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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봉수 Apr 13. 2020

[책]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1964> 뒤베르제, 배영동 역, 1981, 나남출팜

책 <정치란 무엇인가 1964> 뒤베르제, 배영동 역, 1981, 나남출팜


<OO란 무엇인가>류의 책들은 대개 개념에 대한 정리를 하기 좋다. 해당 분야에는 문외한이니만큼 용어의 정리부터 시작해볼 수 있어서 더 좋기도. 단어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는걸 보면 내가 옛날 사람인 건 확실히 맞나보다 싶다.




뒤베르제 <정치란 무엇인가>은 정치를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고 표현한다. 정치란 투쟁과 통합의 활동이지만 통합까지도 투쟁의 결과라는 점에서 투쟁의 요인이나 형태 등을 더 중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정치학의 정의는 1870년 리뜨레에 의해 “국가의 지배조직에 관한 학문”으로, 1962년 로베르에 의하면 “인간집단의 지배조직의 기술과 실제 활동”이라고 기술했다고 한다. 즉 정치학이란 지배조직에 관한 학문이며, 확대하면 권력일반에 대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뒤베르제는 정치학이 중요한 이유가 (통치계층의) 위장을 벗겨내고 신비의 베일을 제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학은 선택의 참다운 조건을 분명히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선택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던져진 아젠다의 미사여구에 속지말고 스스로 생각해서 바르게 행동하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정치 투쟁의 원인과 유형>



뒤베르제는 투쟁에 좀더 집중에서 설명한다. 저자는 정치 투쟁의 원인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이 분야에서는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견해에 대해서는 정치적 대립의 형성에 있어 계급투쟁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계급의 정의를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해석했다고 비판한다. (p.77) 마르크스의 견해대로 계급투쟁의 요소는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있으나, 계급의 역할이 얼마나 지배적이 중요하며 결정적인가의 문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더불어 계급에 따른 착취에 대항하여 싸울 물리적 수단이나 교육적 수단을 가져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는 것. 다만 앞선 사람들이 생산수단의 소유를 상부구조의 근본으로 삼았던 마르크스이론에 대한 해독제로 프로이드를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보다 단순화된 심리학적 체계를 채택해 사회적 투쟁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개인적 욕구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p.37)”는 점에서 심리적 요인을 중시하는 듯하다.



그나저나 몇 십년도 더 된 저 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아마도 정치학적 지형이 여전히 비슷하다거나, 혹은 저 안에 표현되었어야하는 많은 입장이 담기지 못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베르제가 설명하는 다당제와 양당제의 장점과 단점은 내가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뒤베르제는 양당제 아래의 정당들은 서로간의 확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도를 공략하게 되고 양극단의 정당은 실제로는 서로 닮아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 다당제 아래의 정당들은 각각의 정당에 가장 가까운 이웃정당과의 선명성 투쟁을 통해서만 권력을 강화해갈 수 있으므로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유사한 경향을 가진 정당 간에는 대립이 격렬하게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뒤베르제의 양당제와 다당제에 대한 설명은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프랑스의 대통령제하 다당제를 비교한 것으로,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저자의 다른 책 (<민중과 민주주의 1967>)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양당제와 다당제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1967년 저작의 문제의식인 “민중없는 민주주의”라를 주제에서 접근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 시스템적으로만 굴러가는 (껍데기만 있는) 민주주의에서의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아직 좀 먼 얘기라고 할 수 있는데, 기본 시스템이나 사회적 합의면에서 떨어지는 우리 사회의 두 거대 정당과 좀더 작은 정당들의 파워게임을 보고 있자면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치명적인 두 개의 무기. 자본과 미디어>



분량이 더 많지는 않지만 저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본>에 의한 정치의 종속이 아닐까 싶다. 다른 어떤 정치수단과 달리 자본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강한 압력수단을 갖고 있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권력을 세우거나 몰아낼 수 있어, 어떤 점에서 중세 봉권 영주에 놀아나는 어린 왕 같은 존재라고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순수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정치권력은 독자성을 거의 상실하여 경제권력의 반영에 불과하게 되며 때문에 두 권력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강제한 혼합체제에서나 현실성을 갖는다고 본다.



더불어 다원적 민주체제는 고도의 공업화와 상응한다는 표현, 즉 부유한 국민이 자유로운 국민이라는 테마는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과정없이 기본적인 진리를 표현한 것 (p.118)이며, 자유경쟁에서는 누구라도 부를 획득할 기회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실제로 자본의 축적을 무시하고 지위를 통한 왜곡 (세습)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근면하게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p.143)는 점에서 제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과 함께 뒤베르제가 중요하게 보고 있는 “무기”는 미디어이다. 미디어는 정치의 근본작동 방식인 “위선, 위장, 선전” 등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미디어는 사회가 발전하고 자유가 증대하면서 국가로부터는 점차 자유로워지고 있지만 보도하는 권한은 여전히 경제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뒤베르제는 이를 “장악”이라고 표현하는데, 미디어는 돈을 벌기 위해 사회적으로 진정한 이익이 없는 소식이라도 선정적으로 보도하여 판매고를 높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보도는 평상시에는 시민을 자각시키는대신 가수면 상태에 빠져들게하고, 시민이 이미 흥분한 상태에서는 진정시키는 대신 더 자극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적 보도제도는 대중을 지적수준이 낮은 어린아이의 세계로 가두는 경향이 있다(p.149)라고까지 표현한다. “기레기”라는 말이 대중화되어있는, 당장 최근 한두 주(언제라도 그 한두 주…)안에서도 충분히 예를 들 수 있을 만큼…



정치 투쟁의 무기 중에서 뒤베르제가 특히 중요하고 경계하고 있는 두 가지, 자본과 미디어는 둘다 정부와 시민의 통제가 얼마나 작동하는가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공익을 위해 무제한적 자유에 제동을 거는 일련의 활동을 저자는 “사회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미디어에서의 자본주의적 보도제도는 일반적으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사회주의적 보도제도 (공영방송, 광고없는 미디어 등)을 통해 정화되고, 반대로 자유주의적 보도제도는 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파시즘, 공산주의 등) 위험을 분산시키고 권위주의적 타락을 견제하는 역할을 통해 발전해나갈 수 있다.







