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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Mar 06. 2024

09. 그래도 괜찮다

(feat. 와인축제)

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7.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 로그로뇨(Logroño) / 27.9킬로 / 7시간 35분


존재와 쓸모

오늘은 배낭을 보내지 않고 메고 가기로 한 날. 이쯤 되면 몸이 좀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배낭을 보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빨리 준비해서 나가기로 한다. 걷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무릎보호대, 압박스타킹, 양말 두 겹까지 단단히 준비하고 동행에게 짐도 조금 나눠줬다.


해가 뜨고 출발하는 건 처음인데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의가 있지만 입는 게 더 귀찮아서 그냥 걷는다. 빗소리, 숨소리 그리고 자갈을 밟는 발소리 셋 뿐. 내가 걷는 건지 다리가 스스로 걷는 건지 싶은 순간이 오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데 서울에서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내 존재와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던 그날들이. 타의로 일을 그만두었다곤 하지만, 일하면서도 나를 증명하려 애썼던 6개월과 그동안 눈에 보일만한 어떤 아웃풋이 없다는 현실이 두려웠다.


‘스타트업 시장이 점점 양극화되는 상황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나에게 지금 커리어가 남아는 있나. 몇 년 후면 마흔, 나는 서른여섯 커리어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있나? 어디로 가야 약 10년의 커리어를 지켜낼 수 있는 걸까. 혼자서 일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데. 근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뭐지? 그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한 건 아니었는데. 뭐가 맞는 걸까.’


내 존재와 쓸모에 대해 의미를 잃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앞으로의 기대도 없었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날은 스스로도 쓸모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내면의 목소리보다 외부의 세력이 커진 탓에 조그마한 울림에도 나라는 사람은 뿌리째 뽑혀나가는 것이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만 나를 마주하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뿌리째 뽑혀나간 나는 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통을 그대로 절감해야 하니까. 한국에서는 온통 나를 옥죄어오는 것들 뿐이었다. 나이, 커리어, 경제적 상황, 결혼, 연애, 외모 등에 대한 기준과 판단. 그러니 현실이 어떻든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을 수밖에.

부슬비 속 생각에 잠겨 걷는 중


마음을 찌르는 생각들로 걷기를 한참. 목적지를 4km 남겨둔 때, 그보다 더 큰 통증이 발목에 찾아왔다. 왼쪽 발 뒤꿈치에 신고 있는 트레킹화가 닿는 것만으로도 수천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 한 통증이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렸고 그 자리에 일단 주저앉고 싶었다.


앞서가던 동행에게 발 때문에 도저히 걸을 수 없으니(차마 주저앉고 싶다는 말은 못 했다) 택시를 불러보겠다고. 먼저 가있으라고 얘기했지만 매고 있던 배낭을 달라고 하더라. 배낭을 벗으면 하중이 없으니 걷는 게 조금이나마 나을 거라고. 그도 무겁고 힘든 길일 지라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계속 달라고 재촉했다. 한사코 거절하는 나에게 그냥 도움을 좀 받으라며 배낭을 앗아갔다. 빗속에서 모든 아픔을 짊어진 것처럼 절뚝이는 내 속마음은 더 좌절스러웠다. 어떻게든 알아서 하는 게 낫지 도움을 받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길을 걷는 동안에도 내 존재와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말이 4km 지 걸으면 1시간. 숙소까지 8kg 되는 내 배낭을 추가로 짊어지고 가주는 동행에게 고마움보다 미안함과 속상함이 컸다. 힘들게 한 건 아닐까 또 나는 이것도 못할까 싶고(읽는 여러분은 이게 무슨 소린지 싶으시겠지만). 힘들게 숙소에 도착해 씻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오늘의 모든 일들이 신기루처럼 느껴지더라.


나의 존재와 쓸모가 어떻든 오늘 나는 걸었고, 도움을 받았으며 무사히 도착했다. 동행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오늘의 하루를 마무리하러 나가자고 했다. 오늘의 수고를 알아주고 지금의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나 존재와 쓸모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그래도 괜찮다.




로그로뇨(Logroño) 와인축제

와인축제 티켓과 몇 잔 맛보고 그저 즐겁고 약간 취한 밤


이전 편에도 나왔지만 스페인에는 동북부에 위치한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라 리오하(La Rioja) 자치주가 있고, 로그로뇨(Logroño)는 그 자치주의 주도다. 9월은 포도수확의 시기이자 산 마테오 축일이 있어 와인축제가 열리고 그 기간 동안 도시는 떠들썩해진다. 내가 도착한 목요일이 때 마침 산 마테오 축일이라 축제의 하이라이트 날이었다.


도시 중심 광장에 부스가 열리고 지역의 와이너리들이 부스에 참가한다. 와인축제 티켓(1인 12유로)을 사면 와인잔과 와인잔을 담아갈 미니 가방을 주는데 티켓은 많은 인원이 구매할수록 가격이 싸진다(신기혀). 와인잔은 진짜 유리로 된 와인잔이고 가져갈 수 있지만 걸을 날이 많아 가져가는 것은 포기.


12유로, 한화로 약 17,000원에 와인 5잔 + 타파스 3종류 + 데낄라 1샷을 맛볼 수 있다. 양도 꽤 많이 준다. 덕분에 아주 거나하게(참고로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알쓰) 취해서 오늘의 수고를 아주 기쁘게 누렸다. 와인축제 정말 꿀이다! 그렇게(의도하지 않았지만) 매일 와인을 마시게 되고 이후 새로운 마실거리를 알게 되는데...





Post Card

대도시 오니까 조금 더 굵어진 츄러스. 로그로뇨 디저트 맛집이었는데 저 초콜릿 기가 막혔다.
광장에서 열리고 있던 와인축제
아시안마켓 갔다가 밤에 지나가는데도 아직 한창인 와인축제
모스카토와 망고맛 보드카 샷(어후 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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