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에니어그램 #12] 6번 유형의 변화 과정
바디는 차 안에서 바깥을 살펴보면서 자신을 도와줄 단 한 사람을 찾는다. 그는 오직 자신의 부탁을 실행해 줄 가능성이 있는지 아닌지로만 사람들을 식별한다. 그래서 여럿이 모여 있거나, 동행이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고, 오직 혼자 있는 사람들만을 매의 눈으로 물색한다.
# 이 글은 첫 번째 글과 연결된 내용이므로 먼저 다음 링크를 읽고 돌아올 것을 강추합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세 명의 자살 도우미 후보
1-1> 첫 번째와 두 번째 동승자 - '바디는 그들과 통(通)하지 못했다.'
1-2> 세 번째 동승자, 박제사 노인 - '바디, 임자를 만나다'
2. 이란의 새옹지마
2-1> 첫 번째 충고 : 가지 않은 길
2-2> 두 번째 충고 : "삶의 축복은 체리 향기와 같다."
2-3> 세 번째 충고 : 터키 사람에 대한 조크
3. 마음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
3-1> 마음작용의 세 가지 측면
3-2> 바디의 마음의 변화 과정
바디는 결국 세 사람을 자신의 차에 태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그들을 열심히 설득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1-1> 첫 번째와 두 번째 동승자 - '바디는 그들과 통(通)하지 못했다.'
그는 '나는 단지 자살 후 간단한 뒷수습을 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굳게 믿고, 오직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들과 접촉한다.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호의에 응해 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그의 부탁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바디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목적대로 대화를 이끌어간다.
먼저 상대의 재정 상태를 떠보고 돈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신이 부탁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이며, 작은 호의를 베풀고 돈까지 얻을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상대방은 바로 눈치챈다. '이 사람은 나를 일종의 도구로써 필요로 하고 있구나.' 도구로 이용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고 시체 위에 흙을 덮어주는 일도 상당히 꺼림칙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런 일을 선뜻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동승자는 소심하고 뭔가 어리바리한 어린 군인이다. 군대에서 고생깨나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바디의 무리한 부탁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결국 차에서 뛰어내려 저 멀리 도망간다.
두 번째 동승자는 독실한 신학생이다. 그는 바디의 말을 포용적으로 다 들어주기는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학적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을 방조할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문득 '지금의 한국이라면 어땠을까'하고 궁금해졌다.
아마도 '내가 직접 죽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도와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내가 안 도와줘도 어차피 그는 죽을 텐데. 그도 원하는 것을 얻고 나도 여윳돈이 생기니 모두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바디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혹은, 돈만 챙기고 다음날 새벽에 안 가보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바디의 말은 자본주의의 극점을 이미 넘어선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한 설득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란은 어쨌든 종교적 전통이 강한 지역이어서 종교적 도덕관념이 실용주의를 능가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종교가 정치, 사회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논외로 하고, 적어도 제대로 된 종교라면 인간의 평균적 심성의 지지대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이 적어도 인간의 기본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바디는 계속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자신이 정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는 모르고 있다. 자신이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기는 쉽지 않다. 그의 설득은 계속 실패로 돌아간다.
1-2> 세 번째 동승자, 박제사 노인 - '바디, 임자를 만나다'
바디는 드디어 적임자를 만난다.
마지막 동승자인 노인은 바디의 요구를 황당해하지 않으며 선선히 받아들인다. 죽었는지 확인하고 시체를 잘 묻어주겠다고 거듭 약속까지 한다.
그러나 노인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약속은 해놓고 바디를 안심시킨 후, 바디가 듣거나 말거나 중언부언 계속 이야기를 한다.
6번 유형은 의심과 피해 의식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설득하려 하면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노인이 두 번째 신학생처럼 바디를 직접 설득하려 했다면 바디는 절대로 듣지 않았을 것이다.
6번을 설득하려면 중립적인 정보만 제공하고 '한번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하는 정도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러면 6번은 주어진 정보를 자기 안에서 치열하게 검토하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지금까지 바디는 사람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설득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노인은 달랐다. 바디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디는 어느 결에 자기도 모르는 새 노인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노인은 세 가지의 화려한 명언 보따리를 펼친다. 바디는 노인의 이야기에 조금씩 스며들다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결국 푹 절여진다. 마치 천일야화처럼 고집스런 바디가 노인의 다음 이야기를 들으려고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한 걸음씩 나오는 것 같다.
2-1> 첫 번째 충고 : 가지 않은 길
조수석에 앉은 노인은 갈림길이 나오자 바디가 늘 가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보자고 제안한다.
