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 근본적인 '솔직함'에 관하여

책임감과 죄책감의 반대편에는 솔직함이 있다.

by 아닛짜

어떤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며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것 같다. 마치 수증기로 훈증하듯이 슬픔은 조금씩 존재를 잠식한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2023년작 <더 웨일(The Whale)>은 연인을 잃은 슬픔으로 폭식증에 빠져 227kg의 거구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인 '웨일(고래)'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속 흉측하고 포악한 괴물이자, 자기 통제에 실패한 찰리 사스필드(브렌든 프레이저)의 외형을 나타낸다.


그러나 비대한 몸속에 갇힌 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무거운 책임감과 그것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고래이면서 동시에 에이허브 선장인 찰리
2. 이분법적 세계관의 폭력성
3. 근본적인 '솔직함'을 통해 구원에 이르다.




1. 고래이면서 동시에 에이허브 선장인 찰리


영화에서 <모비딕>은 찰리의 심경 변화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찰리는 딸 엘리가 어린 시절에 쓴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를 매일같이 되풀이해 읽는다. 에세이 속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고래에게는 감정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래의 거대한 몸집을 보며 슬픔을 느낀다."


소설 <모비딕>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거대한 흰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항해하다, 결국 사흘간의 사투 끝에 고래와 함께 심해로 침몰하는 에이허브 선장의 이야기이다.


어린 엘리는 에이허브 선장의 증오에 이입하는 대신에, 고래에게 연민과 슬픔을 느꼈다.


언뜻 보면 찰리는 자신을 고래와 동일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고래이며 동시에 에이허브 선장이다.


찰리는 자식과 연인을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고래의 처지에 놓고, 동시에 에이허브 선장이 되어 자신을 증오하며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이 영화는 찰리의 마지막 5일간의 사투를 그린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었던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현상'은 '명백하게 자기 잘못임에도 남을 탓하는 현상'만큼이나 흔한 일이다. 큰 사고를 겪고 홀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짊어지는 죄책감이 그렇다.


찰리 : "미안해."
리즈 : "뭐가 미안해?"
찰리 : "그냥 미안해."
리즈 : "한 번만 더 사과하면 칼로 찔러 버릴 거야!"


찰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미안해하며, 그를 돌보는 유일한 친구 리즈(홍 차우)가 진저리를 칠 정도로 사과를 반복한다.


찰리는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인가?


찰리의 죄책감은 복합적이다. 엘리가 8살 때 가정을 저버렸다는 미안함, 그리고 연인이었던 알란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이 뒤섞여 있다.


동명의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더 웨일>의 공간은 연극적 요소가 확연히 드러난다. 카메라는 찰리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몇몇 방문객만 바뀌며 드나들 뿐이다.


흔한 과거의 회상 장면도 나오지 않으며, 몇 마디 대사로 짐작될 따름이다. 찰리의 집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찰리의 고통스러운 심리 현상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찰리는 스스로 혹독한 자기 처벌의 감옥을 만든다. 그가 화장실을 가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드러난 거대한 몸집은 집을 더 비좁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협소한 공간으로 보이게 한다.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이 바다와 포경선 피쿼드호에 자신을 가두었듯이, 찰리는 폐쇄된 집과 고래 가죽처럼 두꺼운 몸속에 자신을 이중으로 가두어 버린다.

찰리 사스필드. 집과 몸은 그에게 거대한 감옥과도 같다.


찰리의 건강은 일어서고 앉는 일상의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극도로 악화되어 간다. 그는 자신을 돌볼 마음도 없고, 이미 그럴 능력도 소진되었으나, 온라인 글쓰기 강의를 하며 번 돈을 악착같이 저축한다.


죽은 알란에게는 후회뿐이지만, 살아있는 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수단은 돈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이분법적 세계관의 폭력성


찰리의 고립된 일상을 깨고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다.


우연히 찰리의 집을 방문한 전도사 토마스는 '새생명 선교회'의 세계 종말과 구원의 교리를 설파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찰리의 연인 알란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동성애를 죄악시한 그 교회의 압박이었다.


토마스는 찰리를 마주하고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놀랐지만, 곧 찰리가 자신의 아주 훌륭한 선교 대상임을 간파한다.

선교사.jpg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도사처럼 보이는 토마스. 그러나 그에게도 어두운 비밀이 있다.


토마스는 찰리를 구원의 대상으로 보지만, 정작 본인도 횡령이라는 비밀을 안고 고향에서 도망친 처지이다. 그는 자신이 정한 '선과 악'의 잣대에 갇혀, 가족과 교회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타인을 구원하려는 강박으로 상쇄하려 한다.


