정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들은 서로를 어떻게 구분할까? 스페이스랜드에서 처음 만나면 서로 '소개'하는 과정이 있다면, 플랫랜드에서는 서로 '느끼는' 과정이 있다.
예를 들면, 사각형과 오각형이 서로를 느낀다고 하자. 첫째, 사각형은 오각형이 자신을 느끼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오각형은 그가 가져다 대는 가장자리의 중간을 사각형의 꼭짓점(P라고 하자) 가까이에 가져다 댄다. 그러고 나서 오각형은 P를 중심으로 P에서 각을 만드는 다른 가장자리와 만날 때까지 회전한다. 이 과정을 끝내기 위해 이번에는 오각형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각형은 오각형의 꼭짓점 중의 하나 주변에서 회전한다.
이들은 마치 서로 탱고를 추듯이 오랜 훈련과 연습으로 상대방을 쉽게 구분해 낸다. 다각형 상대방이 느끼는 동안 뾰족한 이등변 삼각형이 실수하여 상대방을 뾰족한 각으로 찔러서 투옥되고 계급이 강등되기도 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플랫랜드 사람들이 각도를 구별할 때, 상대방의 각도를 직접 볼 수는 없고 순전히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추측이 대단히 정확하다.
그러나 이 노하우는 오직 플랫랜드라는 우주에서만 적용된다. 그래서 사각형이 스페이스랜드의 구를 만났을 때, 사각형은 구를 직선인 여자라고 생각하며 완전히 오판하고 만다.
이러한 느낌에 의한 인식 방법은 주로 하층 계급에서 쓰이며, 직접 접촉을 꺼리는 상층 계급 사이에서는 시각에 의한 인식 방법을 쓴다.
시각 인식 방법은 안개가 있는 온화한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대기가 맑고 건조한 지역에서는 모든 선이 똑같이 선명하게 보여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곳에서는 거리에 따라 물체의 선명도가 달라진다. 플랫랜드 주민들은 상대적인 희미함과 선명함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상대방의 형태를 매우 정확하게 추측하는 정도를 획득했다.
'느끼기'와 '보기'에서 더 우월한 것은 '보기'이다. 이런 고상한 기술을 습득하려면 대학에서 많은 이론과 기술을 익혀야 하며, 그에 필요한 시간과 돈이 있는 상류 출신들만 가능하다. 그래서 상류 계급은 천박한 '느끼기'를 장려하지 않거나 완전히 금지한다.
3> 플랫랜드의 소수자, 불규칙 도형
계층을 나누는 여러 가지 진입 장벽이 견고하게 존재하지만, 당국은 하층민이 간혹 상류 사회에 진입하는 드문 케이스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장려한다. 이것은 하급 계층을 희망 고문하고 자기들끼리 분열하게 함으로써 혁명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차단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방식이 아닌가?
규칙 도형들은 그나마 희망이라도 있지만, 플랫랜드에는 규칙 도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 사회 시스템은 규칙성, 즉 모든 각의 동일한 크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도형의 불규칙성은 부도덕과 범죄와의 결합에 해당한다.
불규칙 도형들은 느끼기나 보기에 의해서 정체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에 혼란과 혼돈을 가져오고 문명을 야만으로 되돌리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심한 경우 죽음도 정당화된다.
플랫랜드의 주민이 되어서 이 사회의 풍습과 제도를 속성으로 익혔으니, 이제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이동해 보자.
1> 1차원 라인랜드의 어리석은 왕을 만나다.
사각형은 어느 날 꿈속에서 다른 세상의 환영을 본다. 그는 하나의 차원밖에 가지지 않은 세상인 라인랜드에서 동일한 하나의 직선 위에서 점 같은 존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다.
직선 위에는 자신을 '왕'이라 부르는 한 점이 있는데, '왕국'이라 부르면서 왔다 갔다 하는 직선이 그의 세계의 전부이다. 왕과 그의 백성들은 이 직선 외에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으며, 그들의 시야는 한 점으로 제한되어 있다.
사각형은 라인랜드의 왕에게 플랫랜드를 설명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어떻게 설명해도 왕은 길이와 공간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나를 잘 보게. 나는 하나의 선이고, 6인치가 넘는 공간을 차지해 라인랜드에서 가장 길다네."
"6인치의 길이겠지요." 제가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참으로 무지하구나." 왕이 말했어요. "공간이 곧 길이가 아닌가. 다시 한번 내 말을 가로막으면 더 이상 그대와 이야기하지 않겠네."
평생 직선 위에서만 움직이는 라인랜드의 왕은 오른쪽 왼쪽으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사각형은 1차원의 왕을 격노하게 했다.