<결국엔 시민의 힘>



두 개의 무시무시한 무기를 제대로 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답은 무기를 약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 무기 자체의 힘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자본과 언론이 정치투쟁의 무기로 사용될 때 국가는 대안적 요소로 사회를 “공공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의 힘 역시 빅브라더, 파놉티콘 등으로 대변되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관료적인 자기충족적 방향으로 몰고갈 위험도 상존한다. 이에 뒤베르제가 요청하는 것은 결국 시민의 각성과 공동체의 역할이다. 실제로 잔혹한 전제주의 혹은 공산주의 나라에서조차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표제로 걸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정치적 선동이나 프로파간다는 표면적으로는 알아채기 어려운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듯 점차 세련되게 변하는 무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부분이겠지만 “정치에 있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일부러 눈을 감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기를 거절한다. 위장은 점점더 적어질 것이지만, 세련되어 갈 것 (p.106)”이라는 전망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공동체와 시민의 각성은 체제내 투쟁이 투쟁의 형태인 동시에 통합의 형태라는 것에 기초한다. 그것은 사회의 기본 원리와 그것을 적용한 제도에 대한 일치 (p.181)이며,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투쟁은 통합을 낳고, 투쟁의 전개는 투쟁의 제거와 진정한 사회질서 실현에의 경향을 갖는다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즉 통합은 투쟁의 배제뿐만 아니라, 단결의 발전을 전제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 투쟁의 무기면에서 본다면, “대립하는 사회세력의 균형이나 정치적 무기의 분산보다도 적대주의의 약화야말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 (p.157)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공동체와 시민은 다시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공동체를 구성하는 힘은 연대관계이다. 연대관계는 사회구성원의 물리적 유사성보다 집합표상 “Collective Image”에 더 많이 근거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공동사회 구성원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즉, 함께 실현해야하는 집단의 광대한 계획, 뒤베르제는 이를 “모든 사회는 신이 약속한 땅을 필요로 한다”는 격언을 인용하며, 사회 구성원의 연대를 위한 비전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추가로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출간된 지 50년이나 지난 책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간의 체제경쟁의 극단을 달리고 있던 1960년대 책이라는 점에서 현실과는 괴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뒤베르제는 사회적 비전을 비교하는 부분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사회의 이상이 같다고 밝힌다. 즉, 풍요로운 사회(자본주의)와 공산사회의 이상은 같다 (p.232)고 표현한 것. 책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양당제의 이상을 설명한 부분과 연결지어 생각해본다면, 공산권의 자유화, 자유진영의 사회화는 양당제에서 서로 상호견인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더불어 아픈 지점도 있었는데, 본질적으로 1세계와 2세계의 비교와 대결, 통합을 생각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우리와 같은 제3세계는 근본적인 문제점에 봉착하고 있음이 지적되기 때문이다. 즉, “제3세계는 순수한 자유경제에서는 선진공업국에 의한 예속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결국 전제화 혹은 공산주의화할 것”이며, “필연적으로 권위주의화한다” (p.242)는 부분이었는데, 우리의 경우를 비롯해 지난 50년간 눈으로 직접 봐온 것들이라 그런지 좀 아팠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권위주의의 정도와 사회주의의 형태에 관한 것 뿐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면, 그 근본토대가 무엇이었는지, 그게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착취와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면 자신들의 책임이나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안이 필요했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양 극단에서 풍요로운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양 축을 형성한다고할 때, 어쨌거나, 뒤베르제가 보는 시각에서, 이렇게든 저렇게든 현대사회는 민주적 사회주의에로 진보한다. 그 과정은 어떤 면에선 기존에 공산주의가 생각해온 역사발전론과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차이점이라면 단순히 자본주의가 자기 모순에 의해 소멸되고 사회주의의 세계가 온다는 당위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공동체의 공공선을 증진하기 위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와 개인의 욕구 전체를 만족시키기에 비능률적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에 따른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계획경제와 정부의 중재 등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기본적인 결정 (투자의 양, 생산의 방향 등)에 대한 기업소유자의 결정권도 소멸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는 점(P.244)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금더 세련되게 표현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모습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이 집필된 것이 1964년. 번역이 1981년. 읽은 것인 2020년. 현재는 코로나19라고 명명된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한국을 비교해볼 수 있다. 의료를 모두 공공재로 인식해서 필요한 만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무상 의료체계”의 비탄력성 (유럽)과, 자본주의의 극단에서 세계최고의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손으로는 사재기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허술함 (미국), 문제가 생겼을 때 전체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강포함 (중국), 그리고 이들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이끌려가면서 이들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낸 우리의 모습이 비교되는 듯하다. 우리가 세상의 미래는 아니지만, 우리역시 우리대로 갈 길이 참 많이 멀기는 하지만, 의료와 관련된 공공선과 공동체의 목표라는 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코로나19 상황이 시사하는 바가 제법 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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