토마스는 아버지를 찾아온 엘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엘리의 교묘한 유도신문에 걸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의도를 알 수 없는 엘리의 개입으로 뜻밖에도 가족에게 용서받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신의 섭리가 엘리를 통해 이루어져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에 고무되어 가련한 죄인인 찰리도 구하기 위해 달려온다.


"앨런은 구원을 포기했지만 당신은 늦지 않았어요."


그리고 성경 구절을 열정적으로 읽어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장 12~13절)"


"동성애라는 육체의 죄악에서 벗어나서 회개하면 당신도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당사자 앞에서 말하는 패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토마스는 자신의 세계관 밖에 있는 존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과거 사람들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 믿었듯이, 그에게는 자신이 몸담은 교회가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선과 악, 죄와 벌이라는 이분법적 교리를 내재화했다.


많은 교리가 종말론을 근본 토대로 하는 이유는 종말론이야말로 이분법적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곧 종말이 올 것이고, 그때 죄를 지은 사람은 타 죽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만이 구원받기 때문에, 교회가 규정하는 선악의 기준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토마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알란은 단지 찰리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지만, 찰리는 자신처럼 아직 구원받을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의 순진한(?) 충고는 웨이크업 콜이 되어 오히려 찰리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

이분법적 세계관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폭력적인지 간파한 찰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죄책감 속에 숨어있던 '오만'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딸과 알란을 구원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오만이 죄책감을 낳는다. 우리는 애초에 자신의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찰리의 죄책감에는 부모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조장하는 '부모 신화'도 포함된 것 같다. 부모는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에게 모든 것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


찰리는 엘리에게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어 하지만, 엘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딸이 아빠가 죽어가면서 모은 거금을 받고 기뻐할까? 사춘기를 겪는 앨리는 아빠가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자신을 버린 아빠에게 폭언을 퍼붓지만, 사실 영리하고 속이 깊은 아이로 자라났다. 자식들은 부모의 생각보다 강하다.


찰리의 제자였던 나이 차이가 나는 알란은 찰리의 무의식 속에서 보살펴야 할 또 하나의 자식과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인을 잃은 슬픔과 부모의 죄책감이 찰리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구분이 때로는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


채무자와 채권자처럼, 원망과 죄책감 속에서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서 시간의 차례를 달리해서 만난 소중한 친구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홍차우.png 리즈는 냉정한 것 같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 내에서 진정으로 사람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제 찰리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리즈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한 번은 찰리가 샌드위치를 먹다가 목이 막혀 죽을 뻔했는데, 리즈가 하임리히법으로 토해내게 한다. 그리고 리즈는 땅에 떨어진 샌드위치를 집어서 말없이 찰리에게 건네고, 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먹는다.


참 웃프면서도 빛나는 장면이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의 체념과 배려가 보인다. 보통 사람 같으면 걱정이라는 미명하에 인생에 대한 갖가지 충고를 늘어놨을 텐데.


리즈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을 잘 보살피는 사람이다. 반면 토마스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의욕이 충만하지만 정작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뭐라고' '나 뭐 돼?'라는 인생관이 때때로 필요할 수도 있다.




3. 근본적인 '솔직함'을 통해 구원에 이르다.


찰리는 자기 자신을 사과해야 할 오물처럼 생각하며, 가능한 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은둔했다. 그는 온라인 강의를 할 때는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하며 검은 화면 뒤에 숨었고, 피자 배달부와는 문을 사이에 두고 소통했다.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억눌렀던 과거부터, 현재의 망가진 모습까지 모두 감추고 싶어 했다.


죽음이 임박한 찰리는 이제 비겁함을 버리고 카메라를 켜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공개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외친다. "솔직하게 쓰라(Write something honest.)" 이는 곧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유언과도 같다.


'현재의 나'가 '이상적인 나'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죄책감이 싹튼다. 찰리와 토마스는 인생의 현존보다는 당위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비슷하다.


찰리는 다정한 아버지여야 한다는 '당위'와 동성애자라는 '본연의 모습' 사이에서 일생 동안 방황했다. 토마스는 티 없이 순결한 크리스천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비리를 저지른 죄인이다.


찰리는 자기 파괴를 통해 문제를 없애려 했고, 토마스는 신에 의한 타력적 구원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토마스의 위선을 반면교사 삼아, 찰리는 마침내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근본적인 솔직함에 도달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을 통해 '내려놓음'이 가능해진다.


영화의 엔딩에서 찰리는 마치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고래처럼 거구의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일어선다. 이 장면은 찰리가 자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죄책감과 중력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졌음을 상징한다.

비상하는 고래.png


솔직해지는 것, 그것이 찰리가 도달한 진정한 구원이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서로에게 무관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엇을 해주려 하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함께 있는 것'으로 족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서로에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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