왕 : "내 선 밖을 벗어나라고? 그러니까 세계 밖으로 나오라는 말인가? 공간 밖으로"
나 : "음, 그렇습니다. 당신의 세계 밖으로, 당신의 공간 밖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폐하의 공간은 진짜 공간이 아닙니다. 진짜 공간은 평면인데, 폐하의 공간은 직선일 뿐입니다."
2> 3차원 스페이스랜드의 현자를 만나다.
라인랜드 왕과 말이 통하지 않아 좌절했던 사각형은 이번에는 자신이 어리석은 왕과 똑같은 상황에 마주친다. 사각형은 어느 날 스페이스랜드에서 온 '구(Sphere)'를 만난다.
사각형은 라인랜드의 왕처럼 처음에는 구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페이스랜드로 가서 '공간의 신비'를 체험하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뀐다. 사각형이 플랫랜드의 평범한 주민인 것처럼 구도 스페이스랜드의 평범한 주민이지만, 사각형에게는 구가 위대한 현자처럼 느껴졌다.
사각형은 많은 신비한 경험을 했으나 그의 경험을 남들에게 잘 묘사할 수 없었다. 플랫랜드의 말에는 이것을 묘사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각형은 마침내 자신의 체험담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했으나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체포당한다. 사각형은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선구자가 되고 싶었으나, 정신병원에서 "북쪽이 아니라 위쪽"이라는 불가사의한 주문 같은 한 마디를 되뇌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 우리는 모두 포인트랜드에 살고 있다.
사각형은 구를 만나기 전에도 '공간이란 무한히 연장되는 높이와 너비'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공간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였을 뿐, 사각형은 진정으로 공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각형은 구에 의해 강제로 들려져서 스페이스랜드에 가서 직접 체험하고서야 공간을 이해하게 된다. 사각형은 구에게 완전히 계도되어서, 구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3차원을 열심히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구가 자신을 일깨울 때 사용한 유추법을 적용하여 4차원, 그 너머의 5차원, 6차원이 있을 것이라고 구에게 주장하게 된다. 스페이스랜드가 유일하고 완벽한 세상이라고 믿는 구는 이러한 발칙한 가설에 격분하여 사각형을 다시 2차원 세상으로 쫓아버린다.
사각형은 플랫랜드에 다시 돌아오고 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신비 체험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낀다. 2차원 세상에 다시 익숙해지니 그 놀라웠던 체험도 꿈결에 있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몸담은 세상을 넘어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고집하는 것은 모든 세상의 주민들이 반복하는 주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세상을 '우리 우주'라고 부른다.
우리가 사는 곳이 라인랜드이든, 플랫랜드이든, 스페이스랜드이든, 혹은 더 고차원 세상이든 모두 그 세상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
<플랫랜드>에는 세 가지 세상 외에도 0차원의 포인트랜드가 나온다. 포인트랜드는 말 그대로 아무 차원도 없는 점 하나이며, 사는 사람 역시 그 세계를 가득 채운 왕 한 명뿐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전부라 믿으며 자아도취에 빠진 상태이다. 그에 비하면 라인랜드의 왕은 공자(孔子) 수준으로 겸손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일깨워주어도 포인트랜드의 왕은 자신이 들은 것은 곧 자신이 말한 것이고, 자신이 말한 것은 곧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자기의 생각에 대해서도 대항하는 생각도 해낼 줄 아는 존재라는 또 다른 자아도취에 빠지는 웃지 못할 모습을 보여준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포인트랜드의 왕이다. 각자 자신의 행성을 다스리는 만족스러운 독재자이므로, 자신의 세상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라인랜드의 왕은 플랫랜드를 알 수 없고, 플랫랜드의 사각형은 스페이스랜드를 알 수 없고, 스페이스랜드의 도형들 역시 더 높은 고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사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알기를 강렬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낯선 세상보다는 익숙한 세상에 안주하는 것을 택하기 때문이다.
만약 돼지우리에서 맛있게 먹는 데 심취한 돼지에게 먹이를 뺏으면서 '인간이 되지 않겠나?'라고 물어보면 격렬히 저항할 것이다.
1> '삼계'를 떠돌며 수많은 생을 헤매다.
불교 철학에서 '세상(界)'은 빠알리어로 '부미(bhūmi)'라고 한다. '부미'는 '땅, 영역, 세상'이라는 뜻도 있고, '단계, 지경, 경지'라는 뜻이 있다. 부미는 중생이 사는 물리적 세상이기도 하면서, 마음이 도달한 경지이기도 하다.
불교 세계관의 핵심은 마음에 따라 경험하는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사는 것 같지만, 각자 자신의 마음이 도달한 상태에 걸맞은 세상에 살고 있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세 가지 세상(三界)으로 구분하고,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구분된다. 욕계는 감각적 욕망에 지배되는 세상으로, '행위(doing)'와 '소유(having)'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다. 색계와 무색계는 감각적 욕망이 떨어져 나간 뒤에 남은 '존재(being)'의 세상이다.
