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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봉수 Sep 26. 2023

[책] 내 안의 차별주의자, 라우라 비스뵈크

장혜경 역, 심플라이프, 20


[책] 내 안의 차별주의자, 라우라 비스뵈크, 장혜경 역, 심플라이프, 2020 (23-04)



<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제목에서부터 확실하게 드러나는 책을 굳이 샀던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그냥 "(또 우연히) 화가 나서" 샀지 않았을까 싶죠. 자본주의에서는 소비자체도 충분한 의식적인 행동이므로 (빈정빈정..) 책은 사놓고 그냥 몇 년을 묵혀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차별"만큼 세상의 변화를 대변하는 단어도 흔하지 않겠다 싶습니다. 인류역사상 차별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었으나, 그 부당함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이 변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차별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물의 왕국에도 있겠다 싶습니다) 차별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의 변화가 인간성의 변화와도 상관이 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며칠 됐다고 그걸 벌써 잊어버리는 놀랍도록 성능나쁜 기억력 덕분에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책을 읽기 전에 굳이 "새로운 것이 있을까 vs.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하나"라고 메모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당시 제 안에서도 뭔가가 변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독선과 멸시의 작동원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들어가는 말을 지나, 본문에서는 일 job, 성 gender, 이주 immigration, 빈부 격차 poverty and wealth, 범죄 crime, 소비 consumption, 관심 attention, 정치 politics 을 거쳐 "독선에서 자유로는 사람은 없다"라는 제목의 나가는 말로 책을 끝내고 있습니다. 목차에서 볼 수 있듯, 저자는 차별이라는 것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진단과 서술 처방이 다 따로 노는 느낌.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었던 생각대로 사실 서술이나 자료 자체의 신선함 같은 건 없습니다. 차별이 이루어지는 작동 원리에 대한 것도 기존의 사회관련 책들에서 흔히 나왔던 내용에서 크게 차이점도 없습니다. 특히나 일 (Job) 등의 챕터 등 차별과 딱히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부분도 많죠.



저자는 차별의 문제를 다시 "나의 인식"으로 가져옵니다. 차별이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 그 작동원리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점에서. 어쩌면 그 작동 원리안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아닌가.



기본적으로 차별은 나(우리)와 남(저들)을 구별하고 그 사이의 차이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즉각적으로 차별이라는 행위를 통해 나의 우월성을 높이고 저들을 무시하기 위함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밑에는 스스로의 "긍정적 자아상을 구축하고 지키려는 노력"(p.11)이 있기 때문이고, "남들"은 그저 상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 (p.12)이죠. 즉, 저자는 차별이라는 구체적 행동이 이미 도덕적 심리적 요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하겠다고 책을 다시 뒤적이다보니, 한편으론 뜬금없던 던져진 듯 하던 명제들이 결과적으로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교육 역시 이런 의식적, 무의식적 교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p.12)라는 명제를 비롯해, 느슨하게 던져진 것이 뜨악했던 "교만"이라는 단어가 왜 중요하게(?) 등장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좋은 왕의 딜레마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전제주의보다 멍청할 수도 있는 민주주의가 나은 이유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근데 이게 차별이랑 무슨 상관?



교만은 후반부, 특히 '정치' 부문과 연간이 되는데 책의 대부분의 분량과 관계없이 주제가 되는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 장 (Chapter 9. 정치)을 읽으면서 서술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 비로서 이해가 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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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일 Job>

1.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지상명제 / 2. 머리와 손의 분리


자아실현과 자기 착취는 한 끗 차이이며, 일에 대한 사랑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일 때가 많다. (p.20)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자기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일을 하면 성공이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 일이 당신을 채울 것이고 나머지는 절로 따라올 것이다.


진실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p.24. 미야 토쿠미츠 <열정 절벽>


우리가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우리는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상업화하였고 정치적 유아 상태로 되돌아갔다. '성공한 삶'과 현실 정치의 결합은 느슨해져버렸다. 최고의 인성 계발에 맞춰진 초점은 공동체의 참여를 제물로 삼는다. 사회 문제는 스스로를 챙기고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하는 개인의 문제로 변질된다. (p.27)


뿔뿔이 흩어진 '자유로운 직원들'이 앞으로 나와 빛을 발하는 동안 뒤편에선 투쟁과 노력으로 힘들게 얻은 보호와 안전과 위험 예방의 시스템이 차츰 말라비틀어진다 (p.28)


사회학자 알랭 에랭베르. 우울증의 급격한 증가를 이런 개별화 과정의 결과로 본다. 우리 선조들이 사회의 억압때문에 고통받았다면 현대인은 인성 결핍에 시달린다. (p.30) 우울증은 규율과 죄가 아닌 책임과 자발성에 기초한 질병. 결핍감과 가능성과 불가능성, 현실과 '불가능은 없다'의 분열을 말해주는 질병.


