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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Oct 05. 2020

트로트가 효자네

이번 추석은 코로나로 인해 단출했다.

25명이 훌쩍 넘는 친척들 간의 모임도 없이 큰집이라는 이유로 며느리 둘과 어머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집안의 여자들은 이번 차례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도 더불어.


차례를 다 모시고 어머님은 자연스레 TV를 켜신다.

며칠 전부터 장을 보시고 어제 늦게까지 음식 준비를 하셔 지칠 대로 지쳐 계신 어머님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돈다.


" 야야, 쟈네 봐라. 어찌 저리 잘 부르노~"

하시며  치우기 시작한 차례상 앞에 서 계신다.

거기에 셋째 삼촌과 예전 방송국에 다니셨던 막내 삼촌의 합세로 트롯의 세계와 저 프로그램을 만든 PD 이야기로 들어간다.


사실 TV만 틀면 여기저기 나오는 요즘 트롯의 대세들에게 적잖이 질려 있던 나는 열심히 부모님 세대들의 흥분에 동참하긴 힘들었다.

셋째 삼촌의 말에 나는 며칠이 지나서야 그 의미가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나 저 프로그램 아니었음 죽었어요! "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며 웃고 넘겼다. 외출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식들의 방문도 자제하는 요즘에 저 트롯가수들의 노래는 부모님들의 울적한 마음을 채워드리나 보다 정도에서 그쳤다.


아버님은 식사를 하시면서도 TV에 눈을 못 떼시면서 보셨다.

재방송인 걸 알아챈 나는

" 아버님, 저거는 본방 못 보셨나 봐요? "

" 아이다~ 몇 번을 봐서 쟤가 이번판에는 진다. 그리고 재방 때는 편집을 해서 쟤 우는 장면은 없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아버님의 설명에 어머님도 보태시고 누구는 무명이 길어 힘들었네, 누구는 자작곡을 만들어 실이 좋네.. 하시며 마치 중대한 지식을 자식에게 가르치듯 자세히도 알려주셨다.  

어디 가서 그들의 팬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 그들의 정보를 어머님 아버님 덕(?)에 모두 다 알게 되었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그렇게 사이좋게 한 가수를 칭찬하며 한편을 먹으신 시부모님들은 어떤 한 가수의 인성에 대한 대립으로 여야 갈등보다도 더하고 격하게 언성을 높이셨다.

집안의 제사를 두거나, 집안 대소사에 따른 대립이 아니고 한 가수의 말투의 잘잘못을 따지며 대립각을 세우시는 진지함 때문에 커피를 타던 나의 손은 멈췄다.


차례 모시고, 트롯 신들도 모시고, 다음은 친정으로 향했다.

엄마는 저녁을 한상 차려 놓으시고 이따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이 있다 하셨다.

그 눈빛에 나는 직감했다.

그리고 적중했다.

트롯가수들의 시상식으로 네 시간이나 하는 그 프로그램을 같이 보면서 아까 시어머님에게 들은 그들의 신상을 처음 듣듯이, 너무 재밌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듣고 있어야 했다.

그 사이 남편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꼼짝없이 밤 12시가 넘어까지 엄마와 같이 그들을 보면서 엄마도 보았다.

그들은 다른 가수가 노래 부를 때에도 매번 신나게 같이 노래를 불러주고 응원해 주는 모습에 엄마도 같이 좋아하시며 이 시간을 흘려보내신다. 자식 어느 누가 네 시간을 이렇게 즐겁게 해 드릴까?

코로나라 부모님 찾아뵙는 시간이 적어진다고 진심으로 마음 졸이는 자식이 얼마나 될까?


그들의 노래로 부모님들은 어릴 적 고향을 떠 올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한다.

그 공허한 시간을 그들의 노래와 음성으로 응원을 주고 웃음을 주는 그들 덕에 낮에 셋째 삼촌의 그 한마디가 진심이었다는 걸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들이 어디 나가서 자식 자랑을 저렇게 진심으로 마음껏 하실 수 있을까?

몇 시간씩 걱정거리 없이 그들의 노래에 푹 빠져서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해 드린 그들은 어쩌면 코로나를 지나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가장 잘해드리는 효자인 거 같다.

새삼 진심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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