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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1번이 고통에 맞서기를 멈추고 밀양을 보다.

[영화 속 에니어그램 #3] 1번 유형 탐구하기

by 아닛짜

내가 개인적으로 '고통 속의 엄마들'라고 이름 붙인 한국 영화가 세 편이 있는데, 이창동 감독의 <밀양>, 봉준호 감독의 <마더>, 또 이창동 감독의 <시>이다. 밀양은 젊은 엄마, 마더는 중년의 엄마, 시는 노년의 엄마의 처절한 고통을 보여준다.

이들은 각각의 세 사람이 아니라, <밀양>의 젊은 엄마가 살아남아서 <마더>의 중년의 엄마가 되고, 마더가 나이 들어서 <시>의 노년의 할머니가 되는 식으로 한 사람의 일생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밀양>은 전도연 배우가 연기하는 이신애라는 인물의 사실상 모노드라마이다.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은 전형적인 캐릭터로서 기능하며, 이신애의 삶의 배경으로 뿌옇게 등장한다. 영화는 오직 이신애의 심리와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고통의 본질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러나 송강호 배우(김종찬 역)의 훌륭한 연기는 이신애의 심리를 더욱 또렷하게 보여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의 연기보다 어찌 보면 더 까다로울 수 있는 배경 연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것을 보며 '역시 송강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강호라는 하얀 도화지 위에서 전도연은 그야말로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그야말로 병풍 연기의 최고봉이라고 꼽을 수 있겠다.


나는 영화를 여러 번 보며 이신애의 태도와 행동에 깔린 심리를 추적하면서 이신애가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이 라고 판단했다. 다른 의견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신애를 1번 유형으로 간주하고, 특히 1번이 고통에 맞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은 '완벽주의자, 도덕주의자, 이상주의자, 혁명가'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자신을 포함한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서 개선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모범생, 교사, 판사, 청교도, 활동가 등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대략 1번 유형의 느낌을 알 수 있다. 이신애도 깐깐한 선생님 느낌이 있다.


gii3ikK43hCMcETXagVwxsGR2pGsHqhZYrD-Uu3GxEVhnaKbDLtHil1Myh6znaFNNciA20rhT4fAe1QoL20r6g.webp <밀양>, 이창동 감독, 2007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2. 1번 유형이 고통에 맞서는 방법
2-1> 1번 유형이 '기준'을 잃어버렸을 때
2-2> 1번 유형의 분노와 억압
2-3> 분노의 표출과 시스템의 파괴
3. 1번 유형에게 '비밀스러운 햇빛'이 비칠 때




1.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결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 <밀양>뿐 아니라 <시>나 <버닝>도 각 잡고 봐야 한다. 그러나 바닥 없는 깊은 우물 속에 던져지는 듯한 느낌을 감내하면서도 계속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밀양>은 종교 문제나 남녀 간의 사랑, 혹은 파렴치하고 끔찍한 범죄 같은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고통 그 자체에 천착한다. 카메라는 신애를 동정하거나 변명해주지 않으며,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보듯이 중립적 시선으로 신애를 직시할 뿐이다. 영화는 어떤 확실한 결말이나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 것인가?"
"인간은 어떻게 고통을 경험하는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있는가?"
"과연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나는 <밀양>을 세 번 봤다. 처음에는 신애가 겪는 상황이 너무나 황망하고 허무하고 잔인해서, 그 고통에 압도되어 힘겹게 봤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결말을 이미 다 알고 있기에 점점 거리를 두고 물러서서 중립적 시선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제야 나도 과학자의 시선으로 고통 그 자체를 분석할 여유가 생겼다.

길거리-large.jpg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음에 절망한 신애


고통의 진리 - 삼법인(三法印)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신애의 처절한 고통도 멀리서 보면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고통과 다르지 않다. 지구상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수많은 신애들이 그들의 수만큼의 갖가지 고통을 겪고 있다.