노인 : "좌회전을 해주세요"
바디 : "저는 이 길은 모르는데요"
노인 : "제가 압니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하고 아름답지요."
그리고 노인은 '돌아가는 길'에 대해 말한다. 빨리 가서 뭐 하나. 결국 죽음의 종착역이 기다리는데.
"인생은 지름길을 가는 경주가 아닙니다.
인생은 기찻길과 같이 끝에는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갈 필요도 없고, 한 길만 고집할 필요도 없습니다."
2-2> 두 번째 충고 : "삶의 축복은 체리 향기와 같다."
노인은 자신도 예전에 삶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하려 했다며, 그 순간의 이야기를 바디에게 들려준다.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어요.
그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죠.
전 그걸 하나 먹었죠.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어요.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올랐어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죠.
그리고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
전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어요.
아이들도, 아내도 체리를 맛있게 먹었어요."
노인은 그날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해 말한다.
"자연은 어머니 같지요. 사계절에 갖가지 과일들, 태양...
어떤 훌륭한 엄마도 그렇게 갖가지 과일을 준비하진 못해요.
어떤 엄마도 그렇게 잘 하진 못해요."
노인의 이야기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댄스를 연상시킨다. 나는 가끔 이들의 댄스를 일부러 찾아 볼 때가 있다.
조르바와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그동안 공들여온 갈탄 사업에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들은 해변에서 신나게 춤을 춘다.
열정을 바쳐 노력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큰돈을 잃게 되면 절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든든한 부모님이 있어서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큰 실패를 겪어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대자연이라는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 대자연은 어떤 어머니보다도 만물을 먹이고 키우는 데 선수다. 인간 세상의 차별적 논리와는 달리 누구는 편애하고 누구는 내치지 않는다.
생존하지 못하리라는 불안과 고독이 부자유를 만들어낸다. 홀로 떨어진 개별자가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가 되는 일체감이 자유를 준다. 조르바와 화자는 사업이 실패한 후 훌훌 털어버리고 춤을 추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우리는 이들의 춤을 보며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느낀다.
2-3> 세 번째 충고 : 터키 사람에 대한 조크
노인의 화려한 말발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 터키 사람이 너무 아파서 의사를 만나러 갔어요.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만져도 아프고, 다리를 만져도 아프다. 손가락으로 어디를 만져도 아프다고 했어요."
"의사는 그를 진찰하고 나서, '몸은 괜찮은데 손가락이 부러졌군요.'라고 진단했어요."
(노인은 바디에게 은근히 말한다.) "자넨 마음이 병들었어. 다른 데는 문제가 없어. 생각을 바꿔봐요."
(*이란과 터키는 한국과 일본처럼 서로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터키 사람과 관련된 부정적인 조크가 많은 것 같다.)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그 생각이 되고,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바로 그 느낌에 빠져든다. 불안한 생각이 들면 불안 그 자체가 되고, 우울한 느낌이 들면 우울 그 자체가 된다. 결코 생각 자체, 느낌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가 철학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처럼 마음도 하나의 기능으로 간주한다. 마음은 나와 세상과의 입력, 출력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능일 뿐이다.
손가락이 내가 아니듯, 마음은 내가 아니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해서, 내 존재 전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손가락을 치료하면 된다.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작용하면, 마음이 병든 것이다. 그러면 그 병든 것을 치료하면 되지, 내 존재 전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사실 바디도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으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좌절했을 것이다.
3-1> 마음작용의 세 가지 측면
요가의 대표적 경전인 <요가 수뜨라>는 '요가는 마음작용을 멈추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마음'이 아니라 '마음작용'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걸음'이라는 것은 '걷는 행위'가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걷기를 멈추었는데도 '걸음'이 혼자 존재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어떤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오직 마음이 움직이고 작용할 때만 마음이 있다. 따라서 <요가 수뜨라>는 요가 수행의 대상은 형이상학적인 '마음(citta)'이 아니라 지금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 작용(citta-vr̥tti)'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하나의 덩어리나 고정된 실체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끊임없이 작용하는 내면의 정신 현상에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마음이란 것은 단지 개념이다.
횃불을 아주 빠른 속도로 빙빙 돌리면 붉은 원처럼 보이듯이, 분주한 일상 속에서는 마음의 흐름이 너무나 빨라서 연속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붉은 원처럼 마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돌리는 속도가 느려졌을 때 횃불 사이의 틈이 보이듯이, 고요한 마음 상태에서는 마음작용 사이의 아주 좁은 틈이 느껴질 것이다. 더 고요해진 상태에서는 마음작용이 끊어지고 커다란 공백이 느껴진다.
