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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봉수 Aug 30. 2019

<조국사태2 – 조국은 불공정의 아이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부의 ‘자격’과 관련된 비난이 뜨겁네요. 기본적으로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와 “그래도 그렇지 어찌 그런 식으로 할 수가 있느냐” 일 텐데, 수많은 비판의 일부는 그저 인신공격과 감정적 분출에 다름아니라 할지라도, 이 와중에 공격의 주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자한당이라는 게 더 허탈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조국 후보자가 지금껏 힘껏 외쳤던 ‘공정’, ‘정의’라는 단어가 주던 긍정적 영향의 반작용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 듯합니다. 그냥 “불법이냐 아니냐” 면 좀 편하긴 할텐데 말이죠.



기존에도 청문회 보이콧이나 후보자의 자진사퇴 혹은 논란속에서 강행 등 사례 자체는 익숙하지만 이번엔 좀 느낌이 다릅니다. 뭐랄까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문제점이 드러나고 불법이지만 관행이었다고 넘어가던 것이 아니라 서로가 좀 격앙된 분위기라서 일가요? 무엇보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과 함께, 여러 미디어에서 "정의론"을 강의했던 당사자가 조국 서울대 교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불의와 부정을 거듭하면서도 사과하지 않는 집단들 (일본의 아베, 그리고 한국의 그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그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 만큼 현 상황에 대한 분노도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나 지금까지 조국 후보자에게 “괴롭힘” 당해왔던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물만난 반응도 이해못할 것은 아닙니다. 




<공정을 말하던 조국은, 불공정의 아이콘?>




개인적으론 이번 논란속에서 진실퍼즐 찾기에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떠들 필요도 없이 불법이면 처벌하면 그만이니까요. “심지어” 조국 후보자의 경우는 “괴씸죄”까지 물어, 불법이라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호의까지 다 처분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대부분의 논의와는 약간 결이 다르겠지만, 이번 사태가 어떤 면에선 당연하게 맞닥뜨릴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조국이라는 한 사람의 잘못이나 과오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는 사례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분노 따위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는 현실속에서 그저 특정인에 대한 개별적인 분노와 환멸을 앞으로도 계속, 지속적으로, 어쩌면 결코 그치지 않고 육두문자와 함께 배설한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미안하지만 이번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공정’, ‘정의’라는 화두를 새삼스럽게 우리사회에 던졌던 <정의란 무엇인가>나 <21세기 자본>을 살짝 다른 시선에서 보면, 현재의 조국 사태(라고 부를 수 있을 듯) “원래 예정되어있던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탈”(이라 부를 수 있다면)은 조국 후보자 개인이 아니더라도 이런 흐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이죠.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소위 좌파든, 우파든 ‘최신 경제이론의 근거’처럼 사용하는 <21세기 자본>을 구체적으로 인용해보겠습니다. 제 의견에 의한 “변형”이나 “짜맞추기”는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이든 권력이든 결국 같은 방향 (불평등은 커지고, 소수의 가진 사람만을 위한 사회가 되는)으로 변해가는 것을 제어하기 위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의 각성”이라는 것. 그리고 단언컨대 여기서 히어로는 없다는...





<21세기 자본이 설명해주는 조국 사태>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특히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191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불평등이 줄어든 것은 무엇보다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들이 불러온 결과다. 이와 비슷하게 1980년 이후 불평등이 다시 커진 것은 대체로 지난 수십 년간 나타난 정치적 변화, 특히 조세 및 금융과 관련한 변화에 따른 것이다. 불평등의 역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행위자들이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지에 대해 형성한 표상들, 이 행위자들 사이의 역학관계,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집합적 선택들에 의존한다. 불평등의 역사는 관련되는 모든 행위자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다.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p.32)

지식과 기술 확산의 힘이, 특히 국가 사이의 수렴을 촉진하는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손 치더라도, 어쨌거나 그 힘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즉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하는 엄청난 힘에 의해 압도당하고 좌절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사실이다. (같은 책, pp.34-35.)