열정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접근방식이다. (p.31)


자연 시스템에서 머리와 손이 짝을 이루듯 노동과정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결합한다. (K. Marx) (p.33)


창조 경제는 여성이나 고학력자 같은 새로운 사회집단을 끌어들인다... 문제는 창조인의 이미지가 심하게 낭만화한다는 데 있다. 그 낭만적 이미지에 따르면 이들은 수익보다 지속성을 먼저 생각하고 품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며, 이들의 생산품은 예술이자 개성이기에 품질과 정성과 오랜 수명을 자랑한다. 심지어 완성된 제품마저 인간화하여 성실한 셔츠, 정직한 빵같은 인간적 수식어를 붙인다. 그 결과 셔츠와 빵은 식별의 특징이 되고, 질적 소비의 정치적 계기가 된다. (p.37)


현재의 아츠 앤드 크래프츠 붐에서는 치유의 측면도 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Do it yourself 프로젝트를 통해 직장 업무나 집안일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온전함, 자율성,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 자급자족 행위이다. 또한 이런 추세는 생활 모든 분야에 침투한 창의적 에토스의 반영이다. (p.40)


전체적으로 볼 때 몸과 머리의 분리, 그와 연관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경계 짓기에는 은밀한 계급투쟁이 몸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방식의 도전들에서 과거의 온전함을 그리워 하는 마음, 손과 머리가 하나였다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p.41)



<Chapter 2. 성 Gender>

1. 같은 행동 다른 평가 / 2. 남자다움의 신화


남자다움의 신화, 젠더 라벨링, 폭력은 남성성을 재생산한다. (p69) 총기사고의 대부분을 심리치료를 받지 못한, 혹은 정신질환으로 설명하려는 경향, 왜 하필 백인 남학생들만 범행을 저지를까? 따라서 질문을 바뀌어야 한다. 왜 그는 심리 치료를 받지 못했는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백인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폭력이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남성 특유의 길이라는 점이다. 폭력의 한 종류는 내적 고통의 외적 표현이다. 가령 소속되고 싶은 갈망이 채워지지 못해 절망하고 분노하다가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p.70)


범인들이 평소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기질상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들이 권력을 과시하고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이용해 이 사회가 남성에 거는 기대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p.71) -> 허약해진 남성성 (p.73)



<Chapter 3. 이주 immigration>

1. 이곳에 머물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인가? / 2. 이방인과 열린 사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의 여부는 비극의 규모가 아닌 공간적 거리로 결정되는 것 같다. (p.83)


인간의 패러독스가 드러난다. 우리의 공감은 반드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숫자와 관련 있지 않다. 우리의 공감은 오히려 개인에게서 솟구친다. (p.84)


최근 자기 국가로 넘어온 외부 이민자들을 비판하는 옛 이민자의 인터뷰 (책 내용).... 그런 식의 표현은 '남들'과 자신을 구분하고픈 소망을 반영한다. 그 소망이 정체성 구축 과정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사회적 통합과 연대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p.92)


이런 위협감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정치 엘리트들의 역할이 크다. 많은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속죄양과 적의 이미지를 부추기고 원한과 시기 증오를 자극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중략) 공공 담론에서 구조적 폐해와 사회적 문제가 자취를 감춘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럴수록 깬 시민들이 나서서 포퓰리즘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은 언어이다. (p.95)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명칭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명칭이 들어간 담론이다.(p.97)


타인비하, 근대성과 관련있다...


(이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그 다양한 형태의 적대감이 한곳으로 모일 수 있는 이론적 지편이 바로 근대와의 연관성이다. 근대는 '낡은'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이다. 산업혁명 종교개혁 계몽주의 세속화가 그 시발점이었다. '낡은' 세계에선 종교와 공동체, 질서와 안정의 가치가 지배했다면 '새로운' 세계에선 종교와 국가의 분리, 공동체의 해체, 평등 의식의 성장, 개인에게 전가된 책임이 특징이다. (pp.100-101)


인종을 바라보는 현대의 관점이 원래는 민족적이거나 인종적 의미가 아니라 계급적 의미였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계급적 계층적 담론이 훗날 인종적 담론으로 변했다. 요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인종의 차이나 갈등도 원래는 계급, 계층, 권력의 차이였던 것이다. (p.102)


