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에니어그램] 6번 유형이 끝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찰리 카우프만 감독의 <이젠 그만 끝낼까 해(I'm Thinking of Ending Things)>(2020)는 두 번 보면 더 재미있는 영화다.
한 번 보고 반전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보면 스쳐 지나갔던 대사와 장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외부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한 남자의 복잡한 내면의 미로를 따라간다.
우리는 이 남자, 제이크(제시 플레먼스)의 심리구조에 동화되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가 한 잔의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으며 과거의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듯이, 제이크의 감각 작용으로 촉발된 환상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우리가 제이크의 홍차 속에 푹 담길수록 놀라운 영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에니어그램 6번 유형의 딜레마
2. 삐걱대는 '제이크의 연애 조작단'
3. 시간. 늙음. 이젠 그만 끝낼까 해...
무엇보다 제이크의 내면 풍경이 중요한 영화이므로, 먼저 제이크의 심리 유형을 밝혀보려 한다.
심리 유형 이론인 에니어그램을 적용해 볼 때, 제이크는 머리형 6번 유형일 확률이 매우 높다.
정확히 말하면, 5번 날개를 쓰는 6번 유형(6W5)이다.
제이크 :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Sometimes the thought is closer to the truth, to reality, than action)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거든."
제이크의 이 말은 그가 에니어그램의 기본적 분류인 세 가지 자아(힘), 즉 장형, 가슴형, 머리형 중에서 머리형(사고형)이 확실함을 보여준다.
생각(意), 말(口), 행동(身)은 인간이 세상과 교류하는 세 가지의 주요한 통로이다.
우리는 모든 통로로 갖가지 '업(業)'을 짓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하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며, 말은 행동과 생각을 촉진하고, 행동은 생각과 말을 강화한다.
에니어그램의 세 가지 자아는 삼업을 짓는 구조가 조금씩 다르다.
장형은 행동의 비중이 가장 크고, 가슴형은 말에 사로잡히고, 머리형은 생각에 지배된다.
머리형이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은 한걸음 물러서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임없이 누수된다.
머리형은 끝없는 준비 모드에 갇혀 있거나, 자신의 생각과 현실을 혼동하기 일쑤다.
제이크 : "너는 여기서 안전해. 이 안은 안전하고 조용하다."
머리형은 세상과의 접속이 불안정한 유형이어서 불안과 두려움이 많다.
이들에게 자신의 머릿속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집이다.
제이크를 머리형(5, 6, 7번) 중에 6번 유형으로 보는 이유는 6번의 복합성 때문이다.
세 가지 자아는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본능)', '가슴(감정)', '머리(사고)'는 우리가 세상에 대처하는 세 가지 기본 에너지이다.
세 가지 에너지를 가장 단일하게 드러내는 유형도 있고, 좀 더 복합적으로 운용하는 유형도 있다.
머리형에 속하는 5, 6, 7번 중에서, 5번은 가장 순수하게 사고 에너지를 쓰는 머리형이고, 7번은 장 에너지를 쓰는 머리형이고, 6번은 감정 에너지를 쓰는 머리형이다.
다시 말하면, 5번은 '머리-머리형'이고, 7번은 '머리-장형'이고, 6번은 '머리-가슴형'이라고 할 수 있다.
6번은 감정을 직접 느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해석하여 경험한다.
극히 내향적이면서도 관계를 갈망하는 제이크는 감정과 사고가 얽혀있는 6번 유형이다.
6번은 에너지를 양방향으로 사용한다. 이들은 외부 세계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내면으로 뛰어들어온다. 그러다가 다시 자신의 감정에 겁을 먹고 에너지를 외부로 돌린다.
불안 때문에 이들의 주의는 마치 탁구공처럼 안팎으로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여기에 6번의 고질적인 딜레마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자 화자는 루시(제시 버클리)이다.
루시는 제이크와 사귄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와 함께 시골에 있는 그의 부모님 댁을 방문하러 가는 설정이다.
눈보라가 치는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루시는 제이크와 대화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독백한다. 루시의 독백은 대부분 "이젠 그만 끝낼까 해"라는 말로 시작된다.
