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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봉수 Aug 30. 2019

식민지근대, 서로다른 기억들

트랜스내셔널 역사학, 식민지근대, 근대화론

식민지근대, 서로다른 기억들


10여년전, 우연히 놀러갔던 대중강연회에서 접했던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결국 식민지 근대론 아닙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덕분에 오랜만에 전투적으로 읽고 쓰고 했었는데, 아직도 그 얘기네요. 오히려 이제는 더욱 당당하게 “식민지 근대” (“일본이 우리의 근대를 가져왔고, 오늘의 발전상은 결국 일본의 덕이다”라는 주장)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어쩔 수 없이 소위 “근대화론” (자생적 근대 vs. 식민지 근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공부도 안하고, 나이도 들고나니 당시에 써둔 메모나 책들을 보면서 조금 다른 시각이 생긴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식민지 근대”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이런 갈등이 결국 한국과 일본의 역사 갈등으로 표출되고, 한국에서 다시금 일본의 지배를, 당시 친일파들을 긍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짧게 살펴본 기억으로는, 트랜스 내셔널리즘은 “미국”에서 시작합니다. 기본 골격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제국(종주국)과 피지배국 (식민지)의 관계를 낳았고, 단순히 착취가 아니라 당시 전지구적인 세계관 안에서 “협력”과 “상호작용”을 보였다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제가 이해하는 걸로 설명하자면, 피식민지에서 벗어난 미국이 강대국이 되자 미국은 역사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뭔가가 필요했고, 식민지 시절에도 자기네가 뭔가 세계사에 주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고, 지배를 당했던 경험과 그 지배로부터 승리한 경험 (영국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섞어 설명한 것이 트랜스 내셔널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사에서 미국이 갖는 제국적 이미지와 힘, 여기에 하버드 대학교를 위시한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타이틀까지 합해지자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 트랜드”로 인식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과거에 비해 비교적 자료가 풍부한 시절이니 어떤 식으로든 자료를 찾고, 그 자료를 통해 “합법” 혹은 “객관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물론 지극히 1차원적으로 “때린 놈이 있으니 맞는 놈이 있다”는 의미에서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맞으면서 혹은 간간이 저항을 해가는 과정에서 때린 놈에게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했다는 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나가면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맞을 만해서 맞았다”라는 논리로 나가게 되죠. 1,000원을 주면서 과자와 빵을 사오고, 900원 남겨오게 하는 “경제적 거래”도, 실제 돈이 아니라 전표로 (결국엔 안주죠) 임금을 주고 “정당한 고용”이라고 말하거나, 온갖 감언이설과 학대, 조직적인 강압과 동원 일탈의 경우도 “개인의 약간 과장된, 혹은 사소한 일탈”이라는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근대”라는 것에 매어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구 선생의 말처럼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독립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근대의 성립과 청산이 아직도 앞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료가 있으니 “공정하고 객관적인 거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료가 없으니 당시엔 아무 것도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문제의 소지가 있을텐데요, 식민사학의 단편적 후과라고만 설명하기엔 씁쓸한 것이 사실입니다. 




지배를 받고 핍박을 받은 것이 자랑거리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다시 꺼내지 않더라도, 어떤 폭력이 발생했을 때 그 폭력에 대해 적절한 처벌과 사과가 없다면 그 폭력은 반드시 다시 발생한다는 것을 너무도 많이 봐왔지요. 유독 가정폭력에 대해 반복과 대물림이 심한 이유도, 이미 반세기나 지난 2차세계 대전에서의 나치의 비인륜적 행위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아직까지 유효한 이유이고, 아픈 기억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나 일제시대의 징용당했던 분들, 과거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피해를 본 분들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자신들의 허물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본 우익”들은 한국의 사과 요구가 “배상(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돈”이 아니라 “사과”입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일본과 임의로 체결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상금의 수령을 거부했던 이유, 최근 징용자 배상 판결에서 승소한 분들이 “사과”를 우선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 구걸하는게 아니라, 정당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핵심이고, 거기에 “니들 그지냐”라고 하는게 “일본 우익”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돈이 없어서, 혹은 한국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말이죠. 



보통은 믿고 거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지만, 우연히 보게된 기사 몇 개가 걸려서 몇 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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