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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Sep 16. 2020

공금으로 주식을 샀다


아침 9시 되기 전에 한 단톡 방에 글을 올린다. 마음이 급하다.

" 얘들아~ 우리 올해는 여행 못 갈 거 같은데 우리 공금 일부를 주식으로 사면 어때? 통장에 이자 1원도 안 붙는데.."

" 안(친구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 마음대로 해"

" 그래? 네가 알아서 잘 굴려봐! "

친구들은 업무 시작 준비로 분주하다.

9시 전 공금의 상당 금액을 증권계좌에 이체해 놓고 9시 땡 하자마자 찜 해놓은 주식 매수를 시작한다.


주문이 정상적으로 체결되었습니다


내 개인적으로 주식을 조금 하고는 있지만 공금으로 투자를 하니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참에 주식창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이 공금의 시작은 40세 여행부터이다.

여고생 동창 네 명인 우리는 치열하게 공부도 하고 고교 때는 쉬는종이 울리자마자 매점으로 전력질주 해 가며 먹는 거에 목숨도 걸어보고 대학에서는 진로를 같이 고민하고 휴학도 유학도 곁에서 봐주며 반짝이는 청춘을 같이 보냈다.

결혼할 즈음 남편감이라며 선보이기도 하고 맛난 거 얻어먹기도 하고 서로의 결혼식에서는 식장 맨 앞줄 쪼로록 앉아 이 결혼식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 내내 울어 재끼기도 했다. 그 울음이 어떤 감정인지 아직도 정확히 설명할 길은 없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같이 키우며 가족끼리 다 같이 여행도 다녔다. 네 명중 한 명만 골드미스이다.

그 골드미스 덕에 우리의 정신 연령은 가끔 아줌마임을 잊을 때도 있다.


40을 맞이한 어느 해, 우리는 남편도 아이들도 어떠한 걸림 없이 우리끼리 해외여행을 떠나자 했다.

나의 얼리버드 항공권 예약과 취소 불가 호텔 예약은 우리의 강한 의지를 대변했다.

드디어 어느 11월 새벽. 우리 넷은 인천공항에서 상기된 얼굴로 모였다.

누구는 회사 업무에 새벽까지 일하다 바로 온 친구, 누구는 딸아이가 열이 살짝 있다 걱정하며 온 친구, 나와 미혼인 친구는 그 새벽에 풀 메이크업을 한 채 한껏 멋을 내고 구두도 신고 나타났다.


작년 11월 상해여행

그렇게 시작된 우리들만의 여행은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와이프도 아닌 여고생을 가장한 중년의 아줌마들이 떠나는 며칠간의 일탈이었다.

떠나기 전 여행지의 맛집도 수집해가며 한 달의 준비기간을 즐긴다. 어쩌면 일 년의 11월이 우리는 가장 설레는 달일지도 모르겠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뽀송뽀송한 침대 시트가 너무 좋다. 김영하 씨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는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라고 쓰여 있듯이 아침에 호텔을 나서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돌아오면 싹 정리되어 있는 방.. 환상적이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이 새로운 리셋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가 치우지 않고 남이 차려 놓은 조식 뷔페로 아침만 먹고 몸만 쏙 빠져나와 버리면 그만인 호텔에서의 여행.


우리 여고 친구들은 각자 찾아온 온갖 정보들을 공유해서 같이 움직인다. 굳이 잘할 필요도, 맛집이 아니어도 좋다. 각자의 생각을 두서없이 떠드는 수다와 누군가의 이름이 생각 안 나 네 명의 머리 맞대어만 떠오르는 그 쉼도 이제는 괜찮다. 누구를 챙기거나 시간에 메이지 않는 그 자유로움이 좋다. 학원 데려다 줄 딸아이도, 밥 차려줘야 하는 남편도 없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것을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며칠인가.


네 명의 조합도 좋다. 두 개의 방에 누구와 룸메이트가 되어도 어색함 없는 사이인 데다 아침잠이 많은조, 하루 종일 짤짤 거리며 돌아다녀야 하는 조로 나뉘어 룸이 정해지기도 한다.

<섹스 인 더 시티>의 뉴요커 네 명처럼 그렇게 멋스럽지도 예쁘지는 않지만 그들보다 서로의 깊이감 있는 친구사이가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늘 설레던 11월을 그냥 보내야 한다. 일상의 큰 일탈이었던 우리의 여행 공금은 이렇게 해서 주식에 투자된 것이다.


서운하다. 그 시간이 너무 그립다. 다시 올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생각 끝자락에는 이 투자된 공금이 배로 불려져서 내년에 유럽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품어본다.

작년에 올해의 코로나의 존재를 상상 못 했듯 내년의 센 강을 걷고 있는 우리를,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상상으로 유럽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올해 11월이 지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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