반전부터 말하면, 이 상황은 모두 제이크의 머릿속 환상이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처럼 현재의 제이크와 그의 환상이 섞여 있다. 혹은 제이크 본체가 아바타 제이크와 주변 인물들을 조종하는 창조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본체 제이크는 한 고등학교의 청소원이다. 흰머리가 가득하고, 등은 굽고 배가 나온, 우울한 노인.
루시는 제이크의 이상적인 여자친구이면서, 동시에 제이크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는 어떤 제약도 없고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지만, 경험이 빈약하면 상상도 엉성해진다.
제이크는 여자들에게 불쾌감 외에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하는 유형이다. 여자들에게 그의 얼굴은 '40년 전 나를 물었던 모기의 얼굴'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이크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친밀한 관계를 기대하지만, 상상 속의 '제이크의 연애 조작단'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시작은 좋았다. 여자친구를 만나 차에 태웠을 때만 해도 활기차고 즐거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눈보라 치는 날씨처럼 점점 무겁고 우울해진다.
상상 속에서도 제이크의 황량하고 불안한 내면이 반영된다. 그의 말대로 생각은 거짓말할 수 없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제이크는 방에 틀어박혀서 책과 영화에 빠지거나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아이였다.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결국 자기가 봤던 책이나 영화를 분석하는 지적인 토론의 장이 되어버린다.
사실 머리형들은 이런 대화를 무척 즐긴다. 비슷한 지식 취향을 가지고 공감해 주는 상대에게 맘껏 지식 자랑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머리형들의 축제다.
자기가 아는 모든 뮤지컬을 나열하기, 낱말 맞히기, 독창적인 시각으로 비평하기, 상황에 딱 맞는 명언 인용하기, 단어의 기원 설명하기. (모두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로스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로스도 6번이다.)
그리고 이들은 상대방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제이크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상의 여자친구조차 그를 만나면서 마음속으로는 계속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루시의 독백 : '이젠 그만 끝낼까 해. 이렇게 계속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어떻게 흘러갈지 뻔하다.'
루시의 생각은 제이크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머리형의 불안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못 견디며, 모든 일의 결론을 미리 확정하려 한다. 논리적 추론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하다고 믿는다.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노인 제이크의 모습이 삽입되면서, 그의 경험과 일상의 감각들이 환상과 촘촘히 결합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예를 들면, 노인이 여주인공의 이름이 '이본'인 영화를 보면, 환상 속에서는 루시에게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가 '이본'이라고 나오는 식이다.
'루시'라는 이름도 자신이 좋아하는 워즈워스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상상 속에서 루시는 '루치아'였다가 '루이사'였다가, '에임스'가 되기도 한다. 직업도 물리학자에서 화가, 노인학 연구자, 웨이트리스, 영화학도로 변한다.
방문한 부모님의 농장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제이크가 언급한 워즈워스의 이상한 제목의 시, '어린 시절 추억의 불멸성이 남긴 자취에 대한 송가'처럼,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노인은 이런 상상을 이번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비슷한 내용을 계속 변주해 가면서 괴로운 현실을 견뎌왔을 것이다.
환상도 나름의 경계와 개연성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노인의 내면에서는 날이 갈수록 비루해지는 현실과 자신이 창조한 환상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제 환상의 규칙은 다 깨지고 막바지가 되면 더 노골적인 상상의 폭발이 일어난다. 지금까지는 현실에 기반한 각색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판타지 영화를 찍고 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에 부적응한 내성적인 남자가 이상적인 여자친구와 사귀는 몽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루시는 여자친구라기보다는 제이크 자신이다. 루시는 제이크의 모든 경험이 퀼트처럼 엮어져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가 읽었던 책, 본 영화, 들었던 비평의 파편들이 인격화한 것이다.
루시가 계속 되뇌는 "이젠 그만 끝낼까 해."는 제이크의 현재 상황을 복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제이크는 삶과의 줄다리기를 그만두고, 세상과의 연결을 끝맺으려는 것이다.
제이크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하는 것은 노인을 배척하는 냉담한 사회도, 어린 시절의 심리적 트라우마도, 고독한 일상도 아니다.
그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시간과 늙음이다.
