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 | 가족을 지킨다는 '폭력'의 이중성

['폭력의 역사'와 '어쩔수가없다'의 평행이론]

by 아닛짜

가정부터 학교, 지역사회, 국가, 지구까지 크든 작든 모든 집단의 사람들이 '평화(peace)'만큼 바라는 것이 있을까?

인류 역사상 단 한 순간도 전쟁과 다툼이 멈춘 적이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희소하고 갖지 못한 것들을 갈망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인류의 영원한 숙원은 아마도 '평화'일 것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2005)는 인류가 스스로 바라는 바와는 정반대로 얼마나 폭력에 깊게 물들어 있으며, 그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격투기나 거친 스포츠에 열광하고, 영화 속 폭력을 '스펙터클'하다거나 볼거리가 풍부하다고 말한다. 현실의 폭력에는 반대하면서도, '이건 진짜가 아니잖아'라고 안심시키며 안전한 공간에서 남몰래 폭력에 매혹된다.


<폭력의 역사>는 톰 스톨(비고 모텐슨)이라는 한 개인뿐 아니라 톰이 대표하는 폭력이라는 속성이 인류의 역사에서 어떻게 이중적으로 인식되어 왔는지에 관한 건조한 이야기이다. 누구를 탓하거나 두둔하지 않으며,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폭력의 세계와 아메리칸 스위트 홈

2. '폭력의 역사'와 '어쩔수가없다'의 평행이론

3. '가족을 지키는 정당방위'와 '타인을 파괴하는 폭력'의 사이는 얼마나 먼가?


1. 폭력의 세계와 아메리칸 스위트 홈


영화의 오프닝은 조직원 두 사람이 고속도로변 모텔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여름의 매미가 세차게 울어대는 찜통더위 속에서 이들은 지루하고 짜증에 절어 있다. 이들은 단지 짜증 난다는 이유로 모텔 직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는 냉혈한이다.


반면 톰과 에디의 가정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 막내딸 새라가 한밤중에 악몽을 꾸면 온 가족이 달려와서 달래주고, 아들 잭은 아버지에게 시시콜콜한 학교 고민까지 말할 수 있다. 톰과 에디는 여전히 낭만적인 사랑을 하는 잉꼬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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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과 에디는 아들과 딸을 둔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이들 부부는 결혼기념일에 단둘이 데이트할 생각에 들떠 있다.


영화는 이 대조적인 두 세계를 교차해 보여준다.

킬러들의 폭력의 세계와 단란한 아메리칸 스위트 홈은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얀 천에 물감이 번지듯, 이들의 경계는 서서히 허물어진다.

영화는 폭력이 얼마나 다른 얼굴과 이름을 가지고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중서부의 작은 마을 밀브룩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 톰 스톨. 그는 어느 날 식당을 습격한 2인조 강도(오프닝의 그 살인마들!)를 믿을 수 없는 속도와 움직임으로 간단히 제압한다.


이 사건으로 톰은 일약 전국적인 영웅이 된다. 가족과 이웃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정작 톰은 왠지 이 분위기를 꺼리며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 후로 무시무시한 킬러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톰을 계속 '조이'라고 부른다.

지역 경찰이자 톰 부부의 친구인 샘은 그들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한다.


샘 : "제가 한 말씀 드리죠. 여긴 선한 사람들이 사는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저흰 그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죠."


이곳은 너희와 아무 상관없는 '선한 사람들'의 영역이니, '악의 영역'인 너희 세계로 꺼지라는 점잖은 경고다. 하지만 내면의 선과 악의 경계도 물리적 장소처럼 명확히 나뉠 수 있을까?


감독은 폭력배 빌리가 모텔 문을 나서며 삐뚤어진 의자를 바로잡는 모습과, 톰이 가게 앞의 빈 캔을 치우는 모습을 유사하게 배치한다. 빌리와 톰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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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바로 잡는 빌리와 쓰레기를 치우는 톰은 비슷한 강박적 내면을 가지고 있다.


밀브룩의 톰 스톨과 필라델피아 출신의 조이 쿠삭. 둘 사이는 얼마나 먼가?


톰은 계속 부인하다가 결국 에디에게 자신이 조이였음을 시인한다. (누구도 아내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에디 : "진실을 말해줘. 내 눈앞에서 당신이 조이로 돌변했다고. 당신이 필라델피아에서 사람들을 죽인 거야?"

톰 : "조이가 그런 거지. 톰 스톨은 아냐. 나도 조이를 다시 볼 줄 몰랐어. 내가 조이 쿠삭을 죽인 줄만 알았어. 사막으로 가서 그를 죽였다고 생각했어."


톰(조이)의 형 리치는 묻는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며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지 반세월이 다 됐군. 이봐, 꿈을 꿀 땐 여전히 조이가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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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톰'과 무자비한 '조이' 사이의 미세한 변화는 다중 인격처럼 느껴진다. 비고 모텐슨의 표정 변화가 압권이다.




2. '폭력의 역사'와 '어쩔수가없다'의 평행이론


2005년작 <폭력의 역사>를 보면서, 2025년도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였다.


톰 스톨과 유만수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큰아들, 막내딸을 둔 가장이다.

