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밥 냄새가 나는 '향미'로 1인용 압력솥에 지어드려요.
# 밥물 맞추는 귀신 손이 필요했던, 그때 그 시절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동네에서 '밥 물 맞추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했다. '할머니 집'이라고 불러 가닿았던곳은 남해 상주 은모래비치 앞에 금전마을.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앞마당에 제사음식을 차리고 나눠먹는 풍속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 아궁이에 가마솥을 올려 밥을 짓던 시절, 한꺼번에 수십인분의 밥을 지어내는 것을 누구나 어려워했고 할머니는 때마다 나타나 귀신같이 '밥 물' 맞춰주는 역할을 도맡았단다.
저 몸으로 어찌 7남매를 낳아 기르셨을까 싶게 작은 체구셨는데, 가마솥에 담기는 쌀이 적든 많든 척척 밥 물을 맞추셨다는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 전설같은 이야기의 비법이 궁금해 언젠가 할머니한테 여쭈어봤을때 작은 손 어딘가를 가리키며 "요 마이~ 물이 차믄 딱 된다."는 신통찮은 답변을 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았다.
여럿이서 먹으면 뭐든 맛있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할머니 집에서 먹었던 대부분의 끼니는 친척들이 북적북적한 가운데 제 몫을 찾아 허겁지겁 먹기 마련이었고, 바닷마을에서 손수 농사지은 '쌀'로 '밥물 맞추는 귀신같은 손'으로 지은 밥이 그리워진 것은 다 크고 나서였다. 나에게 남은 솥밥의 기억은 이렇듯 커다란 가마솥에 짓기 어려운 밥, 한 솥 가득 지어 나누어 먹는 밥으로 남아있다.
# 갓 지어야 맛있다던, 엄마의 솥밥
솥밥에 대한 유년시절 신랑의 기억도 유별나다. 어머니가 어릴 때 새벽같이 일어나 식구마다 개인용 솥에 밥을 지어 주셨단다. 이유인즉슨 ‘갓 지은 밥이 맛있기’ 때문. 즉석밥이 활개를 치는 시대에 실천하기 얼마나 어려운 동기인가. 말이 쉽지, 갓 지은 밥이라니.
개인용 솥이 가정집에 식구마다 있었다는 점도 놀랍다. 우리 할매마냥 가마솥에 거대한 양의 밥물을 맞추는 것도 귀신 뺨치는 능력이지만, 1인분의 밥물 맞추기도 보통 일이 아니다. 쌀 불림 상태나 불조절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고, 태우기라도 하면 어쩌나. 어떤 부분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망할 판이다. 그러니 맛있게 갓 지은 밥을 받아 먹은 신랑의 어린 시절은 탁월한 손맛을 자랑하며, 심각하게 부지런한 어머니 아래 자란 아들의 천복이었다.
햅쌀이 맛있다는 건 윤기부터 촤르르 티가 나니 진즉 알았지만, 쌀의 품종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것은 다양한 정보를 통한 학습을 거친 후였다.
동남아 여행가서 ‘날리는 쌀’인 ‘안남미’를 접하고 쌀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트에서 엄마가 ‘고시히카리’가 맛있다고 고를 때도 뭐가 그리 다를까 미심쩍었다. 좀 더 비싸게 팔려고 하는 상술아냐, 싶기도 하고. '철원 오대쌀'이나 '임금님표 이천쌀'도 지역 특산물 정도로 생각했지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로 여기지 못했다.
# 쌀이라고, 다 같은 쌀이 아니다!
쌀이라는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반성은 도쿄 여행이 계기가 되었다. <아코메야 Akomeya>라는 이름의 편집샵에서 산지별, 품종별, 어울리는 음식별로 쌀 큐레이션이 되어 있는 장면을 맞딱뜨린 것은 꽤 충격이었다. 그렇지, 섬세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이렇게 다양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생산 지역과 품종에 따라 특징을 상세화하고, 요리나 취향에 따라 쌀을 고를 수 있도록 소개하는 공간은 놀라웠다. 다 같은 쌀이라고 퉁쳐서 볼 일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하나의 식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만드는 풍부한 해석에 대한 배움도 있었다.
