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9번이 알을 깨고 나오다

[영화 속 에니어그램 #13] 9번 유형 탐구하기

by 아닛짜

종종 제목이 영화의 안티가 되기도 한다. 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월터 미티의 비밀스러운 삶)'은 다소 엉뚱하게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되었다.


이 번역 제목은 월터가 백일몽을 꾸는 장면들과 환상적인 모험만 부각할 뿐, 영화의 철학적 메시지를 거의 삭제해 버린 느낌이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끌림이 없어서 미뤄두다가, 나중에 보고 나서야 명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마케팅팀이 안티인 <지구를 지켜라>처럼.


이 경우와 반대로, 원제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번역들도 많다. 이제는 고전이 된 'Ghost'를 '사랑과 영혼'으로 번역하지 않고 '유령'으로 직역했다면 관객이 덜 들었을지도 모른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e Button(벤자민 버튼의 기묘한 사건)'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철학적인 제목으로, 'Night at the Museum(박물관의 밤)'이라는 평범한 제목은 '박물관은 살아있다'라는 생동감 있는 제목으로 잘 번역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번역한다면?

'25번 사진의 비밀', '삶의 정수를 찾아서', '스노우캣의 인생여행', '세상의 모든 평범한 월터들에게'...

그만 생각해 보자. 함부로 남의 번역을 비난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영화는 벤 스틸러 감독의 2013년도 작품이다. 벤 스틸러는 코미디언이자 배우이며,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짐 케리, 아담 샌들러와 함께 벤 스틸러는 얼굴만 봐도 뭔가 웃겨줄 것 같은 타고난 코미디언이다. 특히 <쥬랜더>의 잘생김 연기는 정말 전설적이다.

블루스틸2.jpg <쥬랜더>의 비장의 무기 '블루 스틸' 표정. 팬이라면 마땅히 모든 표정을 구분할 수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평균적 9번 유형의 자기 정체성
1-1> 노바디 스페셜(Nobody Special)
1-2> 습관의 피조물
1-3> 숨겨진 분노
2. ‘삶에 뛰어든다’는 것의 의미
3.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요구하지 않아.
4. 삶의 단편에 '삶의 정수'가 들어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월터(벤 스틸러)가 어떤 인물인지 한눈에 알려준다.


월터는 책상에 홀로 앉아서 시리얼을 대충 말아 먹으며 가계부를 정리하고 있다. 돈관리가 지나칠 만큼 꼼꼼하다. 엄마 요양원 보증금, 여동생의 벌금, 엄마의 피아노 보관비 등 가족의 지출 항목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월터는 가족들 뒤치다꺼리에 지쳐있는 듯하다. 그는 식사도 대충 사료를 먹듯이 하며, 자신을 챙기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 '이 하모니'라는 온라인 데이트 매칭 사이트를 소심하게 기웃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변변한 연애도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이트에서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회사 동료인 셰릴 멜호프(크리스틴 위그)의 프로필을 발견한다. 그녀의 이상형은 '모험적이고(Adventurous) 용감하고(Brave) 창의적인(Creative)' 사람이다. 정확히 월터와 반대이다.

01-첫장면-혼밥.png 첫 장면은 월터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월터는 식사를 대충 하면서, 가계부를 과도하게 꼼꼼히 작성하면서, 데이트 앱을 소심하게 둘러보고 있다.




1. 평균적 9번 유형의 자기 정체성


영화 속에서 월터는 에니어그램 9번 유형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다.



1-1> 노바디 스페셜(Nobody Special)


에니어그램의 모든 번호들은 각자 자기의 정체성에 기반한 사회적 역할(role)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2번은 '조력자', 8번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9번의 사회적 역할은 특이하게도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Nobody Special)'이다.


어떤 모임에나 존재감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다 9번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나서고 싶지만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9번은 적극적으로 그런 '역할'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뒤에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크게 불만이 없다. 나의 존재나 의견, 참여가 실제로 중요하지 않으며 특별한 결과도 없다고 여긴다.


월터는 <라이프>라는 전통 있는 잡지사에서 필름 현상 기사로 16년을 근무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실 사진현상소에 머물며, 회사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다. 집에서도 발언권이 없으며, 엄마와 여동생에게 끌려다닌다.