이들은 가족을 사랑하며 책임감이 투철한 가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과거도 성격도 판이하다.

하지만 이들의 단 하나의 접점은 바로 '폭력'이다.

서로 다른 이유로 가족이 붕괴될 위기에 봉착하자 이들은 폭력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가장의 변화에 따른 가족들의 반응과 변화도 흥미로운 평행선을 이룬다.


만수의 아내 미리는 남편의 행적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파헤치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내는 모습에 동조한다.


만수는 아들이 핸드폰 대리점을 털다 걸리자 공범에게 덮어씌우라고 아들을 설득하고, 대리점 사장을 협박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미리는 이런 해결사 같은 남편이 내심 뿌듯하다.


톰의 아내 에디 역시 처음에는 조이의 실체에 경악하지만, 계단에서의 거친 정사 장면을 통해 모순적 반응을 보인다.

에디는 다정한 남편 '톰'이 아니라 낯선 괴물 '조이'에게 거세게 저항한다. 조이가 순간 움찔하며 다시 톰으로 돌아가서 물러서려 할 때, 에디는 오히려 조이의 머리를 끌어당겨 거칠게 키스한다.


그녀는 남편의 폭력적 남성성을 혐오하며 동시에 본능적으로 매혹된다. 강력한 힘은 동시에 '강력한 보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권력관계를 터득하고, 대의명분을 얻는다.

톰의 아들 잭은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한 후, 괴롭힘을 당하던 비굴한 소년에서 무자비한 응징자로 변모한다. 만수의 아들 시원 역시 가족 경제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일탈을 감행한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사적 제재의 정당성'을 상속받은 셈이다.


만수의 막내딸 리원은 자폐에서 벗어나 드디어 첼로 연주를 가족들에게 들려준다. 아기 같던 톰의 딸 새라는 왠지 성숙해졌다.


<폭력의 역사>의 엔딩, 톰이 필라델피아에서 할 일(살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은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가족은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톰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무엇을 묵인했는지 알고 있다. 어린 새라까지도 침묵에 동참한다.


'불편한 침묵'은 바로 미국 사회가 과거의 폭력을 처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자신의 잔혹한 건국사를 세탁하고, 그 위에 '평화로운 가족주의'라는 신화를 세웠는지를 노골적으로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평가한다.


인종 차별, 학살, 침략적 전쟁 등의 역사를 '아메리칸 드림'이나 '아메리칸 스위트 홈'이라는 미명 아래 덮어두고 살아가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불안과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모든 폭력을 집안 내부에 가둘 수 있다고 믿지만, 마루 밑에서는 시한폭탄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식탁장면.png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 사이에는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모두 진실을 알지만 누구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3. '가족을 지키는 정당방위'와 '타인을 파괴하는 폭력'의 사이는 얼마나 먼가?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폭력을 근절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요가와 불교의 제1 계율은 공통적으로 아힘사(비폭력)이다.

여기서 '폭력'은 단지 물리적인 폭력 행위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향한 해로운 의도'를 포함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폭력에서는 어느 누구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비폭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말로든 생각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해코지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비폭력이라는 당위와 폭력적인 현실 사이의 괴리폭력의 등급 나누기와 이름을 붙이기로 손쉽게 해결해 왔다.


나와 가족, 국가를 지키는 것은 '정당방위'이자 '정의'이며, 나아가 '영웅적인 행위'이자 '성전'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국가를 지키는 것은 '폭력'이며 '범죄'라고 규정된다.


평범한 가장 톰이 폭력배들을 순식간에 제압할 때, 우리는 공포보다 기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는 우리 안의 억눌린 공격성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해방될 때 느끼는 원초적 본능이다.


명분을 지닌 방어자인 톰 스톨과 파괴자인 조이 쿠삭은 구분될 수 있는가?

'나를 지키기 위한 폭력'은 결국 '타인을 파괴하는 폭력'과 같은 뿌리로 이어져 있다.


마크 트웨인의 단편 <전쟁을 위한 기도>에는 이 잔혹한 진실이 담겨 있다.


필리핀을 두고 미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 교회에 모여서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노인이 기도의 진짜 의미를 이렇게 읊어준다.


"오, 주여.

우리의 병사들이 그들의 병사들을 찢어 죽이게 하소서.

우리의 포탄으로 그들의 병사들을 피투성이로 찢게 하소서.

그들의 웃음 짓던 들판을 창백한 죽음의 시신들로 뒤덮게 하소서.


그들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의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게 하소서.

그들의 소박한 집을 불길로 쓸어버리게 하소서.

그들의 죄 없는 아내의 가슴을 끝없는 슬픔으로 짓이기게 하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여, 우리를 위해 그들의 희망을 짓밟게 하소서."



당신이 승리를 위해 기도할 때, 당신은 그 승리와 함께 반드시 따라올 수많은 결과들 – 말하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 – 을 함께 기도한 것이다. 당신이 축복을 간구할 때,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한 것이다.


톰이 살육 후 반복해서 손을 씻어도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듯이, 폭력은 한 번 시작되면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얼룩이 된다.


<폭력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이며,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인간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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