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2달이 지난 어느 날 - 여행 이야기 1 (태국 난, NAN)
생각해 보니 퇴사 후 2달이나 지났다.
방송대 수업을 듣고, 1달여의 여행을 갔다 왔고, 다음 주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난다.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없이 보내기 시작하면 참 한정 없이 무의미하게 흐른다.
무의미하게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두는 것 중 가장 잘한 것은 단연코 여행을 떠난 일.
컴퓨터 없이 떠났던 여행에서, 글은 온전히 손으로 쓴 일기밖에 없다. 외국인을 위한 관광지도 아니어서 컴퓨터 사용도 여의치 않았다. 기록은 오직 핸드폰으로 페이스북에 남겨 둔 짧은 메시지와 손으로 쓴 일기뿐.
그 시간들을 펼쳐보니 그때의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나 눈 앞에 펼쳐진다.
여행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매일 늦게 자고 정오쯤 일어 나 밥을 먹으러 갔다.
현지인도 외출을 삼가는 햇살 따가운 낮 시간, 얼마나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누볐던지 두피가 홀랑 타고 얼굴엔 화상을 입었다. 이후로 꼭 모자를 쓰고 다녔지만 여전히 팔은 빨갛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가 본 도시 "난"에 머무른 건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방콕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수요일 밤이었는데, 한주 전 목 요일 난을 떠나 방콕으로 돌아온 게 두고두고 후회됐다. 난에 조금 더 머물고, 하루나 이틀 전에 방콕에 올걸 하는 후회가 계속 계속 들었다. (방콕에선 빈대 물리고, 빈정 상하고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며 보낸 보름이 조금 넘었던 시간 동안 내 안의 이야기들은 차곡차곡, 부지런히 쌓였다.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너무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앞으로 하나씩,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브런치에 기록해 보려고 한다.
내가 여행자일 때 만난 한 분은 몇 년 후 다시 방콕에 갔을 때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 게스트 하우스가 바로 Where is Chai.
그 후 방콕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여기서 묵거나 쉬어가곤 했는데 이번에 리모델링으로 인해 무기한 휴업을 하게 되었다. 이 허름하지만 정감 넘치는 숙소가 있어서, 방콕 하면 언제라도 내가 편히 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는데 이젠 그 푸근함의 장소가 사라져 마음이 헛헛하다.
또 다른 아지트를 찾을 차례다.
라오스 남부 여행을 계획하고 갔으나 그전에 가보지 않은 태국의 소도시를 한 군데 여행해보고 싶었다.
방콕에 오래 머무를 이유도 없었고, 괜히 이상하게 우울해지기도 해서 얼른 떠나라고 등 떠미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잔소리에 못 이긴 척, 도착 이틀 만에 태국 국내선 비행기표를 끊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알고 지내던 여행사 사장님께 인사차 들르니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신 곳이 바로 난이었다. 여행자에게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태국 사람들의 여행지라고 하신다. 여행을 해보니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주쯤 되는 곳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경주는 아유타야 정도 될 것 같다. NAN 은 신라시대 유적이 있는 김해의 작은 마을 정도로 생각하면 맞을 듯싶다. 정말 작은 소도시다.)
첫날 도착한 숙소는 이틀만 예약했는데, 와서 좋으면 연장하지 하는 맘이었다.
그런데 이틀 뒤에 풀 부킹이라 어쩔 수 없이 숙소를 옮겨야 하는 상황.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나는 숙소가 정확히 확정되지 않으면 불안함을 엄청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아침 일찍부터 비행기를 타느라 피곤했던 탓에 오후 내내 늦잠을 좀 자고 저녁이 되어서는 마음도 진정시킬 겸, 이 동네의 핫플레이스라는 WE LOFT 바로 갔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 사이사이를 가로지르고 논두렁을 달려 도착했다. (Google로 장소를 검색하면 평점이 나오는데 음식에 대한 평이 굉장히 좋았다.) 보통 혼자인 경우 밤에 잘 나가지도 않고 이런 곳에 찾아가지도 않지만 그 날은 숙소에 대한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혼자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연주는 별로였다. 대박인 건 내부 홀과 야외 좌석이 꽤 넓었는데 손님이 나밖에 없었고, 직원들은 영어를 거의 못한다 (메뉴판은 영어로 된 것이 있음) 난을 여행하면서 느꼈지만, 태국의 관광지에서 영어가 통할 것이란 것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난은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이라 보면 된다. 심지어 숙소 리셉션도 영어가 안 통한다.
식사도 대충대충, 다시 논두렁을 달려서 숙소로 돌아왔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엄청 큰 숙소에 숙박객도 나 혼자다. 무섭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던 차에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들리길래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았다.
우리나라 야시장 같은 상점, 놀거리가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난의 큰 연례행사라 할 수 있는 보트 레이싱 대회가 열리는 기건이었던 것! (이때는 푸민 사원 앞의 주말 야시장 - Walking street 라 부름- 이 열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필요한 물건을 살만한 작은 상점도 많고 먹을게 너무.. 정말 너~!!!!!!! 무 많다. 우울했던 기분이 단숨에 싹.. 사라졌다.
혹시나 캣콜링이라도 당하면 기분이 더 다운됐을 테지만 아직 관광객이 거의 없어 관광지 물이 들지 않은 곳이라 사람들이 쳐다볼 뿐 여행에 전혀 방해가 안되어 너무너무 좋고 편했다.
첫 번째 숙소에서 이틀을 묵고 난을 떠날까 했다. 그런데 왠지 이대로 가기엔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다른 숙소를 급한 데로 검색한 후 옮겼다. (참고로 난 시내에선 거리에 상관없이 무조건 택시비 100B. 중심가는 자전거로 다닐만 한 거리이고, 가방이 있어 택시를 이용했는데 시내에는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 보통 숙소에서 무료 픽업을 해 준다.)
두 번째 숙소는 Sundara Guest House
아래는 내가 묵었던 숙소의 5번 방.
주인이 예술하는 사람이라 게스트 하우스를 직접 짓고 인테리어도 직접 해서 방마다 콘셉트, 색깔이 다르다.
이 방에서 유난히 잠을 잘 못 자다가 나중에 노란색으로 인테리어를 한 3번 방으로 옮겼는데, 이후 잠을 잘 잔 걸 보면 색깔이 주는 에너지가 참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두 번째 숙소인 Sundara Guest House에서 머무른 시간은 여행의 가장 큰 포인트가 되었다.
영어가 통하는 주인 부부와,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 위해 치앙마이에서 왔다는 그들의 후배와 함께 우리 넷은 매일 밤 맥주를 마시며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로 깊어가는 저녁을 보냈다. 우리는 명상에 관하여, 전생과 현생에 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하여 여행에 대하여 심리학과 삶에 대하여, 서로의 역사에 대하여 끝없이 이야기했고 끝없는 소재처럼 이야기도 끝날 줄 몰랐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인연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매일매일 행복했고 매일매일이 같으나 다른 하루들이었다.
내게 매일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고양이는 만삭이었고, 이번주 안에 새끼를 낳을 것 같다는 주인장의 말에 나는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 떠나자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