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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Mar 13. 2024

11. 여명이 밝아올 때 가장 빛나는 별을 따라 걷는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1

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9. 나헤라(Nájera) → 산토도밍고데칼사다(Santo Domingo de Calzada) / 20.9킬로 / 6시간 10분



매일 아침 쏟아지는 별들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매일 오전 7시쯤 마주하는 풍경이다. 해가 늦게뜨고 늦게지는 스페인의 새벽은 정말 선하고 아름답다. 달과 별빛에 의지해 산과 숲을 지나간다. 달빛이 이렇게나 밝은 줄 몰랐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연이 주는 빛에 싱크가 맞춰진다. 달이 보는 것을 나도 본다. 새벽의 고요함과 자연이 주는 빛으로 걷는 시간은 아주 특별하다. 입김이 날 정도로 쌀쌀하지만 그마저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걸으면 열이 나고, 그렇게 온기를 장착한 몸은 자연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깨끗한 상태가 된다. 나의 숨을 토해내고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온도를 맞춰나간다. 그렇게 걷기에 가장 편한 리듬을 찾아간다. 길 위의 모두가 각자의 리듬대로 걸어간다. 지나쳐도 뒤쳐져도 각자의 걸음일 뿐, 그 누구도 기준이 되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타인과 비교할 필요 없이 그저 각자의 리듬대로 걸어가면 되는 것을. 맞지 않는 리듬으로 걷는 것만큼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없다는 걸 왜 몰랐을까.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1

순례길 초반 3일까지의 코스는 대부분 똑같다.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하고 알베르게가 하나뿐인 지역도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생장(Saint Jean pied de pord)에서 출발날짜가 같은 사람들과는 계속 마주치게 되는데 그중 한 선생님과 진한 연이 닿았다. 산티아고 순례길 패키지로 오신 분이셨는데 매일 길에서 마주쳤다. 말투와 표정, 그리고 들고 계신 ‘안나 카레니나’ 책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문학 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며칠 전 와인축제에서도 만났었는데 다음에 또 만난다면 술 한잔 사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어 입구에서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빨리 사게 되었다며 멈칫하시던 선생님과 한바탕 웃고 숙소 앞 광장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철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다 스스로 정년이 되기 전에 퇴직을 결정하신 멋진 어른이셨다. 유머러스함과 겸손, 상대에 대한 존중까지 갖춘. 좋아하는 철학자, 교육현장, 살아온 삶의 지혜까지 다양한 주제로 얘기했다. 길 위에서 마주치며 서로에게 느꼈던 것들도 솔직하게 나누고. 길 위에서 인사하며 말을 거는 우리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셨단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건 이미 상대를 포용할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각자의 눈빛에서 어떠한 것을 발견했다고 얘기해 주신 선생님 덕분에 나의 힘듬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나로서 살아가는 일이 원래 쉽지 않은 것임을,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음을 선생님께 배웠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대화는 해가 저물도록 끝나지 않았고 숙소 문이 닫히기 30분 전에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에겐 내일의 길이 기다리고 있고 그곳에서 다시 만날 테니까.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과 길을 걸었는지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



놀란 포인트 1. 선생님이신지 모르고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진짜 선생님이셔서 놀람
놀란 포인트 2. 영화 ‘미드소마(되게 매니악한 영화)’를 알고 계셔서, 심지어 좋아하셔서 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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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길과 순례자들


아직은 순례길 뽀시래기


오늘 걷는 시간이 좀 길었나 보다. 안 하던 운동을 격하게 하니 애플워치가 매일 칭찬해 준다.


산토도밍고 공립 알베르게 앞 광장에서 깔리모초를 마시며 뉴스레터 쓰는 중(지친 얼굴은 못 본척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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