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5.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aina) → 에스테야(Estella) / 22.0킬로 / 5시간 8분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6시 반 길을 나선다. 일교차가 큰 스페인의 새벽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다. 어제 보았던 여왕의 다리를 건너 씩씩하게 걸어간다. 무릎이 조금 아파왔고 왼쪽 발목에 힘이 없지만 꿋꿋이 걷는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걷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동이 트고 날이 밝는다. 새삼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난 것에 감사한다. 이만큼 왔으니까. 그러다 마주한 시라우키(Cirauqui) 마을이 예뻐 사진을 찍고 있으니 깨달음이 왔다. 마을이 위에 있다는 건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거다. 허허 그럼 내리막도 있겠지? 하고 웃어버린다.
순례길에서는 매일매일 만나는 낭만이 있다. 낭만의 종류는 다양한데 오늘의 낭만은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쉼터다.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정원 안에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올리브 나무 그늘에서 간식도 먹고 누워있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올리브 나무는 조금 낮고 양옆으로 풍성하게 자라는데 그만큼 햇살과 어우러지는 그늘이 아롱지다. 나도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늘에서 가만히 아롱거리는 햇빛의 눈부심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행복했다. 서울에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조금 숨을 돌리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순례길을 걸으면 많은 생각을 할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뭐랄까, 생각의 양보다는 질이다.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괜한 걱정이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대신에 저녁은 뭘 먹을까, 난 그동안 무엇 때문에 힘들었을까 와 같은 생각을 한다. 나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며 혼자 걷는 고독을 잘 보내보는 것이다. 오늘 동행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근래 본 네 모습 중에 지금이 되게 좋아 보여.” 이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응, 맞아. 지금 나 행복하고 좋아.”
‘아름다운’이라는 말의 아름은 나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나다운 게 제일 아름다운 거라고. 각자 저마다의 모습대로 아름다운 우리는 얼마나 아름(나) 답게 살고 있지 못한가 싶을 때 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있는 그대로, 너의 있는 그대로 행복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니 아름답게 흘려보내는 매일이 되길. 우리 다 같이 행복해지자!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