나는 불평등이나 자본주의 자체를 비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더구나 사회적 불평등은 그것이 정당화되기만 한다면, 다시 말해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차별이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두는' 한,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중략) 그 반대로 나는 아무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라도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그리고 공정한 사회질서를 이루기 위한 가장 적절한 제도와 정책들에 관한 토론에 기여하는 데 관심이 있다. 더욱이 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민주적 토론을 통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의 지배 아래 정의가 실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같은 책, p.45)

자본과 노동의 불평등은 강한 상징성을 지니며, 격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슈다. 이 불평등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보편적인 개념과 충돌하며, 이것이 종종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사실상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진 것이라곤 노동력밖에 없고 초라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된 부 가운데 그토록 많은 양을 자본소유자들이 독차지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같은 책, p.54)




<감정은 강력하지만, 본질을 놓칠 수도>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정권아래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대중의 관심사로 끌어올린 1등 공신이 "정유라"였다고 생각합니다. 선출되지 않은 사적권력이나 비선조직이 그 이전 정권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최순실의 전남편인 정윤회 등의 이른바 “십상시 논란”과, 박정희 시절의 망령이라 할 수 있을 김기춘에 관한 여러가지 정황이 드러난 것은 엄밀하게 말해 국정농단에 대한 참담함으로 촛불을 들어올리기 한참 이전의 일이었지요.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영화속 대사가 나타내 듯, 우리나라에서 몇몇 대학교가 갖는 상징성은 단순히 "학교"가 아니지요. 같은 의미에서 비슷한 과정을 통해 역시 서울시내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했던 최순실의 조카에 관해서는 관심의 정도가 현저히 낮았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말해질 수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달궜던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던 정의 역시, 우리가 도덕책에서 배워왔던 “완전무결한”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정의는 "공공선"이라는 측면에서의 정의, 최대다수의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측면에서의 정의, 조금 심하게 말하면, 완전히 실현할 수 없는 도덕적 정의라는 개념을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서 "협의" 가능한 정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를 정(正)자를 쓰는 正義가 아니라, 가지런하게 정리하다는 의미의 정(整), 혹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정(廷)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벽한 이상향을 나타내는 유토피아 (Utopia)가 “아무 곳에도 없는” 이라는 의미를 갖듯, 결코 “만들 수 없는” 완벽한 이상속의 정의가 아니라, 부족한 것은 조금씩 보완해나가는 현실에서의 정치 말이지요. 



솔직히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전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처럼 부존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어떤 하나의 기득권이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지배권을 획득할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 말이지요. 나눠먹을 파이가 적다보니 승자독식이 익숙하고, 부지불식간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경험은 "선택과 집중"이란 표현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말이지요. “선택받은” 한 사람으로 한 가족이, 그 한 가족으로 한 가문이, 한 가문의 힘으로 한 지역이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됩니다. “한” 사람이, “한” 기업이, “한” 학교가, “한” 동네가 부족함을 뚫고 선두로 나가 기득권을 차지하게되면, “한”은 곧 “우리”로 확장되지만, 언제나 타자에 대한 배척을 기반으로 하지요. 혈연, 지연, 학연을 포함해 학교, 군대, 사회 어디에서나 "줄"을 찾는 습성도 역시 세대에 걸쳐 누적된 경험의 결과라 하면 지나칠까요?




<뱁새는 가랑이가...>




피부에 와닿는 불공정한 사회를 살아가는 "끈없는" 개인에게 "공정"이란 단순한 수사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기도 하지만, 공정은 한 개인이 의미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힘, 기대의 바탕이자 희망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조국 교수교수의 자녀를 둘러싼 잡음은 위법이냐 합법이냐의 판단을 떠나, 일본 아베의 미친소리나 원래 그랬던 집단에 대해서보다 더 큰 한숨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해 보이네요.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본다면, 사회가 양분될수록 (좌우가 아니라 상하다)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상층부를 위해 움직이게 된다는 것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층의 도덕은 하층의 도덕일 될 수 없으며, 상층의 양식 또한 하층의 양식이 될 수 없으니까요. 



영화속에서는 흔한 설정이지만, 실제로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줄 누군가의 투사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도와주기는 커녕 신고라도 해주면 다행이겠지만 역시 수많은 사례들은 그것조차 기대하기 어렵게 하죠. 수많은 히어로들 (ie., 베트맨, 아이언맨, 슈퍼맨, 원더우먼, 아이언맨 등)은 어떤 면에선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순히 특수효과의 비현실성에 기대 현실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극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그저 꿈일 뿐이겠지요. 힘이 지배하는 세상. 결코 내 편일 수 없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연대뿐이라고 뜬금없이 감히 쪼끄만한 소리로 얘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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