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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봉수 Oct 07. 2019

<블랙야크 명산100> 01. 청계산.

<블랙야크 명산100> 01. 청계산. 2019.10.05



원래 가까운 것은 소중한 걸 쉽게 느끼기 어려운 법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처음 63빌딩을 올랐던 것이 지방에서 친척이 올라왔을 때였고, 처음으로 한강 유람선을 탔던 건 미국에서 삼촌이 놀러왔을 때였다. 심지어 처음 남산타워에 올라간 것 (너무 어려서 기억이 없는건 제외)도 돌아가신 할머니 친구분이 놀러오셨을 때였으니까.



생각해보면 청계산에서 대략 10킬로 이내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았고, “지나가는 길”로는 수도없이 다녔던 길임에도 산은 처음이었다. 산을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안떨어지던 곳. 그래서일까, 청계산에 가자는 등산약속도 여러 번이나 엎어지고 매쳐지고 했던 것이. 



우연히 친구와 술주정하다 말이 나온 것이 등산계획이었는데, 그 처음 약속이 청계산이 된 것은 한 편으론 자연스러웠다. 일단 가까웠고, 작년인가도 가기로 하고 못갔던 산이 청계산이었기 때문. 다른 한편으론 내 나름의 이유도 있었는데, 누가 물어보면 산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두 시간 넘는 산행을 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상황에서 무리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가자고 해놓고 중간에 울고불고 내려가자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내 성격을 잘 아는지라, 같이 가기로 했건만, 이번에도 친구놈은 이러저런 핑계로 빠지고 혼자서 가기로 했다. 역시나 혼자였다면 나역시 그냥 자빠져 잠이나 쳐잤을테지만, 원님 덕에 나팔분다고, 처음으로 “등산 인증 프로그램”이라는게 있는 것도 알았고 (블랙야크 명산 100, 고맙다~) 인증 수건도 두 개 다 준비했으나, 역시나 마음은 물건을 이기지 못하는 관계로 혼자서 시작.


발은 아부지


한 때 등산으로는 일가견이 있으셨던 아부지는 “명산 인증용 등산”을 가겠다면서 “청계산”이라는 아들을 보고 “청계산도 지도에 나오나”라신다. 뭐 어쩌다보니 집 주변에 제법 괜찮은 산이 있었던게 20년이 넘다보니 청계산은 그냥 뒷동산 같은 산이라는 뜻이겠지. 그건 당신께서 젊으셨을 적 얘기고 전 아닙니다…라고 하려다 말았다. 말은 그렇게 하시고는 집에 있는 등산지도책들을 가져다 주신 아버지. 내 기억만해도 예전엔 많았었는데 다 버리고 이제 세 권만 남았는데, 역시나 아버지 말씀처럼 청계산이 지도와 함께 나온 것은 두 권 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다른 산들에 비해 자세하지도 않다.





서울 근교산이면 의례 떠오르는 “너무 단단한 땅”은 청계산에는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주구장창 집 뒷산 (수원 광교산)이 좋은 것이 사람도 적고 땅이 폭신하다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차고 넘칠 듯한 청계산의 지면은 생각에 비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예정 등산로는 가이드에 나온대로 원터골 기점에서 출발해 옛골로 내려오는 4시간 루트. 가이드 표현을 옮기면, 등산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청계산의 대표 산행기점으로, 원터고개를 거쳐 매봉을 거쳐, 정상인 망경대까지 갔다가 석기봉 안부에서 내친 김에 이수봉까지 뽑은 다음 옛골로 내려서는, 청계산의 면모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루트라고 한다. 





한때 자전거로 잘 다니던 길이라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원터골 시작점. 등산로 입구부터 할인률이 제법되는 물품이 가득하다. 장비들도 다 오래됐는데 한번 갈아볼까 싶다가 일단은 그냥 통과. 



초입에 있는 대형 등산로 옆에는 “등산로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축소된 지도”가 별도로 있는데, 도대체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더라는 잠시잠깐 두 지도를 번갈아가면서 비교해보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이것도 패스. 그냥 멀리서 찍지말고 가까이서 찍으라는 뜻이었으려나?