월터는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지고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낙타처럼 보인다.



1-2> 습관의 피조물


월터는 9번 유형 특유의 무감각, 혼수상태, 멍 때리기(day dreaming)의 달인이다.


9번은 일상의 루틴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거대한 유조선이 진행 방향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9번이 습관의 거대한 중력을 이겨내고 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균적 9번들은 그야말로 '습관의 피조물'이다.


월터가 회사의 탕비실에서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을 본 동료들은 뒤에서 수군거린다.


동료 1 : "내가 종이클립으로 후려치면 저 인간이 움직일까?"

동료 2 : "저도 한번 던져 본 적이 있죠. ㅎㅎ"


"이 사람이 죽었거나, 내 시계가 멈춰 버린 것이다."라는 말은 9번의 혼수상태를 잘 표현해 준다.


많은 여자들이 9번 남자와 데이트하면서 오해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말을 너무 잘 들어주어서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그는 훌륭한 경청자처럼 보였지만 실은 듣고 있지 않았다.



1-3> 숨겨진 분노


9번의 이러한 특성과 태도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에니어그램의 유형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태도보다는 그 밑에 숨어있는 동인(動因)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내가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에니어그램 유형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9번은 분노를 특징으로 하는 장형 에너지의 한가운데 존재하지만, 8번이나 1번처럼 장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8번처럼 분노를 폭발하거나 1번처럼 분노를 억압하지 않는다. 9번은 평화롭고 느긋하여 분노 이슈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9번은 관계 속에서 평화가 깨질 것이 두렵기 때문에 자신의 에너지를 봉인한다. 그들이 무의식 중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분노가 폭발하여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9번의 아주 깊은 내면에는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분노가 사화산처럼 잠재되어 있다. 보통의 9번들은 자신에게 분노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 봉인된 에너지가 해방되어야 9번은 삶에 진정으로 뛰어들 수 있다.




2. ‘삶에 뛰어든다’는 것의 의미


9번은 모든 것이 그대로 있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삶은 변화, 유동성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삶에 뛰어드는 것은 ‘평화가 깨지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지금 월터의 삶은 혼란 속에 있다. 직장은 거센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가족들은 월터에게 무거운 짐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라이프사>의 종이 잡지는 폐간 수순을 밟게 되었다. 마지막 호의 사진들을 제대로 현상하는 것이 월터의 마지막 임무이다. 그러나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이 마지막 호의 표지 사진으로 맡긴 25번 필름이 사라졌다!


난감해진 월터는 지하 현상소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한 사진 속에서 숀이 마치 자신에게 오라는 듯이 손짓하는 환상을 본다. 그때 월터는 갑자기 옷을 집어 들고 지하실을 뛰쳐나간다.

그는 회사 복도에 쭉 전시돼 있는 잡지 표지들을 하나하나 지나간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생생한 사진들은 월터가 지난 16년 동안 현상한 것들이다.

이제 월터는 자신이 이 사진들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삶에 뛰어들어간다. 이 상징적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 벅차다.

라이프지 표지 앞을 뛰어가는 월터.jpg 잡지의 마지막 표지는 우주 비행사가 된 월터의 가상적인 사진이다.


이제야 월터는 자신이 16년이나 다닌 라이프 사의 사훈을 진정으로 실천하게 된다.

세상을 보고(To see the world),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things dangerous to come to),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그것이 바로 라이프의 목적이다.(That is the Purpose of LIFE.)


숀을 찾아가는 여정은 갖가지 모험으로 가득하다. 그 모험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셰릴의 이상형에 한 발씩 나아가게 된다. '모험적이고(Adventurous) 용감하고(Brave) 창의적인(Creative)' 월터!


월터는 숀의 자취를 추적하지만 숀은 계속 월터보다 한 발 앞서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월터는 그린란드에서 방금 맥주 한잔 시원하게 마신 술주정뱅이 파일럿이 운전하는 헬리콥터에 오른다. 파일럿은 헬리콥터에 불안하게 앉은 월터에게 소리친다.


술주정뱅이 파일럿 : 편안해요(Are you comfortable)?