그림에서 왼쪽의 실선 원이 일상의 분주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끊임없는 마음작용이라면, 중간의 점선 원은 고요한 상태에서 마음작용 사이의 좁은 틈을 인식한 상태이다. 일상의 거친 마음은 명상과 이완을 통해 고요해지며, 명상이 심화되어 삼매 상태에 도달하면 요가의 목적인 '마음작용의 지멸(멈춤)'이 일어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음작용은 그 자체가 나와 동일시되는 효과가 있다. 어떤 생각이 나를 꽉 채우면 그 생각이 내가 된다. 그러나 생각 사이의 작은 틈을 경험하면, 내가 밖에서 마음작용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음작용과 나와의 동일시가 순간적으로 깨진다.
연속적인 덩어리 상태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조각조각 분절된 마음은 더 분별하기 쉽다. '분할정복(Divde-and-conquer)'은 마음에도 적용된다.
에고의 측면에서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다.
우리의 마음작용은 에고의 분별심으로 이루어진다. 틈없이 이어지는 생각과 정서가 에고를 떠받쳐주는 먹이다. [왼쪽 실선 원]
그러나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편안하게 이완되어 있을 때는 에고의 활동이 느슨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작은 선들 사이에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마음 사이의 공(空)(=egolessness)'이라 할 수 있다. [중간의 점선 원]
마음이 에고로부터 더 자유로워지면 점들 사이의 공간뿐 아니라, 주위의 큰 배경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큰 배경의 공(空)', 즉 '순냐(sunya)'을 체험하게 된다. [오른쪽의 텅빈 공간]
# 마음작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저 <요가 심리학 총론>을 참조하세요.(P74-90)
3-2> 바디의 마음의 변화 과정
바디는 노인의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들을 뿐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바디는 노인의 직장인 자연사 박물관까지 노인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면서, 잠시 서서 문득 주위 풍경을 바라본다.
공사장의 흙먼지가 아니라, 이제는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노인이 말한 대로 하늘도 보고, 학교 운동장의 아이들도 보고, 벤치에 앉아서 지는 해도 바라본다.
에고로 꽉 차 있던 바디의 마음에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때 사진 찍어달라며 한 커플이 다가온다. 바디는 그 부탁을 들어준다. 그는 전에는 자신의 목적 외에 다른 사람들과 전혀 관계를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안에 무언가 여유가 생긴 것이다.
바디는 커플의 사진을 찍어준 후 갑자기 차를 틀어 노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부탁을 다시 정정하여 말한다.
"내일 아침 돌멩이 두 개를 갖고 오셔서 제게 던지세요.
잠이 들었을 뿐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내 어깨도 흔들어 보세요!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노인은 담담하게 약간 귀찮은 듯한 태도로 알겠다고 한다. 바디의 변화에 기뻐하거나 격려하지도 않는다. 역시 이란의 새옹지마!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의 충고가 받아들여진 것에 고무되고, 한 사람 살렸다고 뿌듯해했을 것이다.
바디는 자신이 죽으려 했던 장소로 차를 몰고 가서 구덩이를 열심히 파고, 그 속에 들어가서 눕는다.
구덩이는 에고와 동일시된 마음을 상징한다.
그는 구덩이 속에서 하늘에 떠 있는 둥근달을 본다. 이제 바디는 구덩이라는 에고의 좁은 틀에서 나와, 인생의 더 큰 공간으로 들어간다.
'체리 맛'과 '체리 향기'
영어 제목인 "Taste of Cherry"는 직역하면 "체리 맛"이 되지만, 우리나라에서 개봉될 때는 "체리 향기"로 번역되었다. 나는 두 제목 모두 멋지다고 생각한다.
'체리 맛'이 체리를 깨문 순간 입안에 퍼지는 강렬한 미각으로 인생의 축복을 표현했다면, '체리 향기'는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은은한 향기에 아련하게 취하는 듯한 느낌이다.
'체리 맛'은 순간적인 강렬한 체험이라면, '체리 향기'는 긴 시간 동안 잔잔하지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체험과 같다. '체리 맛'이 서양적이라면, '체리 향기'는 동양적이다.
노인과 동행하여 인생길을 드라이브하는 바디는 강렬하고도 향기로운 체험을 한다.
소요유(逍遙遊)
특정한 길만 고집할 필요도 없고, 서둘러 가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네.
인생은 애초에 정해진 길이 없는 소풍이니까.
그 소풍도 곧 끝날테니 즐기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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