# 쌀을 선택해서, 밥맛을 결정한다.
<코메후쿠 kome fuku>라는 쌀밥 전문 식당에 방문한 경험도 인상적이었다. 쌀의 경도 (딱딱한 정도)에 따라 5가지로 쌀을 분류하고, 선택한 쌀로 밥을 지어준다. 가격대는 좀 있는 편인데, 우리 부부는 솥밥집 개업을 앞두고 있던 참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방문했다.
"어떤 쌀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여지껏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없던 자신의 밥 취향을 돌이켜보게 된다. 딱딱하고 된 밥을 좋아하는지, 부드럽고 촉촉한 밥을 좋아하는지. 쌀을 선택한 후, 밥을 짓기 시작하므로 꽤 시간이 걸리는데 솥째로 나와 눈 앞에서 뚜껑을 열고 김이 폴폴 나는 모습을 보면 내 취향을 존중한 밥을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그 '대접받는 느낌'이 비싼 가격도 어쩐지 수긍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를 맞은 우리 땅에도 쌀 큐레이션 서비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품종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흰 쌀밥'을 귀히 여겼던 할머니 시대를 지나, 삼시세끼 흰쌀밥에 정찬을 먹던 부모님 세대를 지나, '어떤 쌀을 먹을지'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간편식이나 반조리식이 나날이 발전하며, 따끈한 쌀밥에 국과 반찬을 곁들인 전통 한국식 '반상'이 특별식이 되었다. 매일 집밥을 먹고 다니던 때에는 '외식'이라고 하면 양식 / 일식 / 중식으로 외국식을 찾았지, '한식'은 어쩐지 뒷전이었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되었다. 집에서도 간편하게 한그릇 음식으로 파스타를 볶아 먹기 수월하지 반찬을 차리고 국을 끓이는 수고로움은 식당에서 찾게 된 것이다.
# 밥 자체가 맛있어야! 밥맛이 산다.
우먼센스 2020년 5월호에는 '밥맛'으로 승부를 보는 식당 4곳을 소개하였다. 신랑('안선생'이라 불리운다)의 첫 가게 <안재식당>도 실렸다. 일본 여행을 다녀오고 개업한지 딱 1년만에 받은 스포트라이트이다. 소개글은 "미식가로서 '밥 자체가 맛있는 밥집'이 별로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대표가 직접 차린 밥이 맛있는 식당."이라고 담겼다.
그렇다. 밥 자체가 맛있는 것에 가장 힘을 준 차림. '향미(골드퀸 3호, 수향미)'를 사용해 구수한 쌀향을 살리고 어머니가 어린시절 그에게 해줬던 것처럼 1인 솥에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갓 지어내는 밥을 원칙으로 하는 가게. '밥'의 맛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국이나 반찬에 간을 세게 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을 충실히 살리는데 힘을 쓰는 상차림.
<안재식당>은 요리를 전공하지 않은 신랑의 수련터와 같은 곳이다. 가장 많이 해봤고, 가장 맛있게 많이 먹어 본 '집밥'을 모티브로 잡았다. 작년 연말, 첫 해 회고를 해보자고 카메라를 켜고 사장님으로서 인터뷰를 청해 보았다. 어쩌면 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 작은 식당의 강점은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식재료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고, 시장에서의 기회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남들이 잘 하려고 하지 않는 점'이라고 답했다.
한 번 사는 인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오픈한 식당. 꼼수 부리지 않고, '좋은 쌀로 갓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는 원칙으로 정면돌파 해 나아가는 <안재식당>의 솥밥이 많은 분들께 그리움의 맛이 될 수 있기를. 밥물 맞추는 귀신이었던 우리 할머니의 손맛처럼, 여전히 아들 장사하는데 가장 마음을 많이 쓰시는 어머니의 밥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