오늘날 야만적이라는 말은 현실을 '우리' 아니면 '남', 흑 아니면 백, 찬성 아니면 반대로 양분하는 무식한 논리를 뜻한다. '우리'가 아닌 것을 무조건 무시하는 태도를 야만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야만적'인 인간들을 거부하는 그 사람들 스스로가 '야만인'과 똑같이 이분법적 태도를 취한다. 야만인이란 그 누구도 아닌 야만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p.102)



<Chapter 4. 빈부 격차 poverty and wealth>

1. 실업은 개인의 실패 / 2. 기업가 정신의 독재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장기실업자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높아진다... 이 들이 더 실업자의 부정적이 ㄴ태도를 탓하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자신과 남들을 구분한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p.111)


요즘엔 사회 계층이 다양하지 않다. 범주는 딱 둘 뿐이다.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 '위너'와 '루저'... 이 사회적 경계선을 뛰어넘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위로 올라가기가 날로 힘들어지고 있다. 일방적인 폄하는 사회 위계 질서의 유지와 고착화에 기여하며 낮은 신분 집단의 차별을 정당화한다. 이런 편견과 라벨을 통해 장기 실업자나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들에게 낮은 위치를 강요한다. 동시에 낙인찍힌 '낮은' 신분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회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연대적 행동을 방해한다. 연대 대신 구별의 욕망이 샘솟는다. 남들과 선을 그으면 그 남들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pp.117-118)


무찔러 없애야 할 문제는 실업이 아니라 '실업자'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하위 계급을 향한 이데올로기적 내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엘리트들이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연출하며 자신들이 피해자인 양 행동한다. 열심히 노력하여 많으 성과를 거두었지만 자신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남들이 '편안하게' 먹고산다고 말이다. (pp.118-119)


현대 사회는 '성공'을 '끝까지 이루어내고야 마는 투지'로 해석하며, 이 투지는 권력, 돈, 타이틀, 명성 같은 지표를 통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허구이다. 성과 원칙은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통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만인의 성공확률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p.123)



<Chapter 5. 범죄 crime>

1. 하류 계층의 범죄자들 / 2.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다 : 멸시의 한 방법            


'범죄'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부정부패, 금융사기, 회계장부조작, 돈세탁, 탈세, 횡령?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범죄는 거리에서 살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정치 담론에 따르면 범죄는 사회의 지하에서, 빈곤의 환경에서 탄생한다. 보통 해체된 가정, 빈민가, 학교 중퇴, 좌절, 심리적 문제가 범인을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다. 미국 사회학자 에드윈 서덜랜드가 80년 전에 한 말이다. (p.140)


변호사와 전문 자문의 도움을 받아 현행법의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엘리트들의 무한한 기회는 사회적 위계의 자연법칙이라 부를 '준법정신의 중력'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법의 비중은 땅에 가까울수록 무거워지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워진다. (p.147)


피해자는 인기가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정의롭기 때문에 뿌린 대로 거둔다는 기대 심리이다. 이를 흔히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라 부른다. 세상은 공정하고 정의롭고 안전하기에 나만 제대로 행동하면 공정한 결과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부당한 일을 당한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그래야 자신은 계속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정의로운 규칙이 있다. 나쁜 일은 불운의 탓이 아니라 그 개인의 잘못된 행동 탓이다. (pp.150-151)


다른 인지 왜곡이 그렇듯 공정한 세상 가설도 심리적 이득이 많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으면 굳이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다. (p.152)



<Chapter 6. 소비 Comsupmtion>

1. 과시 소비 : 상품을 이용한 신분 투쟁 / 2. 도덕적 우월감            


100년도 더 이전에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이 이런 질문에 주목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실존적 욕구보다 물건의 과시 가치를 더 필수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p.171)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두고 경쟁을 벌이며, 신분을 상승시키는 제품은 자아상을 강화한다... 인간은 무엇보다 소속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 상품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데 기여한다. (p.174)


19세기 부르주아지가 계급 지배를 위해 도덕을 이용했는데 요즘 엘리트들도 똑같은 짓을 한다는 것이다. (p.180)


개인차웜에서는 환경 보호가 특권이다... 지속 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은 먼저 그럴 능력이 되어야 누릴 수 있다. 남들보다 도덕적인 인성을 갖추자면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친환경 소비는 유식하다는 우월감과 한패다. .. 도덕적인 주체로서 돈이 없고 시간이 없으며 소비 문제에 무지한 사람들을 속으로 무시하게 된다. (p.189)




