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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한기묘진 Sep 29. 2021

글을 제조하는 미래

생각으로 글이 써지는 세상이 온다면

 일이 하기 싫은 날은 오히려 일에 대한 먼 생각이 찾아온다. 

내가 맡은 일 중에 하나는 200여명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일이다. 한 학생당 1500바이트. 용량에 맞춰 꽉꽉 눌러서 채워 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잘한다'고 표현해도 될 일을 생활기록부라는 곳에서는 '자기 주도성이 탁월하여, 이를 발휘하여 A단원을 학습할 때 두각을 보임.'이라고 바이트를 채웠다. '~라는 주제로 발표함.'이라 써도 되지만, 그렇게 끝내기에는 아직 150명 정도 채워야한 바이트가 너무 많았다. 나를 수타면을 뽑는 요리사처럼 글을 늘리고 늘렸다. B라는 주제로 미래의 사회를 예측하여 청중으로부터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 냄. 이런 식으로 하면 같은 내용이라도 100바이트 정도를 늘릴 수 있다. 이 짓을 한 학생당 15번씩 반복하면 생활기록부가 되는 것이다. 

 내 일 빼고 다른 일은 뭐든 다 재미있어 보이는 것 같던 수요일. 나는 내가 일 년간 몇 자를 써야해야 하는 지 계산해 보았다. 띄어쓰기 포함 9만5천자 정도 였다. 팔만 대장경이 몇 년간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200명 정도 학생을 담당하는 나는 매년 팔만대장경 정도를 찍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담임이라서 우리 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2만자를 더 써야 한다. 팔만대장경의 후손으로 자랑스럽다. 

그래서 생각했다. 미래에 생각만으로 글이 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맞춤법을 틀리지도 않고 타자를 치지않아도 되고! 동공도 읽어서 스크롤도 움직인다는데 글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언어라는 개념이 모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한국어도로 쓰일 수 있고, 스와힐리어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직접 쓰는 일은 낡은 LP를 꺼내 듣는 것 만큼이나 번거로우면서 낭만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글을 적는다고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글을 '생성'하거나 '제조'하거나 또는 언젠가 글이란게 없어질 수도 있겠다.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자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반면에, 그렇게 된다면 나는 1500바이트가 아니라 한 학생당 5만 바이트의 이야기를 작성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동화 중에 생쥐 부부가 사윗감을 찾기 위해 돌고 돌고 돌고 돌아 결국 옆 집 생쥐 청년을 만나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머나먼 미래를 돌다가 지금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꺠달았다. 


생쥐부부는 머리로는 옆 집 생쥐 청년이 적합하다고 이해했을 지 모르지만, 결국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렇듯이. 역시나 나는 일을 하기 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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