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훈, 쉴 때는 제대로 쉬자)
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8. 로그로뇨(Logroño) → 나바레테(Navarrete) → 나헤라(Nájera) / 29.6킬로 / 2시간 14분
일주일간 약 200km 가까이 걷느라 힘들었던 몸과 와인축제의 시너지는 대단했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서둘러 준비하고 전날 안 좋았던 발목의 상태를 확인했다. 왼쪽 발목에 이어 오른쪽 발목마저도 부은 느낌이 있어서 하중이 실리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배낭은 동키로 보내고 나는 우선 다음 마을인 나바레테(Navarrete)까지만 가보고 상태가 좋지 않으면 버스를 타고 구간을 건너뛰기(보통 점프한다고 표현함)로 했다.
배낭을 싸서 호스텔 리셉션에 놓고 출발! 보통 알베르게가 아닌 일반 숙소에서 동키서비스를 보낼 때는 숙소 주인과 업체에게 한 번 더 알려주는 것이 좋다. 동키업체에서 늘 들리는 코스가 아니기 때문이다(공립/사립 알베르게는 순례자만 묵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순례자가 있지만 일반 숙소는 그렇지 않음). 길을 나서면서 숙소 주인과 동키업체에 각각 왓츠앱을 보냈다. 동키서비스를 이용할 거고 픽업 및 배달 장소를 알려준 후, 확인 차 사진도 보내두었다. 지금까지 이용해 오던 업체가 아니라 마음에 좀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생각해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나의 ‘운수 없는 날’ 이 시작되고 있었다.
순례길에는 구간 점프(Jump)가 있다. 시외버스, 기차나 택시로 어떤 구간, 보통 1~2 코스 건너뛰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계속 걷는 일이기에 몸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시간이 없어 일정을 줄여야 할 경우에 사용한다. 일종의 마법이다. 스페인은 시외버스, 기차가 싼 편이라 부담도 없다(고속열차 제외).
첫 마을까지 12km를 걸었지만 왼발을 절뚝거리는 바람에 오른발까지 무리가 오는 상황이 되어 나는 버스를 타고, 동행은 남은 17km를 그대로 걸어가기로 결정. 점심을 간단히 먹고 12시쯤 동행은 먼저 출발하고 나는 시외버스를 검색했다. 검색은 되는데 타는 곳이 어딘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구글맵에도 나오지 않는다. 절뚝거리며 한 시간 동안 버스정류장을 찾아 헤맸다.
관광사무소, 경찰, 동네 바(Bar), 슈퍼마켓 다 물어봤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가 번역기를 써도 다들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는 모르겠단다. 나처럼 헤매던 스웨덴 아저씨를 만나 둘이서 열심히 물었지만 헛수고. 작은 마을이라 일단 마을입구에 나가서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가 오면 손을 흔들어보기로 했다. 오후 1시 15분, 버스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안 오지? 조금 초조해졌다. 다행히 곧 나타난 버스를 발견!
나 : “이거 나헤라(Najera) 가는 거야?”
버스기사 : “Si. (스페인어로 그렇다는 뜻)”
버스로 17km를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6분, 단돈 1.35유로(약 1,900원). 굳이 3시간 걸려서 왜 걷는 것일까. 순간 띵했지만 걷는 건 걷는 대로 의미가 있지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에어컨도 나온다고요.
전날 주비리(Zubiri) 공립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을 나헤라(Nájera, 오늘의 목적지) 공립 알베르게에서도 만났는데, 땡볕에 열심히 걸어오다가 버스 타면 16분이란 말을 듣고 현타가 와서 힘이 빠졌다며 웃었다.
그중 태준은 나의 발 상태를 걱정해 한국에서 가지고 온 테이핑용 테이프도 주었고, 어제 만난 일본인 물리치료사의 연락처도 받아뒀다고 했다. 다음번 도시에서 연락할 테니 한 번 봐달라고 부탁까지 해뒀다고. 고마웠다. 저 테이핑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왼발 아킬레스 건에 염증이 생겨 발목 뒷부분이 부어올랐고, 힘을 못주는 왼발 대신 오른발에 과한 힘을 쓰게 되면서 오른발 무릎 십자인대 부근도 뻐근하게 아파왔던 것이었다.
하루 평균 23km 걷는 일을 쉽지도 않지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통증이 생기고 절뚝거리는 발을 보니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이대로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다 아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오늘은 염증약 잘 먹고 잘 쉬자. 그리고 내일의 삶은 내일, 그다음의 삶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느라 현재의 시간을 쓰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한편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던 그때, 숙소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도 내 배낭을 픽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묵을 숙소로 잘만 도착할 줄 알았던 배낭은 업체의 실수로 배달이 되지 않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버스까지 타고 온 내가 다시 가지러 갈 수 없는 노릇이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동키업체는 잘못을 나에게 미루었고 그나마 숙소 주인은 두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내 배낭을 택시 태워 보내거나 내일 내가 묵을 숙소로 다시 보내주거나. 택시비가 얼만지 물어보니 35유로라고. 적잖은 돈에 고민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동행의 짐도 내 배낭에 들어있었고 오늘 안 씻으면 너무 꼬질꼬질할 테니. 숙소 주인에게 택시 배달을 부탁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에 택시 기사가 왔고, 아픈 발 때문에 동행이 재빨리 달려갔다. 현금 50유로를 주고 35유로라고 말해줬는데 택시기사가 50유로를 그대로 낚아채갔단다. 이게 무슨... 말이 통하지 않으니 동행은 상황도 모른 채 거스름돈도 받지 못했고 내가 절뚝거리며 도착했을 때 택시기사는 이미 가버린 상황.
화가 치솟아 올랐지만 누구한테 화를 내겠는가. 50유로면 7만 원이 넘는 돈이다. 말이 안 통하니 어디에 뭐라고 신고하기도 어렵고. 속도 상하고 눈앞에서 50유로를 뺏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다. 동행도 말은 안 했지만 꽤 속이 상한 눈치. 둘이 가만히 있다가 내가 말했다. “앞으로 쉬어야 할 땐 그냥 맘 편히 쉬는 게 좋겠어.” 다행히 동행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래, 몸이 더 중요하지. 무리하지 말고 자기 속도대로 가는 거니까. 쉴 때는 쉬자.”
이대로 쉽게 걷지 않아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어보겠다고 아픈 발목을 더 혹사시켰고, 버스비도 지출하고 그보다 더 큰 택시비 50유로도 써버렸다. 걷는 게 뭐라고. 걸으러 왔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아침에 그냥 배낭 메고 버스 타고 왔으면 5유로도 쓰지 않았을 거다. 발목도 더 쉬게 해 줄 수 있었고. 뭔가를 꼭 해내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좀 쉬어가도 괜찮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뭔가를 얼마나 이루었냐가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는 삶의 중요한 가치가 성공(성과)이 아닐 때가 훨씬 더 많다. 나에게 중요한 가치는 뭘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뭔지 문득 궁금해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