불교만큼 고통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고통을 다루지만, 불교는 고(苦)를 정면에서 깊게 통찰하여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온갖 현상이 모두 고라고 가르친다. 고의 본질을 얼마나 사무치게 깨우쳤는지가 그 사람의 불교 수행의 깊이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핵심을 관통하는 '삼법인(三法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진리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ṅkhārā aniccā)
모든 행(行)들은 무상(無常)하다.

제행개고(諸行皆苦; sabbe saṅkhārā dukkhā)
모든 행(行)들은 고(苦)다.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mmā anattā)
모든 법(法)들은 무아(無我)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이다. '변화(變)'는 우주의 이치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는다.


사랑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을 피우고, 변명할 새도 없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린다. 자신의 인생의 의미였던 아들도 속절없이 사라진다. 내가 확신을 가졌던 원칙, 관념, 생각, 감정들도 퇴색되고 변해버린다.


바로 이러한 우주의 이치가 인간의 고통의 원천이다. 그래서 '제행개고(諸行皆苦)'라는 사실이 뒤따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변화'에 대한 경험 자체가 바로 '괴로움(苦; dukkh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상(無常; aniccā)'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허무함, 공허함 등의 형용사적 언어가 아니다. 단지 '상(常; niccā)', 즉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경험' 자체와 '그 경험에 대한 정신적 해석'을 구분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객관적인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관적으로 '고통스럽게 느끼는 경험'이 있을 뿐이다.


대양에는 무수한 파도들이 출렁인다. 하나하나의 파도가 '나(我)'라는 의식이 있다면, 파도들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가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대양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 사이에 개제 되는 관점의 문제이다. '아(我; attā)'라는 단일한 존재를 상정했을 때, 무상은 고로 연결된다. 모든 존재는 다양한 조건의 결합에 의해 조건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무아(無我; anattā)'이다.


파도는 순간의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대양이라는 것도 파도의 무더기일 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파도인가? 아니면 대양인가? 어떤 구조 속에 제약되어 있는가에 따라 내가 고통스럽게 느끼는 경험도 달라진다. 절대적 고통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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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常(무상)과 皆苦(개고)의 주어는 '제행(諸行)'이다.


여기서 '행(行)'은 빠알리어의 'saṅkhārā'를 번역한 것으로, '선행하는 조건들에 의존하여 형성된 것들'을 말한다. '상카라'는 한마디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중생 세상의 모든 작용이라고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에니어그램 식으로 말하면, 성격의 감옥에 갇혀서 성격의 패턴에 의해 조건 지워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행무상'은 '모든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변한다'라고, 그리고 '제행개고'는 '모든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변화에 대해) 고통스럽게 느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아'라는 진실을 '아'라고 인식하는 인간은 '제행무상 제행개고'에 대한 대응으로 성격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성격은 자신을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갑옷, 또는 감옥이다. 애니어그램은 이 갑옷을 아홉 가지로 구분한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유형은 고통에 대처하는 아홉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2. 1번 유형이 고통에 맞서는 방법


신애가 고통을 인식하고 맞서는 방식은 1번 유형적이다.


1번 유형의 핵심 메커니즘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기준'과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함에 대한 '분노'의 문제와 관련된다. 1번 유형의 기준은 교과서, 규칙, 사회적 통념, 부모님 말씀 등 주로 외부에서 제공되며, 그 구체적 내용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위생 문제부터 사회적 정의까지 1번의 강박적 집착은 다양하다.



2-1> 1번 유형이 '기준'을 잃어버렸을 때


영화의 분위기는 신애가 아들 준이를 잃어버리기 전과 후를 기준으로 극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표면에 드러나는 양상은 극적으로 다르게 보이지만, 신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내면의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작동한다.


신애는 1번 유형답게 기본적으로 뚜렷한 기준(준거)을 가지고 그 원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준거(準據)'라는 단어의 뜻은 '사물의 정도나 성격 등을 알기 위한 근거, 표준'으로, '저울이나 자와 같은 측정기로 사물의 무게, 양, 크기 등을 정확히 재는 측정 도구'라는 의미가 있다. 그 기준은 절대적이어서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 아니다.