자연적인 생물학적 주기, 그 자체가 최종 빌런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을 통과한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우린 정지해 있고 시간이 우리를 통과한다. 찬바람처럼 불어와 우리의 열기를 훔친 후 트고 얼어붙게 한다. 그러다 죽겠지."
"모든 건 죽어야 한다. 그건 진실이다.
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려는 이들도 있다. 죽음을 초월해서 살 수 있다고.
그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믿는 인간만의 환상이다.
나아지지 않을 걸 인간만이 알기에 생겨난 걸지도 모른다.
확실히 알 길이 없지만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은 현재에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명한다."
인간은 시간, 늙음, 죽음이라는 절망의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갖가지 거짓말에 기꺼이 속는다.
그리고 애써 만든 희망의 촛불을 애지중지하지만, 때가 되면 강풍이 불어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제이크는 많은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서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그가 믿었던 거짓말과 그가 마침내 깨달은 진실은 이렇다.
"나아질 거다." → "더 나빠질 거다. 지금이 너의 정점이다."
"너무 늦은 건 아니다." → "너무 늦었다."
"신은 계획이 있으시다." → "신은 너에게 관심이 없으시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줄 뿐이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해는 뜨지 않는다."
"불행 끝에 망할 희망이 온다." → "문제는 불행이 떼로 몰려온다는 것이다."
"누구나 짝이 있다." → "우리는 신발이 아니다."
"신은 감당 못 할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 → "고난을 극복한 극소수의 초인 뒤에 쓰러져 있는 무수한 존재들을 보라."
제이크는 자신을 더럽게 오랫동안 고문했던 고등학교의 눈 쌓인 운동장에서 이젠 그만 끝내기로 한다.
그는 시동 끈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환상에 사로잡힌다.
환상은 어린 시절부터 늘 보던 아이스크림 커머셜 송, 구더기가 끓는 돼지, 길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종지부를 축하하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정점을 찍는다.
구더기가 들끓는 돼지는 앞장서 가며 그에게 말한다.
"네가 돼지라는 사실을 슬퍼하지 마. 더 나쁜 건 구더기가 들끓는 돼지라는 거야. 누군가는 구더기가 들끓는 돼지여야 하잖아. 네가 걸린 거야, 순전히 운이지. 그런 패를 받았더라도 나아가."
영화에서 계속 나오는 두 가지 대사가 있다.
하나는 루시가 중얼거리는 "이젠 그만 끝낼까 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제이크가 자신의 삶에 대한 내린 결론이다.
또 하나는 끊임없는 의심과 관련된다.
이 말은 제이크가 하기도 하고, 루시의 전화기 음성 메시지로도 나오며, 영화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풀어야 할 의문은 단 하나다. 무섭다. 내가 미쳤나. 정신이 혼미하다.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제이크의 머리는 '끝내야 한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제이크의 가슴은 의문과 혼란에 사로잡힌다.
결정을 내리고 나서 오히려 그 결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6번 유형의 독특한 특징이다.
머리형들은 대체로 확신의 기반이 얕다.
제이크가 생각하는 거짓과 진실은 그의 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몸뚱이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이성의 논리는 그 전제만 바꾸어 주면 수많은 상반된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본능형이나 감정형은 좀 더 체험적이고 감각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전제에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논리는 마음속의 관념이기 때문에 확신의 기반이 얇다. 그래서 머리형은 자신의 취약한 기반을 극단적으로 믿거나, 허무함으로 빠져들기 쉽다.
한순간의 자기 생각을 확신하는 것.
생각을 통해 미지의 것을 안다는 거대한 자만심.
이런 지적 확신은 현실에 부딪히면 종이처럼 가볍게 구겨진다.
아무리 자신이 생각이 옳다고 한들 무인도에서는 무수한 생각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이크 : "따지고 보면 불평이 너무 많아."
루시 : "다들 그럴 때 있잖아. 얼마나 괜찮은지 모르고 불평하는 때."
제이크 : "그래서 나는 자동차 여행이 좋아. 새삼 깨닫게 되거든. 내 머릿속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
제이크가 '내 머릿속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다'는 자신의 통찰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어땠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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