<Chpater 7. 관심 attention>

1. 외향성이 규범 / 2. 인기 있는 디지털 자아            



<Chapter 8. 정치 politics>

1. 정치적으로 다르면 무조건 적 / 2. 유권자들의 경시            



반대와 인정의 결합에서 건설적 토론이 탄생한다. 관용적 태도만이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반박할 여지를 만들 수 있다. 무관용은 상대의 의견에서 존재의 권리를 박탈하려 한다. 상대의 의견을 무찌르거나 금지하려 한다. 그 결과 진정한 다양성이 피를 철철 흘린다. (p.227)


인간은 진리를 찾는 사람일 뿐이고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므로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 (p.227)


극우주의자에게는 정체성이 없다. 정체성처럼 보이는 것은 실상 권위자, 복종, 그에 맞는 전형적인 남성 영웅주의 역할과의 동일시이다. 이 모든 것은 진정한 자아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아, 열등감을 느끼고 강한 남자인 체하며 의식에서 멀어진 자아의 주위를 매돈다. (p.229)


시선은 위험을 향하고 인식은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으로 축소된다. 낯선 것은 불안과 불신을 보장하고 분노와 공격성이 실존과 생존의 핵심이 된다. 혹은 심리학자 카를로 스트렝거의 말대로 '인간 행동의 가장 깊은 동기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일지 모른다. (p.230)


권위주의 정권은 자유 언론을 부정하고 공격한다. 다양한 의견은 그러한 정권에 공포를 부추긴다. 지성인의 깬 의식과 적극적 참여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이 정권의 권력과 합법성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지키는 거짓들로 진실을 덮으려 노력한다.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그 과정이 훨씬 간단하고 수월하다. (p.232)


자유주의 문화가 무엇이며 그 기틀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국민의 의무가 아니다. 아이들 역시 자립과 성년, 자기 책임보다 어떻게 하면 취직을 잘 해 자본주의 시장에 잘 적응할지를 먼저 배운다...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아이들처럼 재미만 추구하면서 책임은 기존의 사고 체계나 정치 엘리트들에게 떠넘겨버린다. 그러나 자유주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불확실성을 견디면서 쉬지 않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자유는 치열하게 싸워 얻은 연약한 체계이다. 그 대가는 자기 책임과 쉼 없는 감시이다. (p. 234)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권 행위다. 비정치적일 수 있는 것도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정치적이어도 괜찮으려면 -자신의 성별 재산 인종 성적 지향 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어서- 품위 있는 삶과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p.125)


(오래전에 망명해온 이민지가,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이 뻔뻔하다고 비판하는 여성을 보고) 우리가 진행자라면 이 여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고 속으로 비난할 경우 더 이상 그녀에게 할 말이 없을테니 대화는 거기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몰려오는 이주민들을 보면서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렸을 그녀가 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고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으냐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반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대를 경멸하며 대화의 문을 걸어 잠그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쪽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해를 하려면 정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과 논리보다 상대의 정치적 신념이 더 중요하다면, 공감이 자기 집단의 구성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상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 (p.240)


(포용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멍청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욕하며 사회적으로 배제해버리면 그들에게 남은 공간은 한 곳뿐이다. 그들이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익명의 투표소밖에 없다. (p.247)


최고 교육기관의 졸업장이 반드시 정보나 교양과 동일하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상류층 역시 단순한 집단 정체성의 따뜻한 품을 동경한다. 정확히 보고 이해하는 진리의 지킴이를 자처하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가 비판하는 그 사람들의 원리를 추종한다. 그 원리는 바로 자기 집단 바깥의 타인들에게 던지는 독선적 시선이다. 그 타인들을 설득해 동화시키거나 거부하고 배제해버릴 동질 집단으로 뭉뚱그리는 독선적 시선 말이다. (p.248)



<나가는 말> 독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한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물어왔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반대로 어떤 힘이 사회를 가르고 나눌까? 무엇이 사회의 결속을 방해하는가? 아마 불평등도 여러 대답 중 하나일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특성이 엄청나게 다채롭고 다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나 타인에 대한 불평등한 경제적, 도덕적 평가는 사회의 결속에 쐐기를 박는다. 안타깝게도 대분의 삼들은 평등을 원치 않는다. 스스로의 '개방성'과 '관용' 점수를 엄청나게 높게 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믿기에 더욱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 한다.



추락할지 모른다는 중산층의 불안과 그로 인한 경계 짓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자식은 어떻게든 잘되기를 바라는 교육열에서부터 하류층을 멸시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중산층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선을 긋기에 바쁘다. 높은 계층에 속한다는 것은 것은 더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쁜 집단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나쁜 집단의 악영향을 피해 가야 한다. 이런 식의 판단 기준이 과연 옳은지, 그것이 사회 불평등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쉬지 않고 성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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