리터, 미터, 킬로그램 등과 같은 도량형의 측정 단위가 어떤 상황에도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1번 유형의 기준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신애는 삶을 자신의 측정 기준으로 정확히 재서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며, 항상 상황을 그 기준에 맞게 조정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의 깊은 층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신애가 밀양으로 왔을 때와 아들을 잃었을 때의 두 가지 시점에서 이러한 노력은 절박하고도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신애의 첫 번째 기준 : "이상적인 가족"


신애는 밀양으로 이사 올 때 어떤 심리적 상황을 겪고 있었을까?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여자와 동승하였고 외도를 하였음이 밝혀졌다. 마음속은 슬픔과 분노와 배신감으로 들끓는데, 신애의 대처 방식은 독특하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지만, 그녀는 왜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왔을까?


신애는 실패한 결혼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면서, 남편을 그리워하고, 심지어 늘 고향에 가서 살고 싶어 했던 남편의 희망을 자신이 이루려고 한다. 남동생은 같이 술 마시며 남편이 그립다고 말하는 신애를 어이없게 바라본다.


신애는 자신의 이상적인 결혼 생활이 깨져버린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미 깨져서 부서졌는데도 그 파편을 이어 붙이고 채색을 하려 한다.

밀양-가족사진-large.jpg 신애의 이상적인 가족사진


실패한 결혼 생활은 누구에게나 타격을 주지만, 완벽주의자인 1번 유형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특히 '행복한 가정'이라는 청사진을 자신의 주요한 준거로 가진 경우에는 자신의 존재 근거가 뒤흔들리는 사건이 된다.


신애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가족사진'에서 남편의 존재를 어떻게든 복구해야 한다. 남편은 사라졌으나, 적어도 남편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계속 남아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따라서 신애의 상식에 의하면, 남편은 자신을 사랑했었어야 하고, 자신도 남편을 계속 사랑해야 한다. 남편을 정말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해야만 하는 사랑인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남편의 꿈까지 이어받아 이루려고 한다. 신애에게 밀양은 남편을 상징하기 때문에, 밀양에 와서 정말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교양 있는 여자' 행세나, 돈이 없으면서도 땅을 보러 다니던 허세 행위도 자신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려는 무의식적 장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신애의 이상적 가족사진에서 준이마저 사라진다. 준이가 있었기에 신애는 자신의 이상적인 가족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가족사진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자, 자신의 인생의 기준이 모두 박살 나게 된다.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는 진공 상태가 된다.

img.png 신애는 아들을 잃고 소파에 좀비처럼 누워있다.



신애의 두 번째 기준 : "기독교의 사랑의 교리"


준이가 죽고 난 후 신애의 심리적 상황은 그녀가 새로운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도록 몰아세운다. 현재 시스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에 신애는 단지 살기 위해 새로운 기준을 찾아야 한다.


절박하게 도움을 바라던 신애는 어떤 교회에 우연히 들어가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전에는 비웃고 거부하던 종교에 눈을 뜬다.


<밀양>은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혐오하는 시선이 없다. 나에게는 영화 속의 기독교인들이 보통의 탐진치를 가진 평균적 선량함을 가진 사람들로 보였다. 여기서 교회는 단지 매개체일 뿐이다. 신애가 우연히 다른 곳에 들어갔었더라면 교회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갔을 것이며, 그래도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img.png 신애는 집에서 기도회를 열만큼 적극적인 교인으로 탈바꿈했다.


신애는 새로 찾은 기준을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한다. 교회의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사랑의 최고 난이도인 '너의 원수를 용서하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까지 실천하려고 한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딛고 남편의 고향에 와서 남편의 꿈을 이루려 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이 믿는 기준을 지키기 위해 가장 하기 어려운 최고 난이도의 일까지도 하려 한다. 이는 마치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래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까?"라고 운명에게 맞서는 것 같다.



2-2> 1번 유형의 분노와 억압


1번 유형은 대체로 스스로에 대해 '착한 사람, 바른 사람,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번 유형의 슈퍼에고는 "나는 옳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사람이고 괜찮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분노는 이런 메시지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1번 유형들은 감정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에 익숙하다.


