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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식당 by 안주인 Oct 06. 2017

속초, 옥미식당 | 곰치국

이만하면 할매가 욕 좀 해도 된다.

사진을 꺼내보니 날짜가 2015년 11월로 찍혀있다. 결혼하고 첫 가을이었으니, 주말마다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큰일날 줄 알았던 방랑벽 도진 계절이었다. 기본적으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봄은 신랑의 꽃가루 알레르기가 절정에 달하니 우리 부부에게 가을처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란 없다. 결혼하고 가장 좋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함께 여행'을 공언함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점. 그러니 그 해 가을은 머무름 없이 떠났던 계절로 기억된다.


그 날은 떠날 계획이 없었다. 노동강도가 심히 높았던 회사 생활의 절정인 겨울 맞이 준비중이었던 때라, 주말이면 떠나려 드는 것에 숨이 찬다고 소리를 빽- 질렀던 즈음이었나. 결혼 전에는 나도 꽤나 여행 좋아하는 사람이라 자부했는데. '식(食)'에 대한 호기심 하나로 밀어부치는 그의 추진력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작은 차의 소유주가 된 후로 기동성까지 발휘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 때의 그에게 '뭐 먹으러 갈까'는 곧 '어디로 떠날까'와 같은 말이었고 나는 아무거나 먹고 주말에 잠이나 푹 잤으면 싶은, 야근에 지친 직장인이었다.


여행을 대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는 무작정 떠났고, 나는 숙소 예약부터 가고싶은 곳의 정보까지 되도록 준비했다. 그러니 떠난다는 것의 무게감을 다르게 대하던 때이다. 떠나자하면, 나는 출발선이 까마득히 느껴졌고 그는 말이 떨어지는 때가 곧 출발선이었다. 그 간격이 버거워질 때라 신랑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봤다. 주말 대화의 시작이 '가자!'에서 '갈래?'로 바뀐 정도.


아마 떠나자!했으면, 나는 어디 가고 싶은지 목적지를 정하고 어떤 옷을 입을지부터 골랐을테다. 아무 준비 없이 머리도 감지 않고 볼 일 보러 나온터였다. (볼일이란, 평일에 못간 A/S센터 토요일 오전에 방문하기였다.) 집에 들어가서 차려먹기는 좀 귀찮고 밥 때는 되었고. 그는 이 때가 기회다하고, '뭐 먹지'하는 질문을 '뭐 먹으러 갈까'하고 받았다. 그래서 현금 백원도 없이 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여행. 속초가 목적지가 된 것은 무슨 이유였지. 아마도 언제 만나도 좋은 파아란 동해 바다와 적당한 거리, 정복하지 못한 맛집에 대한 환상때문이었으려나. 현금이 없어 통행료 빚쟁이로 시작했지만 표지판에 #인제 #신남. 그 날의 여행을 출발했던 마음이 그랬다.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신고식 치르듯 중앙시장 초입에서 만석 닭강정을 먹고. 본격 무얼 먹을까 '뺑뺑이'에 나섰다. 하아, 이 뺑뺑이란 무엇인가 설명하자면. 뭘 먹을지, 어디로 갈지, 딱히 정하지 않고 뱅글뱅글 돌아다님을 일컫는 우리들의 데이트 용어로 결정권을 가진 그가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의 예민함이 극도에 달하면 아무거나, 아무데나 가버리고 마는 부정적 늬앙스를 담고 있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그가 가고싶어 하던 식당 두세 곳이 문을 닫아 좌절했다. 닭강정으로 배를 불린 나는 그냥 아무데나 들어가 먹어도 좋겠다 싶었지만 기껏 떠난 여행지에서 기깔나는 맛집을 찾는 것이 그의 자존심이니 지켜주기로 하고 숨고르기를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만난 <옥미식당>.



허름한 식당. 할매랑 할배가 지키는 자리. 만만치 않은 가격.

배가 부른 나는 1인분을 해치울 자신이 없어 '오빠 것만 시켜'하고 주문을 미루었다. 그랬더니 할매가 둘이와서 한 그릇 시킨다고 앞접시도 주지말라 하신다. '헉' 하고 쫄았는데, 어우 도저히 1인분이라고 볼 수 없는 곰치국 한 사발이 '스뎅 오봉'에 먹음직스러운 곁찬과 함께 한 상 차려져 나왔다.



곰치. 물메기에 속하는 '꼼치'를 동해안에서 '곰치'라 부른다 하며, 이를 경상도 방언으로 '물곰'으로 일컫기도 한단다. 수심 1천미터 안팎에 서식하는 곰치는 살이 무르고 부드러워 얼려서 보관하면 맛을 잃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할 수도 없다. 동해안의 대표적 겨울 특산종이지만 수온이 형성되지 않는데다 자원까지 크게 줄어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귀한 식재료라 할 수 있다.

/ 위키피디아 등 구글링을 통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허름하면, 가게를 지키는 주인이 노인장이면, 업력이 오래된 노포이면, 어쩐지 점수를 더 주는 신랑. 들어서 자리를 잡으면서 벌써 신이나 보였다. 둘이서 한 그릇 주문하고 욕 먹어서 나는 쫄았는데 웃음기가 가시지 않더니 곰치국 한 숟가락 떠먹고는 말했지.


이마이 끓으면, 할매가 욕 좀 해도 된다.




반찬도 얼마나 맛깔스럽고, 밥도 고슬고슬 잘 지으시는지.

좀 먹으러 다닌다는 블로거들 사이에서 소문난 맛집으로 통하는 이유를 대번에 알겠다 싶은 한 상이었다. 더불어 우리가 찾아다니고 싶은 진정한 '맛집'의 기억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이 날의 여행은 통째로 우리다운 여행을 시작한 날처럼 기억된다. 오래 곱씹고 싶은 이야기를 만나는 여행. 혀끝에 도는 감칠맛으로 계절을 기억하고, 시간을 반추하는 여행.


사진으로 미처 남기지 못했는데 콜라를 시켰더니 가게에 콜라가 없다며, 할아버지가 미란다 한 병을 구해주셨었다. 1인분 시키고 할머니한테 무안한 잔소리를 들은 젊은이 둘이 안쓰러웠던지 "꼭 아가씨 이름같지?" 너스레와 함께 건네주신 '미란다' 한 병. 도시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병에 든 탄산 음료가 참 정겹게 남았다.


한 상 비우고, "잘 먹었습니다." 씩씩하게 인사드려도 시큰둥한 할매. 미란다처럼 톡 쏘는 매력이 있는 그 할매가 할배랑 오래오래 자리를 지켜주시길.




곰치국은 1인분 2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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