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와 <왕좌의 게임> : 이제야 깨닫는 '발라 도하에리스'의 의미
올리베르 라시(Oliver Laxe) 감독의 2025년작 <시라트(Sirat)>는 아무런 정보 없이 마주했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영화다. 나는 아쉽게도 미리 여러 정보를 알고 봤지만, 그래도 충격이 충분히 컸다. 이래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모양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시라트'에 대한 정의로 시작된다.
"시라트는 저승과 이승을 잇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칼날처럼 날카롭다."
아랍어로 '시라트(Sirat)'는 최후의 심판 날, 모든 사람이 건너야 하는 지옥 위의 다리를 뜻한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삶이 끝난 후에 시라트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이미 그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는 과정일 뿐이라고.
영화를 보고 나면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등 우리가 목숨 걸었던 모든 일이 그저 시라트 위에서 벌어지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아무도 주인공이 아닌 영화
2. 인생은 무작위적인 확률 게임인가?
3. '선(Line)'에 갇힌 인간과 거대한 인과의 법칙
4. '발라 도하에리스' : 서로를 섬기는 책무
모로코의 사막, 거대한 스피커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테크노 음악에 맞춰 수백 명의 레이버(Raver)들이 무아지경으로 춤춘다.
광란의 파티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년 남자 루이스(세르지 로페스)와 그의 어린 아들 에스테반(브루노 누녜스)은 실종된 딸을 찾아 군중 사이를 헤맨다.
파티가 한창이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났다며 레이버들을 강제 해산시킨다.
몇몇 레이버들은 순순히 따라가지 않고 샛길로 차를 몰아 도망친다. 루이스 부자는 이들이 다른 레이브 파티를 찾아간다는 말을 듣고, 혹시 그곳에서 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따라간다.
레이버 그룹은 카리스마 넘치는 스페인 여성 제이드(제이드 우키드), 한쪽 다리가 없는 토닌(토닌 한비에르), 덩치 크고 거칠지만 따뜻한 비기(리처드 벨러미), 스테프(스테파니아 가다)와 조시(조슈아 리엄 헨더슨)이다.
이들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실제 레이버라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루이스 역의 세르지 로페즈는 <판의 미로>의 무시무시한 비달 대위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라트> 속 무력한 아버지 모습은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관객들은 이제 본격적인 로드 무비가 시작될 것을 기대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올린 서사는 이야기를 어디로도 끌고 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또 다른 레이브 파티장을 찾아가는 것이나, 루이스의 딸을 찾는 목적은 희미해진다.
3차 대전이라도 난 것 같은 세계의 급박한 상황도 이야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갑자기 러시안룰렛처럼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는 죽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관객은 매우 낯선 영화 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항상 주인공에게 이입해서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무수한 엑스트라들이 죽어 나가도 주인공은 총알도 피하며 살아남는다. 우리도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다. 누구나 '설마 내가? 나는 아니겠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라트>에는 불행을 피해 가는 예외적인 주인공이 없다. 영화는 가장 연약한 존재인 아들 에스테반과 강아지 피파를 가장 먼저 허무하게 앗아간다.
상심한 루이스를 위로하기 위해 일행은 사막 벌판에서 스피커를 설치하고 레이브 파티를 한다. 모두들 음악에 빠져들어 도취된 순간, 제이드와 토닌이 거짓말처럼 '펑' 하고 터져 죽는다.
그곳은 죽음의 지뢰밭이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고 허무하다. 마치 우리가 무심코 길가의 개미 떼를 밟듯, 한 인물의 죽음을 장엄하게 포장하기 위한 서사적 예우는 생략된다.
<시라트>의 죽음의 방식에서 미드 <왕좌의 게임>이 연상된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네드 스타크가 단두대에서 맥없이 목이 잘렸을 때의 충격은 엄청났다.
<왕좌의 게임>의 살벌한 세계관을 상징하는 격언은 '발라 모굴리스(Valar Morghulis)', 즉 '누구나 죽는다.(All men must die)'이다.
<시라트>는 이 격언을 '누구나 지금 순간에 아무 이유 없이 죽을 수 있다.'로 바꿔서 급진적으로 실현한다. '세상은 망해가고 죽음은 바로 너희 옆에 있다.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은 너의 노력이 아니라 단지 행운이다.'라고 말하듯이.
일행은 지뢰밭을 건널 안전한 루트를 찾기 위해 사람이 타지 않은 자동차를 직진시켜 보지만 두 대 모두 지뢰를 밟고 터져버린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루이스는 갑자기 지뢰밭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간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건너편 바위 지대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남아있던 일행은 기적처럼 지뢰밭을 통과한 루이스에게 소리쳐서 묻는다.
스테프와 조시 : "어떻게 한 거예요?"