삼계(三界)는 다시 31가지 세상으로 세분된다. (* 남방의 상좌부 불교에서는 31 세상, 북방의 대승 불교에서는 33 세상을 말하지만, 천상 세계를 구분할 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욕계는 지옥, 축생, 아귀, 인간, 그리고 6개의 천상이 있다. 색계는 16개, 무색계는 4개의 천상이 있다. 욕계 천상의 가장 낮은 곳인 사대왕천의 하루는 인간의 500년이고, 그 위로 갈수록 두 배수씩 증가한다. 인간 세상 위에 정말 현기증 나는 거대한 세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욕계의 세상 중 인간계에 살고 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붓다도 마지막 생을 인간계에 머물렀다.
붓다는 4 아승기 10만 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삼계에 걸쳐 윤회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삶인 인간계에서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오도송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시이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얻은 것 없이 이리저리 헤매었다.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생은 괴로움이었다.
집을 짓는 자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마룻대는 해체되었다.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종말에 이르렀다.
<법구경 154>
존재는 몸과 마음, 즉 물질과 정신의 현상으로 이루어진다. 구름이 실체처럼 보이지만, 막상 구름 속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인간 존재도 하나의 현상이지만 물질과 정신의 현상이 촘촘한 흐름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견고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몸(물질)이 무너져서 죽어도 마음(정신)의 흐름은 계속된다. 모든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재구성될 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정신 에너지에도 적용된다. 물질보다 강력한 정신 에너지가 물질 기반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냥 무화(無化)된다는 가정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의 집요한 갈애 때문에 육체가 부서져도 유지되는 정신 현상이 다른 물질을 구성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윤회가 계속되는 한 아무리 근사한 세상에 태어난다 해도 근원적인 괴로움은 계속된다.
상좌부 불교의 대표적 주석가인 붓다고사 스님은 비구(출가자)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머리를 한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깨달음은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얻거나 완성된 인격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윤회의 종식을 위한 것이다. 비구는 두려움에 떨며 긴박감을 느끼기에 수행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초기 불전 번역의 선구자이신 각묵 스님이 불교신문에 기고한 글은 나의 심정을 너무 잘 설명하기에 인용해 본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그때만 해도 최상승 간화선 수행자라 잔뜩 고개를 치켜들고 다니던 필자는 이 구절을 보고 "윤회가 본래 없는 줄을 알아야 비구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게 비구라고? 참으로 소승적인 견해로구나"라면서 비웃었다.
그런데 그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옆 시궁창 속에 조그만 돼지새끼 한 마리가 빠져 죽어있었다.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시궁창을 지나가면서 보니 돼지새끼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물 범벅이 된 채 먹이를 찾기 위해 주둥이를 온몸째 시궁창에 처박고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런 돼지새끼의 모습이 내 가슴을 때렸다. 그리고 '저 돼지 꼴이 바로 내 꼴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비구라 해도 윤회라는 진흙탕 속에서 썩은 물을 빨면서 꿀꿀대는 저 돼지랑 다를 게 무엇인가. 아니 나는 세세생생 사바로 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미명하에 윤회를 즐기려 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과 아울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라는 말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그 귀중한 체험을 한 뒤 초기불교가 다시 보이게 되었고, 그 힘으로 10여 년의 힘든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인간 조건의 본질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것은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은 결코 쉽고 명백한 길이 아니다. 무성한 잡목들로 덮여 있는 '가지 않은 길'이다.
2> SF적 상상력은 수행의 원동력이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 나오는 죄수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보는 그림자를 진실이라 믿었다. 누군가가 진실을 말해주어도 그들은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림자를 옹호하고 말해준 사람을 공격할 것이다.
기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출발이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불합리한 제도와 풍습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이며 신의 섭리이다.'라고 합리화하게 된다. 신비 체험을 하기 전의 사각형처럼.
나는 극단의 보수주의자가 수행자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각적, 지적 한계로 인해 차원의 차이를 풍자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은 상상력에 기반해야 가능하다. 나는 많은 SF 소설과 영화 속에는 수행자에게 통찰을 주는 '도(道)'가 있다고 믿는다.
불교적 세계관이야말로 거대한 SF적 상상력을 촉발한다.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단지 창작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삶을 윤회하면서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한 내용이 상상력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애벗은 감각을 이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해석해야 진정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감각적 경험을 수행을 통해 해석해야 감각적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랫랜드>에서 사각형과 함께 서로 다른 차원을 이동하는 여행을 통해 나도 결론에 도달했다.
"상상력과 수행은 같은 통로를 지나고 있다. SF적 상상력은 수행의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말해도 이단으로 낙인찍히거나 정신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니 행복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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