월터 : 아니요(no)!!


삶에 뛰어드는 것은 불안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떠돌다 미아가 되더라도.

위험에 뛰어드는 월터-헬리콥터_응원하는 셰릴.png 헬리콥터에 오르는 월터 뒤에서 셰릴이 기타 치며 응원한다. 이때 셰릴과 데이비드 보위가 부르는 'Space Oddity'는 너무 좋다.
스케이트 보드2.jpg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활주 하는 월터. 가슴이 뻥 뚫리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3.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요구하지 않아.


월터는 천신만고 끝에 히말라야에서 숀을 만난다. 숀은 희귀한 눈표범(snow cat)을 찍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잠복하고 있다. 마침내 눈표범이 나타났지만 숀은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월터 : 언제 사진을 찍을 거예요(When are you going to take it)?

숀 : 가끔 안 찍을 때도 있어(Sometimes I don't). 정말 멋진 순간에는(If I like a moment, I mean, me, personally),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이 순간에 머물 뿐이야.(I don't like to have the distraction of the camera. I just want to stay in it).

월터 : 머문다고요(Stay in it)?

숀 : 그래. 바로 이 순간에.(Yeah, Right there. Right here.)


눈표범 등장.png 오랜 기다림 끝에 눈표범이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숀은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숀-지금 이순간1.png "정말 아름다운 것을 볼 때는 그냥 이 순간에 머물고 싶어."


숀은 말해준다. 눈표범은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아서 '유령 표범(ghost cat)'이라 불린다는 것을.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요구하지 않아.(Beautiful things don’t ask for attention.)"


노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숀과 똑같은 말을 했을 것 같다. 너무나 노자스러운 대사이다.


우리의 에고는 남들의 시선 없이는 아름다워지지 못한다.

그래서 에고는 홀로 있을 때 추해진다.

에고만이 관심을 요구하고 구걸한다.

그래서 에고가 떨어졌을 때만이 아름답다.




4. 삶의 단편에 '삶의 정수'가 들어있다.


월터는 숀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오직 잃어버린 25번 사진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얼마나 대단한 사진일까?


월터 : "그 25번 사진이 뭐였죠(What was the picture, Sean)?"

숀 : "고스트 캣이라 해두지, 월터 미티(Let's just call it a Ghost Cat, Walter Mitty)."


숀의 선문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대화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말 해석만으로는 속뜻을 잘 알기 어렵다.


'Let's just call it a Ghost Cat, Walter Mitty'라는 문장에서 'Walter Mitty'를 단순한 호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숀의 25번 사진을 보면 'ghost cat'과 'Walter Mitty'는 동격으로 쓰인 것이 확실하다.

마지막 라이프지 표지.jpg 라이프지 마지막 호의 표지를 장식한 25번 사진


숀의 예술가적인 시선은 월터가 필름을 주의 깊게 검사하는 모습에서 '삶의 정수'를 포착한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대단한 일도 아닌 늘 하는 루틴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본다. 눈표범을 봤던 시선과 똑같은 시선으로.


숀은 월터 자신이 바로 고스트 캣임을 알려준다. 월터가 그토록 찾으려 했던 25번 사진, 즉 삶의 정수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성숙하지 못한 9번 유형은 다른 모든 유형이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제 월터는 9번의 알을 깨고 나와 자기 자신과 접속하였다.


통합된 9번 유형으로서의 달라진 월터의 모습은 어떠한가?


통합된 9번은 자신의 활력과 연결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공격적이고 본능적인 면인 이드(id)와 접촉한다.


9번은 항상 공격적인 충동을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이러한 충동이 반드시 파괴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성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으름과 몽상에서 벗어나 3번 유형의 속도감을 가지고 드디어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직접 분노를 접하고, 상황에 즉각 대처하기 시작한다. 상사에게 할 말을 확실히 하고, 셰릴에게 자기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 가족들의 진심도 알게 된다.






#월터의상상은현실이된다 #TheSecretLifeOfWalterMitty #벤스틸러 #에니어그램9번 #NobodySpecial #고스트캣


keyword
이전 13화체리향기 #2 | 삶의 축복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