신애는 준이를 죽인 범인을 파출소에서 마주쳤을 때 자신이 오히려 몸을 움츠리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아들의 장례식 때 자신이 범인에게 말 한마디 못한 것에 대해 통곡하며 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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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는 파출소에서 범인과 마주치자 차마 보지 못하고 외면한다.


신애는 종종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 "좋은 땅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와 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한다. 1번 유형의 이런 식의 말은 슈퍼에고의 억압과 통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답답한 마음의 표출이다.


이렇게 억압한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분노의 원천은 중립적인 에너지일 뿐이다. 오랜 시간 억압된 에너지는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신애는 자주 목 막힘과 가슴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이 우연히 들어간 교회의 통성 기도회에서 해소되는 경험을 하고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된다. 이때 터진 것은 준이 사건뿐 아니라, 신애의 삶 전체에 오랜 시간 퇴적된 분노였을 것이다.

img.png 우연히 들어간 교회에서 통곡하는 신애. 그 뒤에 종찬이 묵묵히 앉아서 신애를 지켜준다.


신애는 준이 사건을 겪은 후에도 피아노 교습을 하고 정상적인 일상 루틴들을 해나갔다. 1번 유형은 기본적으로 장형(행동형)이기 때문에 활동력이 좋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싱크대 앞에서 사과를 깎다 울음을 터뜨린다. 많은 1번 유형들은 이 장면에 대해 공감을 할 것이다.


만약 감정 중심형인 4번 유형이라면 이런 식의 장면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늘 슬픔과 자기 연민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4번 유형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슬픈 음악, 어둑한 조명, 와인 등의 세팅을 갖춰놓고 자신의 심연 속으로 서서히 침잠할 것이다. 이들은 싱크대 앞에서 준비 없이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2-3> 분노의 표출과 시스템의 파괴


신애는 결국 자신의 삶의 '기준'을 두 번 다 파괴한다.


신애의 첫 번째 기준인 '이상적인 가족' 시스템은 남편이 죽었을 때 휘청였고, 준이가 죽고 나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신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남편이 배신을 했을 때, 이미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애의 심연은 붕괴된 시스템을 스스로의 손으로 끝장낸 것일 수도 있다. 준이가 죽은 것에는 신애의 유치한 허세도 한 몫했기 때문이다.


신애의 두 번째 기준인 '기독교의 사랑' 시스템은 범인이 스스로를 용서하고 구원받은 시점에 완전히 박살 난다.


사실 두 번째 기준은 자기기만으로 쌓아 올린 허술한 것이어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이 형이상학적 시스템은 신애에게 굳건한 믿음을 줄 수 없었다. 신애는 원래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애는 믿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운전하며 지나가다가 준이를 유괴하는 것을 도운 범인의 딸을 길에서 우연히 봤을 때 신애에게 이 용서의 강박이 증폭된다.


신애는 그 여자애가 불량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도와주지 않고 그대로 외면해 버린다.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소극적 응징으로 그친다. 신애는 그 순간 범인의 딸에게 극도의 증오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사랑의 교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불안감을 느낀다.

img.png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범인의 딸
img.png 신애는 곤경에 처한 범인의 딸을 외면하고 가지만 마음이 복잡하다.


신애는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위(1번 유형에게는 외면도 충분히 비도덕적이다!)의 순간에 믿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신이 가장 용서하기 힘든 자를 용서해서 이 시스템이 옳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꽃다발을 들고 떨리는 사지를 주체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다'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는데, 범인은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죄인 중에 죄인인 나를 주님께서 용서해 주셔서 요즘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서 '준이 어머님도 주님을 만나셨다니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정말 <밀양>의 하이라이트이다.

img.png 범인을 용서하러 간 신애. 그 뒤에는 늘 그렇듯이 종찬이 서 있다.


신애는 자신이 어렵사리 얻은 새로운 시스템이 사실은 개나 소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값싼 위로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마치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 있는 단 한송의 장미를 애지중지하다가, 다른 별에 와서 지천으로 펴 있는 장미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교도소에서 범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두 번째 시스템도 산산이 부서지고, 신애는 혼절한다.

img.png 범인을 면회한 후 혼절한 신애


이제 신애는 지금까지 배운 예수님의 말씀을 모조리 반대로 실천한다. 범인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녀는 온갖 도전적이고 일탈적인 행위를 한다.


