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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향기 #1 | 6번이 자살을 결심할 때

[영화 속 에니어그램 #11] 6번 유형 탐구하기

by 아닛짜

자살을 결심한 남자, 바디는 여기저기 차를 몰고 다니며 자신의 자살을 마무리해 줄 도우미를 구한다.


관객들은 바디의 과거가 어떠했으며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꾹 다문 고집스러운 입술이 그의 굳은 결심을 보여줄 뿐이다.

자살 조력자를 물색하며 드라이브하는 주인공 바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Taste of Cherry)>(1997)는 바디의 로드 무비라고 할 수 있다.


영화많은 시간은 차 안에서 이루어진다. 영화의 시점은 주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동승자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바디의 차에 올라탔던 세 명의 동행자처럼 바디를 옆에서 지켜보거나, 바디가 차 안에서 보는 풍경들을 그대로 보고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동행자의 시점에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덜컹거리는 황량한 흙길, 주변 풍경, 의미 없는 소음들, 먼지 가득한 공사장, 흙더미 등은 그대로 바디의 마음의 풍경이다.


img.png 바디의 마음은 흙먼지 가득한 공사장처럼 뿌옇다.
img.png 바디는 오랫동안 앉아서 넋을 놓고 흙먼지를 쳐다본다. 공사장 인부가 보다 못해 위험하다며 저리 가라고 할 때까지 그러고 있다.




6번 유형이 죽음을 결심하는 방법


영화 속 인물의 에니어그램 유형을 추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인물의 총체적 삶이 아니라 삶의 어느 순간의 단면만을 알 수 있을 때는 더욱더 그렇다.


이번 글에서는 에니어그램 유형을 찾는 과정을 설명해보려고 한다.


에니어그램 유형이 확실치 않을 때는, 처음부터 아홉 가지 유형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세 가지 힘(머리형, 가슴형, 장형)' 중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를 먼저 관찰하는 것이 좋다. 그다음에 각 그룹에 속하는 세 가지 유형들의 가능성을 검토해 나가면 된다. 예를 들면, 먼저 장형으로 결정했다면, 8번, 9번, 1번 유형 중의 하나로 추론을 좁혀가면 된다.


E-세가지힘의중심.png 세 가지 힘의 중심 - 머리형, 가슴형, 장형


우리는 바디의 성장 과정이나 가족 관계, 영화 속 이야기의 전후 사정, 심지어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바디를 머리형 6번 유형이라고 추측해 본다.



1> 바디가 '머리형'인 이유


세 가지의 힘을 간단하게 구분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얼굴 표정이다.


대단히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이 표정을 숨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포커페이스'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인간은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표정으로는 거짓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 구조는 얼굴 근육의 아주 섬세한 움직임을 컨트롤하도록 진화되어 왔다. 얼굴 표정에서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만의 독특한 정신 활동이다. 함께 모여 살아야만 하는 환경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얼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감각 기관들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얼굴 근육이 그것에 즉각 반응한다. 자신의 정신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표정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얼굴 근육들은 특정 형태로 굳어지고, 마치 얼굴에 그려놓은 것처럼 고정된다. 화내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화'가 어느덧 얼굴에 그려진다.


"생긴 대로 산다."라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정확히 선후 관계로 말하자면 "살아가는 대로 생겨진다."이다.


바디의 얼굴 표정은 굳어 있고, 입술은 한 일자로 꾹 다문채 긴장되어 있다. 입 주변은 항상 경직되어 있다. 일단 그는 풍부한 표정 근육을 사용하는 감정형은 아닐 확률이 크다.


세 가지 힘을 구분하는 두 번째 방법은 사람들과의 관계 방식이다.


바디가 사람들과 접촉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일방통행식으로 전달한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고, 상대방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바디는 사람 간의 교감을 중시하는 변연계 중심의 감정형일 수는 없다. 그러면 머리형 또는 장형으로 판단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지금 바디는 온통 자신의 문제에 빠져 있어서 타인이나 주변과 관계할 여유가 없다. 그러나 바디가 행동 중심의 장형이라면, 자살 도우미를 구한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형들은 행동하며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 진작에 충동적으로 극단적 방법을 실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디의 조심스럽고 치밀한 행동은 머리형(사고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2> 바디가 6번 유형인 이유


그러면 이제 머리형에 속하는 5번, 6번, 7번 중에 어떤 유형인지를 찾으면 된다.


머리형의 핵심 감정은 '불안, 두려움'이다. 이들은 땅에서부터 나오는 원초적 본능 에너지와 접촉불량이다. 그래서 불안을 머릿속의 시나리오를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그 불안 해결 방식의 차이에 따라 5번, 6번, 7번으로 유형이 달라진다.


바디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화법은 논리적이지만 자신만의 생각에 단단히 갇혀있다. 바디의 생각의 뿌리는 불안에서 출발하여, 세상에 대한 부정성과 의심을 전제로 하여 모든 생각이 펼쳐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계속 이런 의문이 든다. 바디는 왜 자살 도우미를 구하는 것일까?


아마도 죽음 후에 남겨질 자기 시신의 안위가 걱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극도의 안전주의적 성향인 6번 유형의 방식이다.


영화에서 바디가 까마귀 떼가 지상에 내려앉았다가 날아가는 광경을 쳐다보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바깥세상의 풍경이 바디의 마음속 풍경과 동기화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바디는 까마귀 떼를 보며 자신의 방치된 시체가 까마귀들에게 훼손되는 것을 우울하게 상상했을 것이다.


바디는 사람들에게 부탁할 때, 새벽에 자신이 자살한 장소에 와서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디 씨, 바디 씨, 바디 씨" 이렇게 세 번 부르고, 정말 죽었으면 흙을 덮어달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의 자살은 6번 유형의 치밀한 사고방식이다. 자신이 죽은 후 시체가 까마귀에게 뜯어 먹히는 상황이나, 자신이 혹시 안 죽었는데 생매장될 상황까지 걱정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이 든다. 그러면 전문적으로 무덤 파는 사람을 구하면 될 텐데, 어렵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부탁하는가?


바디는 정말 자살을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도우미를 구한다는 명목 하에 계속 죽음을 유예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버릴 만큼 인생이란 것이 진실로 가치 없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는 진실된 친구를 원하며, 자신을 진정으로 도와줄 구원자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6번 유형의 내면에는 항상 위원회가 열린다. 여러 위원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결론을 내지 못한다. 6번 유형은 자신의 사고와 결정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6번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권위자나 자신이 확실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갈구한다. 심리학적으로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찾는 것이다.


그러한 대상이 앞에 나타나면 6번은 맹목적 충성파가 된다. 그러나 충성을 바치면서도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이런 의심 성향은 우수한 탐정의 자질이 된다. 세계의 유명한 탐정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6번 유형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바디가 만난 세 번째 동승자는 박제사 노인이었다. 그는 바디가 원하던 그런 현명한 조언자였으나, 바디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6번은 자살을 결심했고, 이제 까다로운 6번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 남았다.


노인과 바디가 드라이브하며 주고받는 대화들은 생사를 걸고 하는 검투사들의 대결 못지않다. 노인이 이기면 바디는 살고, 노인이 지면 바디는 죽는 것이다. '정신적 격투' 장르가 있다면 바로 이 영화와 같지 않을까 한다.


두 번째 글에서 6번 바디의 점진적인 변화 과정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마치 일류 요리사가 다루기 어려운 식재료를 해체하여 멋진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이제 인생 내공 9단인 노인의 솜씨가 펼쳐진다.


img.png <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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