시작지점이 높은 탓인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약숫터가 있다. 가져온 물과는 별도로, 한 모금 마셔주고 시작. 그나저나 산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출발부터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진달래는 없어도 완만하게 능선을 타다는 생각이었는데 관목 숲길 사이로 너무 많은 갈림길들에 사람은 없고… 불과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개나리골을 통해 하산하는 코스가 똭.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냥 작은 관목사잇길로 올라가다보니 어느덧 정상으로가는 갈림길… 지표 12번. 지도상 12번은 청계골 입구의 관현사….  이정표 번호가 지도상 번호와 같으라는 법은 없지만 번호를 붙였으면, 번호에 대한 설명이라도 해줄 것이지…





초보자라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산이라는 평가처럼 크게 힘든 코스는 없다. 그래서인가 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시작점에서부터의 고도가 낮아서겠지만, 집 뒷동산보다도 경사는 낮은 편이라 운동좀 한 커플이라면 그냥 산책하듯 한 바퀴 돌아도 될 것같다. 





그리고 “돌문바위”. 청계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가라는 안내문구도 걸려있고, 사람들이 “돌문” 사이를 빙빙 돌면서 기도를 하는 곳이란다. 체질적으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보고 있는데, 젊은 친구 둘이서 “제발 토플 100점 맞게 해주세요” 라는 말에 크게 웃을 뻔 했다. 합격하게 해주세요나, 승진하게 해달라거나 같은 의미이기는 한데 왜 그게 웃겼을까 ^^





드디어 매봉. 처음이라 조금은 어색하게 <블랙야크 명산100> 수건을 꺼내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친절하게도 어떤 분이 도와주셨다. 그냥 가서 타이머로 혼자 찍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인증 수건이 제법 크기가 있어서 아무래도 혼자서는 각이 잘 안나온다. 



망경대쪽으로 방향을 트니 확실히 호젓한 분위기, 선선한 바람에 풀내음도 좋고, 흙냄새도 부드럽다. 시간만 넉넉하면 나무 의자에 누워서 낮잠이라도 자도 좋으련만 초행에 야간산행은 위험한 일이니 일단은 정주행. 어쨌거나 청계산은 이곳저곳 쉴 곳도 많고, 그늘도 좋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오후가 다되서 그런가, 벌레 먹고 색이 빠진 잎사귀들도 정겹게 보인다. 





청계산은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등산도로 여러가지로 다양한 편인데 정작 정상인 매봉을 넘어가는 지도는 없는 것이 살짝 아쉽다. 집에서 등산로 사진 안찍어갔으면 어쩔뻔… 다만 실제로 산에 올라가서 보면 딱히 문제되지는 않는 것이, 지도는 아니지만 버스 승강장 안내처럼 길목이름을 적어둔 이정표가 있어서 목표만 잡고 있으면 어렵지는 않다. 






슬슬 어둑어둑.

발걸음을 재촉해서 하산 완료. 



감자 쌀떡볶기가 어묵 떡볶기.


산에서 내려오니 배는 출출한데 혼자서 가득 시켜먹기는 그렇고, 생각난 것이 “어묵 떡볶이”. 양재동 하나로마트에서 한때 애정해마지않던 메뉴로, 다른 데선 볼 수 없는, 떡을 어묵으로 싸서 떡볶기처럼 끓여내는 메뉴였는데… 어묵팔면서 떡볶이 팔던 곳은 없어지고 이젠 제대로된 푸드마트.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가기도 그렇고, 그냥 그래도 제일 비슷할 것 같은 “어묵 치즈 떡볶이”를 주문하고나서 물어보니… “감자 쌀떡볶이”가 “어묵 떡볶이”라고… 근데 왜 “감자”라는 이름을 붙였나 물어보니 “감자처럼 생겨서”라신다… 음.. 혼란을 주는 이름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닌 듯, 다른 분도 나랑 똑같이 묻고 똑같은 메뉴를 드신다. 동지여~


#블랙야크, #블야, #블랙야크명산100, #블야명산, #청계산, #어묵떡볶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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