신애는 약국 장로를 꼬드겨 유혹하면서 주먹을 꽉 쥐고 하늘을 도전적인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레코드를 도둑질해서 교회 연합 집회에 나타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서 모인 사람들에게 '시스템이 거짓말'임을 폭로한다. 자기를 위해 철야 기도회를 여는 집 앞에 가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듯이 돌멩이를 던진다.

img.png 신에게 도전하듯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쥔 신애


이제 신애는 자신이 의지하던 모든 시스템을 잃고,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자해를 하고 퇴원했을 때 신애는 말 그대로 '텅 빈 상태'가 되었다.




3. 1번 유형에게 '비밀스러운 햇빛'이 비칠 때


영화는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나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영화 전체에 걸쳐 해답은 계속 스포일러 되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 '밀양(密陽)'의 영어 제목은 'Secret Sunshine(비밀스러운 햇빛)'이다.


'밀(密)'은 ①'빽빽한, 편재한, 어디에나 있는'이라는 뜻도 있고 ②'비밀스러운, 알 수 없는, 숨겨진'이란 뜻도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어디에나 있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데도 비밀스럽다고 한다.


'양(陽)'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행복, 천국, 진리, 영원' 등을 상징하는 태양이다. 태양신은 최고의 신으로도 숭배된다. 최고의 신에게서 나오는 햇빛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아낌없이 공평하게 쏟아진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너무 가까이 자신을 빽빽하게 감싸고 있는 것은 알아보지 못한다. 감각은 금방 익숙하고 둔해져 버린다.


온 세상에 널려 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니 비밀스럽게 숨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탐정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수법 중에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우리가 절망의 순간에 몸부림칠 때도 햇빛은 따사롭게 우리를 비추고 있다. 우리가 절망을 느끼느라 바빠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신애가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져 누워있을 때조차도 한줄기 햇빛이 그녀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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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대구(對句)


<밀양>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완벽한 대구로 완성된다. <마더>의 시작과 엔딩에 나오는 김혜자 배우의 강렬한 모습에 필적할 만하다.


첫 장면은 아들이 차 안에서 유리를 통해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나온다.

img.png <밀양>의 첫 장면 : 신애의 아들이 차 안에서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지막 장면은 신애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안 햇빛이 지저분한 마당을 가려진 스크린 없이 직접 비춘다.

img.png <밀양>의 마지막 장면 : 종찬은 머리를 다듬고 있는 신애에게 거울을 비춰준다.
마지막 장면3.png <밀양>의 마지막 장면 : 지저분한 마당에 내리쬐는 햇빛


첫 장면에서는 아들의 시선으로 하늘을 보았으며, 마지막 장면은 위에서 마당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보여진다.


두 장면은 신애의 관점의 변화를 보여준다.


신애는 처음에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이상을 보았다. 깨끗하게 닦여진 차의 앞 유리는 1번 유형의 기준(삶의 원칙)을 상징한다. 세상에 자신의 기준을 투과하여 맑고 깨끗한 하늘만 허용하려 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겪고 도달한 마지막에는 모든 이상을 내려놓고 하늘에서 현실을 직접 내려다본다. 이상이 아닌 삶의 진짜 모습은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지저분한 마당과 같다.


드디어 신애는 삶을 대하는 시선에 여유와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고통 속에 피어난 꽃과 같이.


어지러운 마당은 1번 유형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무질서이다. 그러나 정리 불가한 것이 삶의 모습이다.


절망에 빠져도 머리 다듬기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은 해야 한다. 삶은 이렇게 가벼운 것이다.

너저분한 마당,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삶은 가볍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인생은 미해결 과제와 함께 계속된다.


신애는 아직 용서도 못했고, 인생의 원칙도 무너졌고,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의 감정도 모르고, 종찬과의 관계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영적 측면에서 봤을 때 영화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는 것은 1번 유형에게 해피엔딩이며 성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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