루이스 : "나도 몰라. 그냥 됐어."
루이스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간 비기는 지뢰를 밟고 죽었다. 이것을 본 스테프와 조시는 개를 품에 안고 눈을 감은 채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성공한다.
따라 해야 할 핵심은 루이스의 발자국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의 '무념무상'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결정론이나 허무주의로 흘러서,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혹은 모든 것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사랑만이 의미를 가지므로,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쉽게 결론 내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의 불합리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해보려 하지만, 인과의 법칙은 우리를 항상 배신한다.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에스테반과 강아지 피파에게 무슨 인과가 있단 말인가? 인과응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의혹과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우리는 신(神)도 만들어보고, 악마, 천국, 지옥도 만들어본다. 결정론이나 허무주의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이다.
인생은 진정 무작위적인 확률 게임인가?
영화는 의도적으로 무수한 선(line)의 이미지를 노출한다.
레이브 파티장에서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선의 형태로 형상화한다. 도로의 노란 중앙선, 타이어 자국도 긴 선처럼 보인다. 자동차와 사람들은 주어진 선을 따라 움직인다. 심지어 스테프가 에스테반의 머리를 레게 스타일로 땋아주는 모양도 복잡한 도로처럼 보인다.
영화는 마치 우리가 '선'이라는 일차원에 갇힌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한 번에 한 걸음씩, 선을 따라가며 살 수밖에 없다. 선의 좌우, 위아래의 다른 영역으로 가서 선을 이탈할 방도가 없다.
광란의 레이브 파티는 무질서한 것 같지만, 테크노 음악도 사실 계속 반복되는 비트의 연속이다. 레이버들은 그 비트의 선을 빠져나오지 못해 몇 날 며칠을 머무른다.
우리는 선 상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우연처럼 보인다.
내가 능동적으로 어떻게 해서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선상에 있는 작은 존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선 밖의 다차원 세계의 영향 아래에 있다.
우리가 보는 '선' 너머의 입체적인 인과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시작일지 모른다.
불교에서는 올바른 견해(정견)를 수행의 근본이라고 본다. 그래서 불교 수행법의 대표인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正見)이다. 붓다는 바르지 못한 견해를 대중에게 설파하는 사람들을 매섭게 비난했는데, 그중에서도 결정론자인 막칼리 고살라의 견해를 가장 해롭다고 보았다.
막칼리 고살라는 인간의 운명은 고정되어 있으며, 선행이나 악행 등의 업(業)은 사후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인과의 법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인과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수행이나 도덕적 행위의 필요성은 사라진다. 막칼리는 모든 중생은 840만 대겁이라는 오랜 윤회의 과정을 거치면, 수행 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해탈에 이른다는 '무인무연(無因無緣)'의 자연 해탈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시라트>를 보고 막칼리의 이론처럼 인간이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이 쉽게 절망에 빠지는 밑바탕에는 자신이 경험한 작은 조각을 보고 전체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 지적, 감각적 한계를 가지고 시공간에 갇혀 있는 작은 존재가 우주의 거대한 인과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라트>의 비극을 단지 운이 없어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루이스 일행이 밟은 지뢰는 인류의 폭력성이 쌓여 만들어진 필연적 결과물이다. 개개인의 삶은 무고해 보일지라도, 인류라는 집단이 쌓아온 업(業)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영화는 비정하게 비춘다.
자기 중심적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해질 때, 비로소 이 거대한 우주의 신비가 보일 것이다.
다시 <왕좌의 게임>으로 돌아가서, 에소스 서부 지역에서는 누가 '발라 모굴리스'라고 하면 '발라 도하에리스(Valar Dohaeris)'라고 응답하는 관습이 있다. 발라 도하에리스는 '모든 사람은 섬겨야 한다.(All men must serve.)'는 뜻이다.
나는 <왕좌의 게임>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발라 도하에리스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지나쳤다.
그러나 <시라트>의 위태로운 다리 위에서야 비로소 이 응답의 무게를 실감했다.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매드 맥스>의 폭군들처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시라트>의 무력한 인물들처럼 내 주변 사람들을 섬기며 보살필 수도 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내디딜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필멸자들끼리 서로 섬기는 것이 최선이다.
루이스는 레이버들에게 기름값을 내어주고, 레이버들은 진창에 빠진 루이스의 차를 함께 건져 올린다. 식량을 아껴야 한다는 아빠의 만류에도 조금 남은 초콜릿을 기꺼이 나누려던 에스테반의 마음은 이 위태로운 다리 위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은 결국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큰 그림을 그리고 인생 전체를 조망하고, 삶에 너무 많은 의도와 소망을 투여하는 것을 멈추고, 그저 한 걸음씩 이 순간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라트 위에서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존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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